937화
친구들은 경악과 충격 혼란으로 모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한은 담담하게 조언했다·
“표정 관리해· 빠져나가고 싶으면·”
“너 너···!”
열정적인 눈빛으로 질문하려던 아산도 놀랐지만 옆에 있던 앙라고는 아예 씨근대며 이한을 노려보았다· 배신감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넌 또 왜 그래?”
“스테달 님이 가짜였다니···!!”
“······”
연극 클럽 2학년 중 스테달이란 인물에게 가장 푹 빠진 건 앙라고였다·
본인도 해안 지역 위치한 기사 가문 출신인 만큼 스테달의 일대기가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어떻게 해적들의 보물지도를 훔쳐 재산을 모았는지 꼭 묻고 싶었는데 그게 거짓말이었다니·
“지금 그게 중요하냐? 아니· 그보다 들은 지 한 시간도 안 됐을 텐데 뭘 그렇게 푹 빠진 거야?”
“시끄러워! 네가 뭘 안다고!”
“조용히 해· 알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살코는 친구의 입을 다물게 했다· 이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너도 연극 클럽 소속이었나?”
“아· 그래· 하지만 연극을 좋아하는 건 아니야·”
살코의 말에 다른 학생들이 야유를 퍼부었다· 닐리아는 아예 엄지를 아래방향으로 흔들어댔다·
하지만 살코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연극이 상영되는 궁전 홀 극장 희대(戲臺)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지· 나중에 이런 걸 지으려면 많이 봐두는 게 좋지·”
“과연· 너답다 살코· 참· 그러면 연극에 대해 잘 모르겠군· 내가 기초적인 것 몇 개만 가르쳐주지· 알카르마타 가문과 일혼 가문의 연인들이···”
“그건 안다· 워다나즈··· 내가 연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지 기초적인 상식도 없는 머저리라는 게 아닌데·”
살코는 어이없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더 어이없는 건 이한이었다·
‘이 자식· 연극 엄청 좋아하면서 뭐가 아니라는 거냐?’
앞으로 연극 안 좋아한다는 놈들의 말은 절대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이한은 입을 열었다·
“자· 다들 들어봐· 방금 말했듯이 난 너희를 탈출시키기 위해서 온 거다·”
“하 하지만 선배들한테 말없이 멋대로 빠져나가는 건 좀···”
“선배들이 의뢰 맡긴 건데·”
“······”
2학년 친구들은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에인로가드에는 정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겉으로는 ‘우린 명예롭게 연극을 보러 온 거야 탈출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니’하던 선배들이 뒤로는 조용히 의뢰를 맡기고 있었을 줄이야·
‘우리도 배워야겠다·’
“스테달! 뭐하나! 어서 돌아오게!”
대화하는 사이 귀족들이 이한을 불렀다· 마치 십년지기 친구를 대하는 듯한 환영이었다·
요네르는 황당한 눈빛으로 물었다·
“왜 저렇게 친해졌어?”
“해적들한테 어떻게 탈출했는지 이야기하다보니까 갑자기 사람들이 오더라고· 일단 다녀올게· 너희들은 아직 소식 못 들은 클럽 회원들한테 정보 공유해줘· 티내지 말고· 소란을 일으키면 바로 나갈 준비해야 하니까·”
이한 아니 스테달은 그 말만을 남기고 다시 귀족들에게 달려갔다·
남은 친구들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란을 어떻게 일으킨다는 건데?”
“혹 혹시 폭발 같은 걸 일으키진 않겠지? 아무리 그래도 워다나즈잖아?”
“지금 제국에서 마법으로 악명 높은 가문의 이름을 굳이 다시 말하는 건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은데···”
* * *
“해적들 말입니까· 썩 유쾌하지 않았지요· 딱딱한 빵이나 주먹밥이 식사의 전부였고 가끔 함정을 파거나 숙소를 습격할 때도 있었습니다·”
“저런!”
“징벌ㅂ 아니 감옥이 있었는데 반항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여기에 갇혔죠·”
“세상에!”
