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2화
이한은 <아센의 편광경>을 챙기며 중얼거렸다·
기본적으로 환상 마법사들은 이한과 상성이 매우 좋지 않았다·
게다가 이한은 최근에 영락의 이치를 깊게 깨우친 상황·
영혼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아진 지금 환상 마법사들이 이한을 공격하려면 그 난이도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높았다·
‘다른 곳도 이랬으면 좋겠는데·’
예상 못한 행운에 이한은 기쁨을 느꼈다·
다른 곳도 이러면 좋겠지만 아마 힘들 것 같긴 했다· 아이템을 갖고 있는 마법사들이 모두 환상 마법사는 아닐 테니까·
환상 마법사라 하더라도 꼭 방어 마법을 환상 마법으로만 구성하진 않을 테고···
여기 우압의 공방에서 있었던 일은 행운이 따라줬다고 봐야 했다· 이한은 이런 요행을 바라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였다·
“···음· 너무 많이 부쉈나?”
편광경을 챙기고 밖으로 나가려던 이한은 멈칫했다·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공방을 확인해보니 마법이 조금 많이 부서진 것 같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방어 마법들이 파괴된 상태였다·
과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한도 변명거리가 있었다·
지하 공방에 걸려 있는 마법들이 워낙 많고 복잡하게 연계되어 있어서 이한도 사정을 봐가면서 적당히 해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몇몇 마법들은 파악도 힘든데다가 괜히 잘못 건드릴 경우 예상치 못한 역효과가 일어날 수 있었다· 이한 입장에서는 그냥 전력으로 때려 부술 수밖에 없었다·
아직 2학년 학생인데 무슨 힘조절을 하고 배려를 하겠는가· 그건 아직 무리였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위치 이동 방법 중 하나다· 선배들도 이해해주겠지·’
도둑이라기보다는 강도에 가까웠지만 이한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았고 목표로 한 물건을 챙겼으며 주변에 별다른 피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공방 안의 마법들이 처참하게 박살나긴 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으리라·
‘다른 선배들도 분명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이 있을 거다!’
* * *
“으음·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반대쪽에 위치한 길드 회관 건물 1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리언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괜찮을 거요· 저 학생은 임기응변이 뛰어나니·”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수재인 건 압니다만 아무래도 마법사의 공방 아닙니까·”
원래 아리언은 자신이 직접 우압과 접촉할 생각이었다·
공방 안에 틀어박힌 상대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려면 핑계를 대서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한은 아리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럴 경우 나중에 아이템이 사라졌을 때 추적당하기 쉽습니다· 아리언 님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군요·
-하지만 그냥 잠입하는 건 위험합니다· 마법사의 공방이지 않습니까·
-음· 일단 조심스럽게 탐색해보고 오겠습니다· 정 안되겠다 싶으면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지요·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자신이 직접 투명화 마법을 시전한 뒤 지하를 탐사해보겠다고 선언했다·
의지가 흔들림 없이 굳건해서 더 이상 말리지는 못했지만 역시 후회가 됐다·
마법사들의 공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리언은 잘 알았다·
그 크기가 작고 겉모습은 평범해보여도 어지간한 요새보다 단단하고 치명적인 게 마법사들의 공방이었다· 아무리 에인로가드 학생이고 워다나즈 가문 출신의 천재라지만 다른 마법사의 공방은 이야기가 달랐다·
실수 한 번에···
“됐습니다!”
“?!!”
이한이 밝은 표정으로 돌아오자 둘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빨리 돌아오다니?
“진입 방법을 찾으신 겁니까?”
