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 5장 옥석을 고를 수는 없지만, 한자리에 모을 수는 있다 (1)
백마호(白馬湖)·
면양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큰 호수였다· 사천성에서도 손에 꼽히는 큰 호수로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했다·
햇빛을 머금은 비취빛 물빛은 바람에 가볍게 찰랑이고 있었고 백마호를 둘러싼 높은 산들은 마치 명인이 만든 여덟 폭 병풍처럼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넋을 잃을 만한 풍경이었지만 백마호를 바라보는 하진월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백마호 한가운데 제법 큰 평저선이 떠 있었다· 평저선에는 특이하게 높은 망루가 세워져 있었다· 망루 위에서는 백마호 전경을 조망할 수 있었다·
하진월이 서 있는 곳이 바로 평저선의 망루였다· 평저선에는 군사부의 책사들과 무인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그때 군사부의 무인 한 명이 망루 밑으로 급히 달려와 소리쳤다·
“군사 청천현에서 창천문과 비황대가 격돌했다고 하옵니다·”
“전황은?”
“일단은 유인을 하며 시간을 끌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 시간이 흐르면 정면으로 격돌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음!”
하진월의 입술을 비집고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가 저 멀리 북쪽을 바라봤다· 지금쯤이면 마도광이 창천문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을 것이다·
마도광에게 내려진 명령은 창천문의 남하를 최대한 늦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명령을 내린 이는 바로 하진월이었다·
자신이 내린 명령 때문에 얼마나 많은 비황대가 죽어나갈지 몰랐다· 하지만 감내해야 했다· 이것 역시 군사의 길을 택한 자신의 업보였기 때문에·
그때 또다시 무인 한 명이 망루 밑으로 달려와 보고했다·
“검혈대가 무적세가와 접촉했습니다· 조만간 사혈림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질 것 같습니다·”
하진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그런데도 마음이 무거운 것은 그만큼 많은 이가 죽어나갈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군사란 사람의 목숨을 숫자로 계산해야 하는 자리· 사사로운 감정 따윈 접어둬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진월은 애써 냉철해지고자 애를 썼다·
그가 곁에 있는 한선우에게 물었다·
“문주님은?”
“그쪽은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쯤이면 적들과 조우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렇겠지·”
하진월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백마호로 시선을 던졌다·
백마호 곳곳에 흩어져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무인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윗옷을 벗은 채 백마 호 곳곳에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군사부의 책사들이 그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아니 그곳이 아니야· 이쪽으로 일장을 더 움직여야 해· 그리고 석 자는 더 깊게 묻어야 해·”
“알겠습니다·”
사람들의 열기 어린 음성이 호수에 울려 퍼졌다·
그때 또다시 누군가 망루 위로 올라왔다·
“군사·”
“당 당주님·”
망루로 올라온 이는 바로 당기문이었다· 그에 하진월이 반색을 표했다·
백마호에 있는 북천문의 무인들 중 하진월이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만한 이가 바로 당기문이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군사가 지시한 대로 준비하고 있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빨라도 엿새 정도· 그나마도 순조롭게 진행될 때 이야기네·”
“조금 더 빨리 할 수는 없겠습니까?”
“지금도 충분히 무리하고 있는 거라네· 더 이상 무리하면 자칫 북천문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음이네·”
“알겠습니다· 제가 너무 조급했던 모양입니다·”
“군사는 충분히 제 역할을 하고 있네·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게·”
당기문의 위로에도 하진월의 얼굴은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지금 그의 가슴은 큰 바윗덩이를 얹어놓은 것처럼 무겁고 답답했다· 그만큼 중압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당기문이 하진월의 곁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그의 눈에도 백마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군사가 흔들리면 북천문 전체가 흔들리네· 어떠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군사는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되네·”
“알고 있습니다·”
“군사가 가는 길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줄 모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네· 그리고 군사가 얼마나 심한 정신적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그래도 견디셔야 하네· 북천문이 아니라 천하를 위해서·”
당기문의 말에 하진월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래도 누군가 자신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마웠다·
혼자 감당해야 할 짐이 무겁기만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따스하게 한마디라도 들을 수 있기에 힘을 낼 수 있었다·
“쉴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쉬시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쉬고 싶어도 쉴 수 없을 테니까·”
“괜찮습니다·”
“군사·”
“정말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 전쟁에서 패하면 영원히 쉬게 될 겁니다·”
하진월의 대답에 당기문은 할 말을 잃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백마호를 바라보았다·
백마호 한가운데 섬이 보였다·
그곳이 하진월이 선택한 최후의 전장이었다·
☆ ☆ ☆
서문혜령의 고운 아미가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그것은 담수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모기에 시달리는 것 같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창천문이 입은 피해는 그보다 훨씬 컸다· 비황대는 마치 모기처럼 그들을 괴롭혔다·
마치 몽고의 기마병처럼 말을 타고 이동하며 멀찍이서 활로 공격했기에 창천문이 입는 피해는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언제 비황대가 공격해 올지 몰랐기에 경계를 하느라 이동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이동하는 시간은 둘째 치고 항상 경계를 하느라 창천문 무인들의 신경이 예리하게 곤두선 것도 문제였다· 신경이 곤두선 만큼 조그만 일에도 화를 내기 일쑤였고 문도들 간의 다툼도 심상치 않게 일어나고 있었다· 서문혜령이나 담수천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모기치곤 무서워요· 자칫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창천문이 분열을 일으킬 수도 있을 거예요·”
“저들도 그렇게 되길 바라고 괴롭히는 거겠지?”