“해적 대장의 하수인들이 있었는데 이 하수인들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감시를···”
과묵하고 우아하지도 않은 도시에는 새로 나타난 사람인 스테달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 이야기가 귀족들의 심금을 강하게 울렸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란 말인가! 혹시 사기꾼 아닌가?’하고 의심하던 귀족들도 스테달의 이야기를 직접 듣자 눈물을 펑펑 흘리며 감동했다·
저런 열악한 환경에서 빠져나와 기어코 보물까지 찾아내다니·
신의 섭리는 정말로 존재하는 걸지도 몰랐다·
“스테달! 스테달!”
“스테달· 혹시 다음 달에 내 저택에 와줄 수 없겠나? 가문의 사람들과 자네를 대접할 기회를 주게!”
원래 한 번 사람이 호감을 사면 사소한 단점들도 매력으로 보이기 마련·
거칠고 말수 적은 스테달은 매혹적이고 비극적인 과거를 가진 야성 넘치는 귀족으로 자리 잡았다·
‘음· 다음부터는 좀 더 평범한 과거로 해야겠다·’
이한은 후회하며 자신을 붙잡는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의심을 받지 않게 열심히 준비한 건 좋았지만 이렇게 인기가 좋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일부러 대답도 짧게 하고 퉁명스럽게 굴었는데 대체 왜?
‘으음· 궁전 후문은 탈출하기에는 별로 좋지 않겠군· 사방이 탁 트여 있어서 바로 발각될 거야· 주변에 몸을 숨길 곳이 많아야 하는데· 날아다니는 탈것을 쓰는 것도 고민해봐야겠어· 땅굴을 지금 만들어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살코가 잘 하긴 할 텐데·’
산책하는 척 궁전 근처의 길들을 확인하던 이한은 멈칫했다·
저 멀리 삼삼오오 모여서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귀족들 중 위화감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뭐지?’
상대의 영혼에서 매우 이질적인 흔적이 잔가지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을 보니 위화감을 느낀 건 이한밖에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그게 이상하진 않았다· 원래 영혼을 탐지하는 건 마력을 탐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난이도 높은 일이었고 마법사들 중에서도 숫자가 많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상대가 가진 흔적은 아주 희미하고 흐릿했다· 이런 건 깊게 탐사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다·
영혼의 색을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난이도가 있는데 거기서 더 깊게 들어가 안을 자세히 탐지하는 것이니···
그러나 이한은 영락 이후 영혼을 탐지하는 능력이 매우 발전한 상태였다·
덕분에 어지간하면 놓쳤을 흔적도 그대로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사악한 느낌인데·’
이한은 잠깐 고민했다·
사실 그냥 넘어가면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다·
영혼에 저런 이상한 흔적이 남는 건 생각보다 다양한 이유로 가능했으니까·
수상한 마법 실험이나 연구에 투자했다가 그 여파를 겪은 걸 수도 있었고 귀족 본인이 어떠한 마법이나 물약을 복용하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한 본인도 지금 숨기는 게 있는 상황 아닌가· 굳이 소란을 피워서 좋을 게 없었다·
‘왜 쳐다보는 거지 저 놈?’
마드프는 처음 보는 귀족 놈의 시선에 떨떠름함을 느꼈다·
들어보니 제국 남부 출신 귀족인 모양이었다·
나고 가문 어쩌구 했던 것 같은데···
만약 마드프가 평범한 귀족이었다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불행히도 마드프는 평범한 귀족이 아니었다·
‘프라흐갈 님의 이름을 알려야 하는데· 설마 방해가 되진 않겠지·’
사악한 꿍꿍이와 계획을 품고 들어온 만큼 사소한 시선도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나고 님이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저는 마드프라고 합니다· 그랑덴 시는 이번이 처음이지요·”
“안녕하십니까·”
스테달의 목소리는 거칠고 태도는 딱딱했다·
원래라면 불쾌해야 하겠지만 마드프는 오히려 안심했다·
상대가 무례한 사람이라면 아까 쳐다본 것도 별 의도가 없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연극에 대해서는 잘 아십니까?”
“어느 정도는 압니다·”
“과연· 저는 잘 모릅니다· 혹시 좋아하는 연극이 있으십니까?”
“···알카르마타 가문과 일혼 가문에 관련된 이야기는 알고 계시겠죠·”
“잘 모릅니다· 알려주시죠!”
