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8화
‘그렇군· 고대가 광기의 시대였다는 건 이걸 말하는 거였군·’
고대에는 정제되지 않은 광기가 사방에 흘러넘쳤다는 말을 서적에서 몇 번 읽어봤지만 설마 이런 뜻이었을 줄이야·
그게 아니라면 지금 광경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세이렌들과 인어들이 젊은 해골 교장을 섬기고 그 눈물을 바치는 건 정말···
‘고대에는 세이렌들도 인어들도 훨씬 친절했던 게 분명해·’
-■■■!
수면 아래를 유영하던 인어 하나가 이한을 발견하더니 갑자기 으르렁대며 공격을 시도하려고 했다·
그러자 젊은 해골 교장이 양팔을 뻗으며 말렸다·
“그만두십시오· 인어 여러분! 이 분은 제 제자입니다· 제 제자를 다치게 하는 건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저를 공격하십시오!”
공격을 시도했던 인어는 오해에 사과하며 서둘러 물러났다·
젊은 해골 교장은 이한이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며 말했다·
“인어들은 침입자들에게 너그럽지 않습니다· 주의하시는 게 좋겠어요· 다치신 곳은 없으시죠?”
“멀쩡합니다· ···마음은 조금 다쳤을지도 모릅니다만···”
“???”
* * *
그 후로도 젊은 해골 교장의 항해를 방해하는 적들은 나오지 않았다·
바다 아래부터 하늘 위까지 보이는 모든 종족들이 젊은 해골 교장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같았다·
“혹시 제가 오기 전에 소세계나 고유세계를 쓰신 게 아닐까요? 세이렌이나 인어들은 착란 상태에 빠진 거죠·”
“이한 학생· 현실을 부정하지 마세요!”
가르시아 교수는 어떻게든 제자의 제정신을 돌려놓기 위해 안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물론 가르시아 교수도 오늘 본 광경에 크게 충격받기는 했다·
저렇게 난폭한 종족들이 젊은 해골 교장에게 저 정도의 경외심을 보이다니·
하지만 마법사라면 아무리 충격적인 현실이라 하더라도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새로이 이론을 만들어야지,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해서는 안 됐다·
“착란 이론도 나름 그럴듯하지 않나···”
“안 그럴듯해요·”
“그럼 정말 교장 선생님의 선··· 선··· 선··· 선량함 때문에 종족들이 저러는 모양이군요·”
이한은 ‘선량함’이란 단어를 말하기가 힘들어서 몇 번이고 머뭇거려야 했다·
가르시아 교수도 매우 힘들다는 듯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로는 알아도 몸이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럼 지금 교장 선생님은 왜 그러시는 겁니까?”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꾸는 법이에요· 이한 학생· 자· 어서 교장 선생님을 돕도록 하죠·”
‘말을 돌리시는군·’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가 말을 돌리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다·
솔직히 이한 본인이었어도 저렇게 말했을 테니까·
아무리 가르시아 교수라 하더라도 해골 교장의 저런 변화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왕국 놈들이 얼마나 성질을 긁은 거지? 아니· 아무리 성질을 긁었어도 그렇지 저런 사람이 그렇게 변하는 건 믿기지가···’
“이런·”
항구로 돌아온 젊은 해골 교장이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도시 아래쪽에 있던 우물이 파괴됐습니다· 이러면 이 근처 사람들이 물을 구할 방법이 없을 텐데···”
외부에서 침공이 잦은 만큼 도시 안의 시설들도 무사하기가 힘들었다·
시민들에게 필수적인 시설들도 자주 부서졌고, 근처 귀족들이나 마법사들이 나서지 않는 한 이런 시설들은 복구도 오래 걸렸다·
“수리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수리는 큰 의미가 없을 겁니다· 보세요·”
젊은 해골 교장은 로브의 소매를 펄럭이며 앞을 가리켰다·
벌써 다른 곳에서 나온 상인들이 깨끗한 물을 판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었다·
“아마 우물이 부서진 걸 보고 이 주변에서 물을 팔 수 있게 허가를 받아왔을 테지요·”
여기서 물을 파는 상인들도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비싼 뇌물을 바쳐야 했다·
그런 뇌물을 바친 상인들이 우물의 복구를 순순히 내버려둘 리 없었다· 보는 눈만 없어진다면 바로 우물을 때려 부술 것이다·
“과연· 그러면···”
이한은 슬슬 젊은 해골 교장의 주특기가 나올 거라고 기대했다·
저 물을 파는 상인들을 개패듯 두들겨 패는 건 확정이고, 그런 뒤 바다에 던질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젊은 해골 교장은 이한이 예상한 것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품속에서 보석이 박힌 장신구를 꺼내더니 뜯어서 상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
이한의 놀람이 끝나기도 전에 젊은 해골 교장은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상의 형태가 흔들리더니 그 구성이 물로 바뀌었다· 방금까지는 평범한 장식용 동상이었던 게 분수로 바뀐 것이다·
가르시아 교수는 눈을 크게 떴다·
동상을 물로 바꾸는 건 변환 마법의 일종이고 가르시아 교수도 할 수 있었지만, 저걸 저렇게 반영구적으로 형태를 계속 유지하는 마법을 걸어놓는 건 사람이 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다·
그것도 심지어 숨 한 번 들이쉴 만큼 짧은 시간에!
