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 8장 은원의 강호에서 홀로 서다 (2)
하진월은 어둠뿐인 세상에 홀로 서 있었다·
보이는 것은 오직 암흑뿐이었다· 방향을 가늠할 수도 없었고 어디가 위인지 또 바닥인지도 알 수 없었다· 진법을 파훼하는 것은 둘째 치고 지독한 무기력감이 전신을 장악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다·
팔 년 전에도 구주만형진에 갇혀 좌절을 경험했던 하진월이었다· 그때도 이랬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팔 년 전의 그가 아니었다·
고난의 세월은 그를 성장하게 만들었다· 마음이 단단해지고 굳건한 의지라는 것이 생겼다· 더불어 지력(知力)과 세상을 보는 눈도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진법이란 결국은 자연의 조화를 인간의 머리로 구현해 낸 것· 결국 이 또한 자연의 이치와 다를 바가 없다·”
팔 년 전에는 당황해서 그런 간단한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
하진월은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구슬을 꺼내 들었다· 남은 구슬의 수는 모두 열다섯 개 정도· 몇 개 남지 않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하진월은 눈을 감았다·
‘동쪽으로 다섯 걸음·’
그는 거침없이 동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딱 다섯 걸음째에 하진월은 바닥에 구슬 하나를 내려놓았다·
‘다시 북서쪽 사선으로 세 걸음·’
그곳에도 구슬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 후로도 하진월은 몇 번이나 방향을 바꿔 걸음을 옮기며 구슬을 내려놓았다· 그런 그의 전신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방향을 잡는 것이 단 한 치라도 어긋나면 진법을 절대로 파훼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정확한 방향을 가늠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진월은 마지막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열 걸음을 걸었을 때 그는 멈춰 섰다·
그의 손안에 남은 구슬은 하나뿐이었다· 이제 이 구슬 하나에 그의 운명이 갈릴 것이다·
“후우!”
하진월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침내 그가 바닥에 구슬을 내려놓았다·
그는 긴장된 시선으로 전방을 바라봤다· 하지만 암흑은 여전했고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파훼하지 못한 건가?’
하진월의 눈동자가 흔들릴 때 변화가 일어났다·
츠츠츠!
기괴한 소리와 함께 주위의 암흑이 크게 일렁였다· 순간 하진월은 어지러움을 느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위잉!
어지럼증 다음 이명증이 찾아왔다· 하진월은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잠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마침내 열까지 셌을 때 하진월이 눈을 떴다· 그러자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문혜령의 얼굴이 보였다·
“어 어떻게?”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을 더듬었다·
구주만형대진은 서문세가 수백 년의 지혜와 비전이 집약된 절진이었다· 결코 일개인이 파훼할만한 진법이 아닌 것이다·
하진월은 담담히 대답했다·
“지난 팔 년 동안 매일같이 어떻게 하면 구주만형대진을 파훼할 수 있을까 고민했소· 그렇게 궁구하다 보니 얼마 전 해답을 찾게 되었소·”
“말도 안 되는··· 구주만형대진은 결코 일개인이 풀 수 있는 진법이 아닌데 어찌····”
“맞소!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하나 세상에 풀 수 없는 진법이란 존재하지 않소· 펼칠 수 있으면 파훼할 수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요·”
하진월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팔 년을 궁구해 서문세가 비전의 절진을 파훼했다· 강호의 그 어떤 책사도 이루지 못한 쾌거였다·
서문혜령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구주만형대진은 그녀조차도 파훼하지 못한 진법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구주만형대진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파훼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받은 충격은 그 누구보다 컸다·
“이익!”
그녀가 주먹을 꽉 쥔 채 하진월을 노려봤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 하진월의 몸은 그녀의 눈빛 아래 수천 조각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서문혜령의 원독 어린 눈빛에도 하진월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난 세월 겪었던 심마에 비하면 서문혜령의 눈빛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득 하진월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고마웠소 서문 소저·”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요?”