물론 잘 알고 있었지만 마드프는 상대를 속여 넘기기 위해 일부러 겸손하게 행동했다·
누구나 아는 것에 대해 설명하는 걸 좋아했다· 신나게 떠들다보면 마드프에 대해 없던 호감도 생기리라·
“말재주가 없어서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저런· 아쉽습니다·”
그러나 스테달은 길게 말하기 귀찮다는 듯 대답하고 돌아섰다·
이것 또한 무례한 태도였지만 마드프는 이걸로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기분 탓이었나보군· 시끄럽게 떠들 놈은 아니야·’
* * *
“아주 수상하고 사악한 놈입니다· 경비를 올려야 합니다·”
-흐음!
데스 나이트들은 크게 놀랐다·
오늘 연극 모임에서 화제의 대상인 귀족이 찾아와서 다른 사람을 고발할 줄이야·
-하지만 증거 없이는 멋대로 손님들을 확인하거나 조사할 수 없습니다· 더 수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놈의 영혼에서 사악한 흔적이 느껴졌습니다·”
‘상당히 뛰어난 마법사로군·’
데스 나이트들은 이 스테달이란 귀족이 상당히 뛰어난 마법사라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이 많아서 번잡하고 어수선한 이곳에서 다른 자의 영혼에 자리 잡은 위화감을 알아차리다니·
-알겠습니다· 밖에 있는 기사들을 불러서 경계 태세를 올리고 손님들을 확인해보도록 해야겠군요·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도 좀 불러주십시오·”
-그건 좀··· 학생들을 지킬 호위가 필요합니다·
데스 나이트들은 뻔뻔하게 변명했다· 이한은 속으로 욕했다·
감시면서 무슨!
“전부 투입하란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적절한 인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주변을 확인해야 합니다·”
-···에잇· 알겠습니다· 수상한 사람이 있다면 그걸 우선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나고 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영혼의 사악한 흔적이라 하더라도 그게 꼭 수상하단 증거가 되진 않을 텐데 어떤 점 때문에 이 자를 수상하게 느끼신 겁니까?
“······”
이한은 잠깐 고민했다·
상대가 연극을 몰라서라고 대답하면 데스 나이트들이 바로 수갑 채운 뒤 ‘이 자식 가짜 아냐?’라고 할지도 몰랐다·
“···보는 순간 느껴졌습니다·”
-과연!
고발을 끝낸 이한이 돌아서서 나가자 데스 나이트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소문은 들었는데 대단한 사람이군· 게다가 짐승 같은 직감이 있어· 눈빛을 봤나?
-남부 해적들 사이에서 탈출했다잖나· 평범한 인물은 아니지· 상대의 수상함도 그런 직감으로 느꼈을지 몰라· 더더욱 주의해야겠군·
화제만 전해서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그 마법적인 능력하며 야성적인 직감까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어디서 이런 인물이 나타났단 말인가?
-그런데 이상하게 이름이 낯설지 않나?
-그렇군·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 * *
“죽음의 기사들이 줄어든다!”
“쉿· 표정 관리해!”
데스 나이트들이 다가오자 학생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아덴아르트는 잘 하지도 못하는 휘파람을 애써 불려고 했다· 호위로 따라온 로웨나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하지 말라고 작게 격언했다·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이여· 우리는 너희들을 믿고 있기에 감시를 조금 줄이려고 한다· 설마 이 믿음을 배신하진 않겠지?
“물론입니다!”
학생들은 가식 섞인 태도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주변을 감시하던 데스 나이트들이 사라지자마자 속삭였다·
“워다나즈가 불 질렀나? 폭발? 폭발은 못 들은 거 같은데?”
“다른 구역에 홍수를 일으켰을 수도 있어·”
“독성 구름을···”
“···이한이 그러진 않았겠지·”
다행히 요네르가 이한을 변호해줬다· 닐리아는 ‘거대 괴수를 소환했을지도!’라고 말하려다가 친구의 발언에 눈치를 봤다·
“이야기는 다 전했나?”
“워··· 스테달!”
스테달 아니 이한이 돌아오자 친구들은 반가이 맞이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왜 죽음의 기사들이?”
“설명하자면 길어· 이야기는 다 전했다니 다행이군· 탈출로들을 확인해뒀어· 이제 각자 역할을 분담해야 해· 앙라고· 아산· 너희 둘은 연극 전까지 물약을 만들어줘·”
“독약?”
“괴수 소환 물약?”
“···진정시키는 물약을 말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