‘말도 안 돼···!’
“대체?!” “대체!”
가르시아 교수는 제자가 똑같이 외쳤다는 걸 깨닫고 시선을 돌렸다·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을 보니 자신과 비슷한 의문을 품은 모양이었다·
“이한 학생도 나하고 똑같은 의문을 품었군요· 저 마법을 어떻게 시전했는지 궁금한 거죠?”
“예? 저는 왜 보석을 나눠줬나 여쭤본 건데요·”
“······”
젊은 해골 교장은 웃으면서 제자들을 달랬다·
“진정하세요· 여러분· 재촉하지 않아도 다 설명해드릴 겁니다· 먼저 동상을 물로 바꾼 이유는 동상이 귀족들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물은 수리해봤자 다른 사람들이 남몰래 부수고 흙을 퍼부으면 그만이었지만, 동상처럼 귀족이 세운 조형물은 이야기가 달랐다·
여기 사람들이어도 함부로 훼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걸 알았기에 젊은 해골 교장은 굳이 우물을 수리하는 대신 동상을 영원히 물이 샘솟는 분수로 바꾸어버렸다·
주변 사람들은 원한다면 여기서 물을 받아갈 수 있으리라·
“그거 물은 게 아니라 마법을 어떻게 시전하신 건지 물었는데요···”
“저는 보석을 왜 나눠줬는지 여쭤봤습니다·”
젊은 해골 교장은 제자들의 반응에 살짝 당황했다·
이건 별로 안 궁금했던 것일까?
“보석을 나눠준 이유는 저 상인들도 손해를 봤기 때문이지요· 비록 허가를 받기 위해서 뇌물을 바쳤다지만, 저들도 수입을 얻지 못한다면 파산할 겁니다·”
“!”
예상을 뛰어넘는 이유에 이한은 놀랐다·
설마 여기서 물을 장사하는 상인들의 사정까지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마법을 시전한 방법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간단하지요· 먼저 소세계 마법, 뒤나미스로 시작하는데···”
“과연··· 그렇군요!”
가르시아 교수는 열심히 메모했다·
막상 들어보니 정말 어려운 방법이 아니었다·
비범함은 평범함 속에 있다고 했던가?
젊은 해골 교장의 설명대로 한다면 가르시아 교수도 충분히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간단하긴 뭐가 간단하다는 거야?’
물론 이한 입장에서는 둘이 뭔 대화를 하는 건가 싶었다· 이한은 투덜거리며 볼라디 교수에게 말했다·
“저게 간단하다니· 정말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
볼라디 교수는 이한이 친구들한테 종종 ‘이렇게! 이 간단한 걸 왜 못하는 거야!’하고 말했던 모습이 떠올랐지만 조용히 속으로 삼켰다·
안 그래도 여기서 배워가야 할 게 많은 제자였다· 지금은 조용히 응원해줘야 했다·
* * *
물의 동상 작업을 완전히 마무리 지은 젊은 해골 교장은 쉬지도 않고 성문 작업에 들어갔다·
준비된 남옥과 인어의 눈물은 정확한 배합으로 벌써 절반쯤 연성되어 있었다· 짧은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준비한 것이었다·
“성문 작업은 물의 동상 작업과 조금 다릅니다·”
“다르다는 건···?”