“진심이오· 당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소· 당신에게 심마를 겪지 않았으면 나는 그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애송이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오·”
“으득!”
서문혜령이 이를 바득 갈았다·
결국은 자신이 안겨준 심마로 인해 하진월이 발전할 수 있었단 이야기였다· 졸지에 도움을 준 꼴이 된 서문혜령으로서는 뼈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나의 패배를 인정하겠어요· 현시점에서는 당신이 이 서문혜령을 이긴 것이 분명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나의 패배가 창천문의 패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물론이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진 않소·”
“오늘 북천문은 멸문할 거예요·”
“아니 북천문은 오늘도 내일도 건재할 거요·”
하진월의 담담한 말에 서문혜령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렇소!”
“진법은 발전했을지 모르지만 시류를 보는 눈은 예전 그대로군요· 어리석게도·”
서문혜령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섬 전체를 뒤덮고 있던 자욱한 운무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하진월이 펼친 천벽만로진이 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하단 증거였다· 북천문엔 안타깝게도 진의 유지 시간이 다 된 것이다·
천벽만로진은 더 이상 보호해 주지 못한다면 북천문의 멸문은 기정사실이었다· 서문혜령은 그렇게 확신했다·
하지만 서문혜령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하진월의 눈빛은 전혀 꺾이지 않았다· 그의 눈은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서문혜령은 그런 하진월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눈빛뿐 아니라 하진월이라는 인간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독하게 말을 내뱉었다·
“분명 우리 창천문은 이곳에 모든 전력을 투입했어요· 하지만 무적세가와 운중천도 전력을 투입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그들에겐 아직 여유 전력이 남아 있으니까·”
특히 무적세가의 저력은 무서웠다· 가주인 모용율천과 소가주인 모용현이 가문의 정예들을 이끌고 왔지만 남아 있는 전력만으로도 어지간한 대문파 하나 정도는 세상에서 지워 버릴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남아 있는 한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지금의 싸움이 일단락되어도 언젠가 다시 힘을 모아 북천문을 칠 테니까·
그것은 운중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지금은 비난을 받고 있는 운중천이지만 그래도 강호에 미치는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운중천이란 상징성은 각 문파에서 병력을 차출하기 용이했다·
무적세가와 운중천이 건재한 이상 북천문이 세상에 설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아무리 발악해도 소용없어요· 이 세상의 질서는 당신들이 존재하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 그게 세상의 이치예요·”
“휴! 서문 소저는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구려·”
“무슨 말인가요?”
“나는 겨우 북천문의 생존을 위해 이 전쟁을 시작한 것이 아니오· 나는 이 세상에서 무적세가와 운중천을 지워 버릴 것이오·”
“아직도 헛소리를···· 무적세가에는 아직도 많은 고수들이····”
“왜 사람들은 자신이 남을 공격할 수 있으면 자신 또한 공격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소·”
“무슨?”
“북천문이 공격을 받는다면 무적세가도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오· 이 하진월이 설마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곳에서 당신들과 싸웠을 것 같소?”
순간 하진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의 냉소에 서문혜령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가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설마?”
천벽만로진이 사라진 지금 많은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단 한 명의 모습만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크윽!”
초로의 무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여인이 서 있었다· 인세의 것이 아닌 듯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인의 전신에서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인이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기에?”
“은한설·”
“배 백야마녀?”
무인의 얼굴이 핼쑥하게 질렸다·
비록 그녀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녀의 별호와 무력만큼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백야마녀가 왜 이곳에?”
