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1화
고대의 대마법사와 다른 차원의 왕이 황당해하는 동안 이한은 <실전 치유 마법> 시험을 보고 있었다·
치유 마법 학파의 강의들은 시험이 대부분 비슷했다·
몰려드는 환자들 치유하면서 버티기·
“후배, 축하해! 우린 행운아야!”
“예???”
이한은 선배의 말에 당황했다·
지금 앞에 있는 사냥꾼은 아까부터 계속 보라색 슬라임을 토해내고 있었다·
대체 뭐가 운이 좋다는 거지?
그러나 치유 마법 학파 선배는 진심으로 행복하다는 듯이 활짝 웃고 있었다·
“환자분들이 직접 학교로 오셨잖아! 이번에 야생 비행 몬스터들이 부쩍 늘어나서 길이 막혔다고 소문 돌았거든!”
제국 전역의 환자들은 각자 다양한 이유로 에인로가드를 방문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길이 열려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에인로가드를 방문하고 싶어도 하늘에 야생 와이번들이 광폭화 상태로 무리지어 돌아다니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면 최악의 경우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아티팩트들 챙겨라· 직접 방문해야겠다·
-······
안 그래도 피곤한 치유 마법 학파 학생들에게 있어 밖의 난관까지 돌파하고 환자들에게 도착하는 건 몇 배로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소문과 달리 환자들은 직접 탈것을 타고 에인로가드에 도착했다·
이 얼마나 행운이란 말인가?
“그, 그렇군요· 행운이네요·”
“그렇지?!”
치유 마법 학파 선배는 안도감에 가득 찬 웃음을 터뜨리며 새로 온 환자에게 달려갔다· 새로 온 환자의 왼쪽 손은 계속해서 다양한 금속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선배도 환자로 치료 받아야 할 거 같은데·’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선배가 행복해한다면 그건 좋은 일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크억, 크억· 크어억·”
아까부터 보라색 슬라임을 토해내고 있던 사냥꾼은 양팔을 허우적거렸다· 바트렉이 재빨리 양동이를 들고 가더니 마법 화톳불에 던져 태워버렸다·
“자· 더 토해내십시오·”
“끄어어억·”
사냥꾼은 원망 섞인 눈으로 바트렉을 쳐다보았다·
마법사라면 치유해줄 생각을 해야지 자꾸 토하라고만 하다니·
하지만 바트렉도 나름 정석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는 거였다·
‘슬라임 구토 말고 나머지는 정상이다· 이럴 때는 내버려두는 게 맞아·’
바트렉은 사냥꾼의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체온이나 맥박 같은 부분들에서 딱히 이상한 점이 없었다·
아마 오염된 마법이나 저주를 받은 것 같은데, 이런 건 목숨이 위험하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다리는 게 좋았다·
괜히 정체를 알아보겠다고 이리저리 들쑤셨다가 마법이나 저주가 강해지기라도 하면 환자만 위험한 것이다·
“바트렉· 내가 보기에는 지금 영혼에 약한 기생체가 붙은 것 같은데·”
“어? 뭐라고??”
새 양동이를 들고 달려오던 드워프 친구는 이한의 말에 놀랐다·
‘그 사이 확인했나?!’
감지나 탐색 계열의 마법을 쓰지 않고서는 상대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바트렉은 자신이 양동이를 옮기는 사이 워다나즈 가문의 친구가 멋대로 행동했나 싶어서 인상을 찌푸렸다·
“워다나즈! 분명 합의했잖냐! 괜히 악화될 수 있으니 마법 쓰지 않기로!”
“마법 안 썼다·”
“뭐?”
“마법 안 썼다고· 봐라·”
이한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사냥꾼의 영혼에 붙어 있던 약한 기생체가 밖으로 끌려나오기 시작했다·
마법을 쓴 것도 아니었고 다른 방법을 쓴 것도 아니었다· 순전히 의지만으로 상대의 영혼에 간섭한 것이었다·
“자·”
손짓과 함께 영혼 밖으로 끌려나온 기생체가 허무하게 소멸되었다· 사냥꾼은 갑자기 가벼워진 몸에 놀라서 눈을 끔벅였다·
“무··· 무슨, 마법을 안 썼는데 영혼에 약한 기생체가 붙었는지는 어떻게 알아낸 거지? 제거는 또 어떻게 한 거고??”