“아· 아닙니다· 둘러보다가 그냥 힘으로 부술 수 있을 것 같아서 부순 다음에 상대를 기절시키고 챙겼습니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아센의 편광경>을 꺼냈다·
목표로 했던 아이템인 만큼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다·
물론 두 사람은 이한이 챙겨 나온 아티팩트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기에는 방금 들은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었다·
“잠깐 잠깐만요· 도련님·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이한은 상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경험 많은 상인이라서 금세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이 아티팩트에서 느껴지는 사악한 기운 때문에 그러시는 거겠죠· 제 생각에는 오염된 것 같습니다·”
마력으로는 잡아내기 쉽지 않았지만 이한은 <아센의 편광경>과 연결된 다른 차원의 영체 통로가 거무죽죽하게 변색된 걸 볼 수 있었다·
편광경으로 관측하거나 볼 수 있는 것들이 다른 사악한 차원의 힘으로 인해 은밀하게 오염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더 악질적인 건 마법사가 이걸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당장 마력을 확인해 봐도 이상한 점이 없는데다가 다른 사악한 차원의 힘도 즉시 영향을 끼치지 않아서 알아차리기가 힘들었다·
마법사가 위화감을 느낄 때쯤 되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타락한 상태가 됐으리라·
“오염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데 역시 아리언 님· 안목이 훌륭하시군요!”
“···아 아니· 오염된 거였습니까? 그걸 말한 게 아닙니다·”
아리언은 허둥지둥대며 서둘러 오해를 풀었다·
자신이 뭘 알겠는가· 아리언은 경험 많은 상인이었지 마법사가 아니었다·
우압이 수상한 아티팩트를 모으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저 편광경이 그런 아티팩트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자 이한은 의아해했다·
“그럼 뭐가 이해가 안 되시는 겁니까?”
“···방금 일어난 일 전부요! 공방의 구조를 확인하러 들어가신 분이 어떻게 편광경을 갖고 나온 겁니까?!”
아무르는 말 잘했다는 듯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수다스러운 성격이 아니었기에 지금 아리언이 캐물어주는 게 고맙기 그지없었다·
“아· 그거 말입니까·”
이한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머쓱해하며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투명화 걸고 몇몇 환상 마법 건 다음 1층을 통과해서 지하로 내려가니 마법들이 빼곡하게 설치되어 있었는데 힘으로 부술 수 있을 것 같아보여서 부수고 들어갔다···
“그게 전부입니다· 별 거 없어요·”
“······”
“······”
둘은 그들이 알고 있던 마법 상식이 부정되는 느낌에 괴로워했다·
···공방의 마법이 저렇게 쉽게 부서지는 거였나?
‘아무리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라지만 우압이 설치한 마법을 저리 쉽게 파괴해버리다니···’
아리언은 마음 속 깊이 전율했다·
아무래도 워다나즈 가문의 도련님에 대한 평가를 훨씬 더 올려야 할 것 같았다·
우압의 공방을 대낮에 저리 쉽게 털어버리다니·
“훌륭하군· 대단하오·”
아무르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칭찬했다· 이한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다른 마법이었다면 이렇게 쉽게 부수지 못했을 거예요·”
“하하· 내 고향에는 행운을 불러오는 것도 사람의 능력이란 말이 있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리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도련님· 혹시 안에 수습해야 할 게 있습니까?”
만약 불이나 위협적인 소환수라도 불러냈으면 사람을 보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하 공방의 위험이 언제 밖으로 번질지 몰랐다·
“아·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안에 있는 마법들은 다 파괴되었습니다· 별다른 위험은 없어요·”
“과 과연··· 그렇군요·”
에인로가드 학생을 앞에 두고 둘은 속으로 동시에 생각했다·
‘이걸 조용한 회수라고 할 수 있나?’
굳이 따지자면 조용하긴 했지만 너무 당당하게 습격하는 것 같은데···
‘아니다· 이번만 우연히 그런 거겠지· 워다나즈 가문의 도련님도 일부러 소란을 피우시진 않을 거다·’
* * *
다음 목표는 도시 중앙의 귀족 구역에 위치한 저택이었다·
무려 그린벨 가문과 연관이 있는 방계 가문의 저택·
그랑덴 시에서 그린벨 가문은 전통 있는 도시귀족 가문이었고 그 힘을 얕볼 수 없었다· 아리언은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방계 가문이지만 소란이 커지면 그린벨 가문의 사람들도 돕기 위해 움직일 겁니다· 그걸 제외하더라도 금전적으로 부유한 만큼 방비가 철저하겠지요·”
무시할 수 없는 후원자와 풍부한 금화로 방비된 저택·
아리언은 지금이야말로 정석적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물을 바치기 위해 찾아온 상인으로 위장하고 저택의 허실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음· 일단 안에 들어가서 확인 좀 해보고 오겠습니다·”
“···저번처럼 때려눕히고 갖고 나오시는 건 아니겠죠?”