“보는 눈이 많다는 뜻이지요·”
젊은 해골 교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여기 도시 사람들을 위해서 작업하는 것이지만, 정작 본인은 여기 오래 머무르거나 눈에 띄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됐다·
그러는 즉시 도시의 마법사들이나 기사들이 이상함을 깨닫고 추적할 테니까·
“완성하자마자 우리는 빠져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문 근처에서 원하지 않은 싸움을 치르게 될 테지요·”
“이해했습니다·”
이한은 이제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나 ‘그럴 가치가 있습니까’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런 질문은 듣고서 흔들리거나 다시 고민해볼 사람한테 해야 의미가 있는 질문이었다·
젊은 해골 교장은 이한이 무슨 말을 하고 설득해도 절대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이한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보조밖에 없었다·
‘빨리 끝내고 영락을 배워야겠군·’
이한은 젊은 해골 교장의 일을 도와 최대한 빨리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슬슬 젊은 해골 교장에게도 적응한 것 같았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해도 침착한 대응이 가능했다·
“그럼 경계를 부탁드리겠···”
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 멀리서 폭발이 일어났다·
이한 일행과 달리 젊은 해골 교장은 그 소리만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에사도지콰! 분노공의 하수인이 또 여기를!”
“악마들의 습격입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저들을 요격해야겠어요!”
젊은 해골 교장은 성문 작업을 중단하더니 재빨리 움직일 준비를 했다·
이한 일행도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여기 처음 왔을 때 봤던 악마 군세의 위용이라면 주변에 얼마나 많은 피해가 나올지 가히 짐작이 힘든 것이다·
“나를 따라오십시오!”
주문과 함께 젊은 해골 교장은 빠르게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한 일행은 마법의 힘을 빌려 자동으로 그 뒤를 쫓았다·
덕분에 한결 여유가 생긴 이한은 주변의 풍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고 악마 군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예상했던 것과 다른 모습에 이한은 눈을 크게 떴다·
악마 군세 사이에 포위된 적들이 보였는데, 아무리 봐도 평범한 시민들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값비싼 전투골렘들과 호위기사들·
그리고 이한의 누더기 외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호화로운 겉모습을 하고 있는 마법사들까지!
비단과 금실, 보석으로 장식된 마법사들의 복장은 누가 봐도 이 도시의 귀족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화려했다·
붙잡혔구나, 마법사들아! 분노공의 수석 부관이자 으뜸가는 전령인 나, 에사도지콰에게!
대악마는 어지간히 기분이 좋았는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파도의 전당이라고? 내 주인의 권능에 비하면 기껏해야 물장구일 뿐이다·
‘<파도의 전당>!’
너희 키메라 제작꾼들· 네놈들의 장난감은 가장 지고한 악마 종족에 비하면 하찮은 유희일 뿐이지·
‘<메타모포시스의 굴혈>까지?!’
이한은 순찰대원들한테 속성으로 배운 도시의 마법귀족들이 전부 여기 포위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몇몇 더 있긴 했는데 그건 저번에 젊은 해골 교장이 갈아버렸고···
“다들, 뒤로 물러나 계세요·”
젊은 해골 교장은 허공에 떠있는 이한 일행을 뒤로 밀어낸 뒤 몇 겹의 장벽으로 모습을 지워버렸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고나달테스 님· 내버려뒀다가 서로 싸우는 걸 기다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고나달테스 님을 발견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이제까지 들은 바에 따르면 도시의 마법귀족들은 구해주면 감사할 놈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허허 잘 도와줬구나 노예로 만들어주마’하고 덤벼들 가능성이 농후했다·
젊은 해골 교장도 이한의 말에 동의했다·
“맞습니다· 아마 그렇겠지요·”
“그러면 기다렸다가···”
“하지만 그러면 저기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칠 거예요· 미안합니다· 제자님· 저는 사람을 구할 때 제 호오(好惡)로 판단하지 않거든요· 답답해하셔도 이해합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젊은 해골 교장은 악마 군세의 후방에 수십 명의 분신으로 강림했다·
그리고 마법의 폭풍이 그 군세를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