바트렉은 경악한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며 외쳤다·
심지어 보라색 슬라임을 토하고 있던 사냥꾼도 경악한 눈빛을 던졌다· 어찌나 놀랐는지 입에 남은 슬라임을 뱉지도 않은 채 쳐다보았다·
별다른 마법을 쓰지 않고서 영혼을 감지한 것으로도 모자라 간섭까지 하다니?
“그어어억···?”
“정말 아무 마법도 안 썼나? 혹시 무슨 가호 같은 건가?”
“음· 그러니까 그게 말이다·”
이한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싶어 고민했다·
지금 산맥 쪽에 웬 미친 마법사념체가 하나 있는데, 이 자의 일을 돕다 보니 고대 마법을 하나 좀 깨닫게 되었고, 그걸 깨달으니 영혼에 관련된 능력이 확장됐다···
‘너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설명하기에는 이야기가 좀 길 것 같은데 괜찮나?”
“물론이지!”
“그어어억!”
둘은 동의의 뜻을 표했다·
기본적으로 영혼을 인지하고 간섭하는 건 정령을 인지하고 간섭하는 것처럼 특별한 재능이었다·
환상 마법 학파뿐만 아니라 다른 마법 학파에도 영혼을 다루는 영역은 많았다·
상대방의 영혼이 뿜어내는 색이나 파장을 관찰해 감정이나 생각을 알아내는 것부터 시작해, 영혼을 붙잡고 뜯어내거나 자신의 영혼을 이탈시키고 일시 복제하는 수법 등등·
그러나 지금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보여준 능력은 단순했지만 비범했다·
마법을 쓰지 않고서도 인지하고 간섭할 정도의 영향력이라니·
“지금 에인로가드 산맥에 고대 대마법사의 사념체 비슷한 게 있는데···”
“······”
“······”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과거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에, 둘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 * *
“···그래서 난 그 사악한 야차들의 왕에게 속아서 하지 않아도 될 계약을 하게 된 거지· 여기까지는 이해했나?”
“다음에 마저 듣겠다· 워다나즈!”
바트렉은 결국 듣다가 포기하고 다시 환자들을 돌보러 가야 했다·
알카시스 교수가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마법사 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 사이 입에 있던 슬라임을 다 뱉어낸 사냥꾼도 감사인사를 했다·
이한은 깃펜을 들고 물었다·
“그런데 어쩌다 그런 기생체에 걸리신 겁니까? 영혼에 달라붙는 기생체는 흔치 않을 텐데요·”
단순한 호기심을 떠나 이런 기록은 나중에 다른 학생들에게 참고자료가 되는 만큼 제대로 적어놔야 했다·
사냥꾼은 민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친구하고 내기를 했는데··· 유적지에 들어갔다 나오기로 말입니다·”
“유적지요? 어떤 유적지 말입니까?”
같은 유적이라 하더라도 위험도는 천차만별이었다·
옛날 사냥꾼들이 쓰던 산장 같은 유적은 평범하게 안전했지만, 옛날 마법범죄자들이 쓰던 마탑 같은 유적은 그 위험도가 에인로가드 상층부만큼이나 살벌한 것이다·
‘그렇게 강한 기생체는 아니었으니 작은 마탑 유적 정도려나?’
“소문을 들어보니 고대에 멸망한 악신이 머물렀던 유적지라고 하던데요·”
“······”
이한은 바로 정색했다·
사냥꾼도 자신이 무모한 짓을 했다는 걸 아는지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그게··· 죄송합니다· 이게 참· 술이 뭔지! 내기가 뭔지!”
“다음부터 그런 내기로 저주 걸리시면 발드로가드로 가십시오·”
그렇게 말했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니 정말 악신 관련 영혼기생체일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그렇게 대단한 놈이었다면 훨씬 더 강력했을 텐데, 별다른 마법도 쓰지 않은 이한의 의지력만으로 끌려나올 리 없는 것이다·
‘아마 소문이 잘못됐거나, 그 이후에 유적지에 들어온 마법사들이 실험하다가 남긴 오염이겠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
이한은 지팡이에 박힌 <메아리의 돌>에서 미친 분신의 환영이 나오자 반가워하며 인사했다·
“스승님! 정신을 차리셨군요!”
왕족은 정신을 잃은 적이 없다· 제자 주제에 같잖은 걱정은 하지 말도록·
‘음· 과거 이야기를 꺼내면 화내시겠지?’