아리언의 농담에 이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농담도 참 잘하시는군요!”
“농담이긴 했습니다만···”
‘약간 진심도 섞였지만·’
“저택 구조만 확인하고 나오겠습니다·”
둘은 근처 선술집에서 이한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골목에서 이한이 투명화 마법을 풀고 나오더니 깊게 숨을 내쉬었다·
“돌아오셨습니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자· 어떻게 준비를 도와드리면 될까요?”
“음· 그게·”
이한은 머뭇거리다가 배낭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안에서 다람쥐 동상 아티팩트를 꺼냈다·
선명한 붉은색을 뿜어내고 있는 이 구리 동상은 파셀레트 크라어 교수가 부탁한 예지 마법 아티팩트였다·
“사실 갖고 나왔습니다·”
“······”
“······”
아무르는 들고 있던 양철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리언은 어이가 없어서 상인으로서의 철칙도 잊어버리고 도련님을 노려보았다·
뭐가 어쩌고 저째?
“구조만 확인하고 나온다고 하셨잖습니까!?”
“아니··· 여기에는 사정이 있습니다·”
“혹시 상대가 너무 약해보였소?”
“무슨 소리십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이한은 둘의 반응에 손을 내저으며 최대한 해명에 나섰다·
우압의 공방에서야 행운이 따라줬기에 약간 강도처럼 행동했지만 이한은 원래 조용하고 흔적 없는 작업을 즐기는 마법사였다·
정면 승부를 좋아하고 과시하기 좋아하는 마법사는 애초에 위치 이동 클럽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런 만큼 이한은 이번 저택을 공략할 때는 정말 정석 중의 정석으로 갈 생각이었다·
남몰래 저택의 구조를 확인하고 빈틈을 파악한 뒤 다른 사람들의 힘을 빌려 저택에 방문하고 차근차근 혼란을 퍼뜨려 틈새를 더 크게 만들고···
우연처럼 보이는 수많은 사건들이 마법사만이 아는 질서로 엮이면 목표물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 조용히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한의 설명에도 둘은 시큰둥했다· 빨리 저택을 턴 이야기나 해달라는 표정이었다·
“···그 들어가 보니까 저택의 동쪽 구역은 물의 정령이 지키고 있더군요·”
물의 정령뿐만 아니라 강력한 물의 마법이 동관 안을 휘몰아치며 침입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한은 혹시나 싶어서 물 원소 통제를 시도해봤다·
외부 마법사가 쉽게 통제권을 뺏을 만큼 만만하진 않겠지만 시도해봐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한은 원소의 통제권을 손에 넣었다·
-···엇·
강력한 마력과 단련된 물 원소 마법들은 이한에게 저택의 마법을 강탈할 힘을 주었다·
웬 침입자가 원소의 통제를 뺏어갔다는 걸 깨달은 물의 정령은 분노해서 달려왔다·
그리고 이한을 목격한 뒤 재빨리 도망쳐버렸다·
-어···
이한은 생각보다 일이 커졌다는 걸 깨닫고 후퇴를 결심했다·
아직 저택의 다른 구역은 이변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언제라도 들킬 수 있는 시간문제였···
-누구냐! 어떤 놈이 마법을 멋대로··· 컥!
-젠장·
불운하게도 붉은 비단 조끼를 걸친 귀족이 소란을 듣고 달려왔다·
이한은 어쩔 수 없이 통제하고 있는 물의 힘으로 상대를 기절시켰다· 누군진 몰라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러고 나서 몸수색을 했는데 상대가 이걸 갖고 있더군요· 그래서 그냥 갖고 나왔습니다·”
“······”
“···이렇게 대놓고 갖고 나와도 되는 거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모습은 들키지 않으면서 이렇게 과격하게 갖고 나오는 도둑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