정체불명의 무리가 쳐들어온 것이 한 식경 전이었다· 평상시라면 철옹성과 같은 경계망이 구축되어 있을 테지만 지금은 많은 전력이 빠져나가 상당히 헐거워진 상태였다·
은한설이 일단의 무인들을 이끌고 난입한 이곳은 바로 무적세가였다· 은한설이 이끌고 온 무인들은 무적세가를 무섭게 유린했다· 대부분의 정예들이 빠져나간 무적세가는 미처 대응을 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있었다·
은한설 앞에 서 있는 무인의 이름은 모용상천· 모용율천의 방계 혈족이었다·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용상천의 무공은 무적세가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고강했다·
세상에 알려진 그의 직위는 무적세가의 장로에 불과했지만 무적세가 내에서는 청목당주(靑目黨主)로 알려져 있었다·
청목당(靑目黨)은 무적세가의 미래가 될 인재들을 양성하고 키우는 곳이었다· 현재 무적세가를 지탱하는 오대수호장과 십대무객 모두 청목당에서 키운 기재들이었다·
바꿔 말하면 현재의 오대수호장과 십대무객이 모두 죽더라도 청목당만 온전하다면 언제든 그와 비견되는 무인들을 키울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당신은 사천성에 있어야 하지 않은가? 대체 왜 이곳에?”
“무적세가가 사천성에 들어간 것과 똑같은 이유예요·”
“그럼?”
“군사께서는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빈집털이’라고·”
“빈집털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던 비속적인 말에 모용상천이 입을 딱 벌렸다· 하지만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모용상천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얼마 전 밀야에 기습을 당한 것을 빼면 단 한 번도 안방이 유린당한 적이 없는 무적세가였다· 밀야에 의해 기습을 받은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북천문이 무적세가를 기습한 것은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북천문은 무적세가와 운중천 그리고 창천문의 합공을 받고 있었다· 세 문파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오히려 무적세가를 기습할 여력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모용상천의 경악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비겁한····”
“무적세가의 무인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군요·”
은한설이 담담히 말하며 모용상천을 향해 걸어갔다·
비록 이름 석 자도 제대로 모르지만 모용상천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범상치 않았다· 현재 무적세가에 남아 있는 인물들 중 그와 비견될 만한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후웅!
은한설이 은혼심결(銀魂心決)을 운용하자 주위의 기운이 그녀와 공명했다· 그에 모용상천의 안색이 싹 변했다·
‘백야마녀라고 불린다더니 무위가 범상치 않구나·’
모용상천은 인생 최대의 위기가 닥쳤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상대가 백야마녀라고 불리지만 자신 역시 당당한 무적세가의 무인이었다· 모용율천이나 모용현을 제외하면 적수가 없다고 자부하는····
“너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백야마녀· 오늘 이곳이 너의 무덤이 될 것이다·”
모용상천이 커다란 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쉬아앙!
도가 공기를 가르며 은한설에게 쏘아졌다· 은한설이 그에 맞서 은혼기를 발산했다·
카카캉!
도와 은혼기가 격돌하며 불꽃이 튀었다·
모용상천은 성명절기인 청린도법(靑鱗刀法)을 펼쳤다·
도강이 허공을 가르고 도풍이 은한설의 머리를 때렸다· 그의 도법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불행히도 상대가 좋지 않았다·
그도 강했지만 은한설은 더욱 강했다· 그녀는 표표히 움직이며 모용상천의 공격을 모조리 피하거나 흘려보냈다·
옷자락을 흩날리며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이 선녀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모용상천의 눈에는 마녀로 보였다·
“죽어랏! 마녀여·”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일격을 날렸다· 그의 전 공력이 응집된 도강이 은한설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졌다·
은한설은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용상천을 향해 은혼기가 집약된 일수를 날렸다·
쿠콰콰!
두 사람의 충돌과 함께 기파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기파에 휩쓸린 전각이 부서지고 담벼락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모용상천이 힘없이 처박혀 있었다· 그런 그의 사지는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끄으으!”
모용상천이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눈을 부릅뜬 채 무슨 말인가 하려 했다· 하지만 입술을 몇 번 들썩이다가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은한설이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섰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다음 상대를 찾아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