고대의 젊은 해골 교장을 예시로 들면서 ‘상냥했던 옛날의 모습을 되찾아보시는 건 어떠십니까?’라고 물어보려다가 이한은 자제했다·
생각해보니 버두스 교수가 와서 ‘신입생 때 말 잘 듣던 모습으로 돌아와줘 워다나즈!’라고 한다면 이한도 한 대 때릴 것 같았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시험 보고 있습니다·”
질문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했군· 정말로 뭘 하고 있냐는 게 아니라···
-워다나즈! 이쪽으로!
“앗·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 바빠서요·”
이한은 돌을 끄고 서둘러 달려갔다· 선배가 저렇게 부르는 걸 보니 도움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
감히?
“아니·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했잖습니까!”
이한은 다시 나오는 미친 분신의 환영에 어이없어했다·
분명 저번에 멋대로 나오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해놓고 왜 이런단 말인가?
‘혹시 반전의 충격으로 편리하게 기억을 잃으신 건 아니겠지·’
지금 제자 네 앞에 놓인 광활한 마법의 바다와 여기 널브러진 비루하고 하찮은 자들을 비교해봐라·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
“후자죠· 저 지금 시험이라니까요·”
이한은 뭔 소리를 하냐는 듯이 미친 분신을 타박했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건 다행이었지만 아직 충격이 남아있었는지 자꾸 헛소리를 해댔다·
···아무리 공헌을 세웠어도 지금 이런 태도는···
미친 분신은 싸늘한 표정으로 제자의 예의범절을 지적하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한은 환자를 확인한 다음 선배와 떠들었다·
“아니· 어떻게 내장이 솜으로 바뀐 겁니까?!”
“진정해! 아직 최악은 아니니까·”
“솜뭉치가 가득한데 어떻게 최악이··· 교수님 부르죠!”
“안 돼! 교수님도 지금 바쁘시다고!”
“그럼··· 앗· 스승님· 오신 김에 좀 도와주시죠· 이거 무슨 마법인지 아십니까?”
삼중 변환 마법을 사용한 저주군· 한심하다· 저런 겉모습에 속다니·
“과연···! 그런 속임수가!”
잡것들이 자주 쓰는 속임수지·
이한은 미친 분신의 조언에 감탄하며 즉시 따랐다·
과연 변환 마법을 몇 겹으로 걸어서 해제하려는 마법사들을 혼동시키고 있었다·
그보다 지금···
“스승님· 이 저주는 바로 치유하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물약으로만 회복시키고 내버려두는 게 나을까요?”
당연히 내버려둬야지·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미친 분신은 또다시 대답했다·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제자가 너무 멍청한 질문만 하고 있어서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왕족의 말은 이런 비루한 시험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당장 돌아와서 비전을 전수받으란 뜻이다· 제자·
“예예· 진짜 이것만 끝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얻을 거 다 얻은 이한은 가차 없이 메아리의 돌을 껐다·
옆에 있던 치유 마법 학파 선배는 신기해하며 물었다·
“방금 그건 무슨 아티팩트야? 성능이 굉장한데?”
“하하· 감사합니다·”
주인의 질문에 답해주는 지혜로운 아티팩트들이 여럿 있었지만, 이한의 지팡이에 박힌 돌은 그 중에서도 손꼽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아무래도 대답해주는 사람의 신분이 신분이었으니···
옆에서 성가시게 떠드는 사람이 사라지자 이한의 작업 속도는 자연스럽게 빨라졌다·
맡은 구역의 환자들을 한 차례 처리하고 침대 위를 비우자 놀랍게도 잠깐 쉴 시간이 돌아왔다·
“휴식! 휴식!”
“빨리 내려가서 쓰러져!”
선배들이 징을 치며 팔을 휘둘렀다·
쉴 수 있을 때 망설이지 말고 쉬지 않으면 절대 버틸 수가 없었다· 이한과 친구들은 과감하게 계단으로 달려서 내려갔다·
‘침낭으로!’
이한은 달려가면서 벽난로 근처 따뜻한 자리에 염력으로 친구들의 침낭까지 펼쳐줬다· 바트렉과 티질링은 감동받은 눈빛을 보냈다·
“워다나즈···!”
“뭘 이런 걸 가지고·”
친구들과 함께 이한도 재빨리 자신의 침낭 위로 뛰어들었다·
그 때 익숙한 얼굴이 슥 위로 나타났다·
그건 해골 교장의 미친 분신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