“맞아요·”
담수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런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혼자서라도 비황대를 쓸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공격하고 있었고 담수천이 나설 기미라도 보이면 귀신같이 알고 물러났다·
담수천이 제아무리 절대의 경지에 이른 고수라지만 말을 타고 이동하는 비황대보다 빠르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비황대를 이끄는 마도광의 경지도 범상치 않았다·
담수천이 함부로 나설 수도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짜증 나는군· 언제까지 이렇게 끌려가야 하는 거지?”
그의 시선이 서문혜령을 향했다·
이런 순간이 오면 서문혜령은 언제나 답을 주곤 했다· 지금 담수천은 서문혜령에게 답을 원하고 있었다·
서문혜령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언제까지 이렇게 일일이 대응할 수 없다· 저들의 도발에 대응하느라 시간을 지체할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창천문이다· 그렇다면····’
서문혜령의 눈이 소름 끼치게 빛났다· 그 모습을 보며 담수천은 서문혜령이 무언가 방법을 생각해 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말해보시오·”
“하지만 희생이 클 거예요·”
“결정은 내가 할 것이오·”
“가장 좋은 방법은 적들의 공격을 무시하고 이대로 남하하는 거예요·”
“무시한다?”
“북천문의 모든 전력이 파견된 것도 아니에요· 저들도 겨우 저 정도의 전력으로는 우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겨우 저 정도의 병력을 보냈다는 것은 우리가 남하하는 시간을 늦추려는 의도가 다분해요·”
“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라고· 무엇 때문에 시간을 그렇게 벌려고 하는지 모르지만 그만큼 필사적인 것이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저들에게 시간을 주지 말자는 뜻이군?”
“그래요· 다소간의 희생이 생기더라도 무시하고 전력으로 남하는 거예요· 그럼 저들도 당황할 것이 분명해요·”
“음!”
“저들이 저렇듯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대응이 그들이 예측한 바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에요· 반대로 우리가 저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움직임을 보이면 반드시 흔들릴 거예요·”
담수천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서문혜령의 계획은 매우 단순했다· 하지만 적들의 의표를 찌르기엔 충분했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서문혜령의 말처럼 많은 이가 낙오되거나 죽을 거란 사실이었다·
그에 대한 담수천의 결정은 단호했다·
“그렇게 합시다·”
“잘 생각했어요· 피해는 크겠지만 그래도 저들의 의표를 찌르기 충분할 거예요·”
담수천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창천문도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오직 담수천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들었겠지? 적들의 공격을 무시하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남하한다·”
“존명!”
창천문의 무인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들 역시 마도광이 이끄는 비황대의 공세에 크게 지쳤던 상태였다· 이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보다는 모험이라 할지라도 활로를 찾는 것이 훨씬 더 희망적이었다·
“가자·”
담수천이 서문혜령을 들쳐 업은 채 질주했다· 그 뒤를 창천문의 무인들이 따랐다·
마도광이 이끄는 비황대가 멀찍이서 화살을 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비황대의 공격에 반응했던 창천문의 무인들이 이번에는 공격을 싹 무시하고 앞으로만 내달렸다·
퍼버버벅!
“크헉!”
“흑!”
화살에 맞아 낙오하는 자가 나타났다· 하지만 창천문의 무인들은 부상당한 동료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전력으로 경공을 펼쳤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마도광이 당황했다·
저들은 부상을 당한 동료를 버림으로써 기동력을 얻었다· 마도광은 이제까지의 방식으로는 저들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젠장! 어쩔 수 없군·”
저들이 희생을 각오한 이상 이쪽도 희생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장의 양상이 바뀔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마도광을 필두로 비황대가 창천문을 추적했다· 계속해서 화살을 쐈지만 이제는 소용이 없었다· 쭉정이들은 화살에 맞아 대부분이 낙오했고 남은 이들은 창천문에서도 고수들이라고 할 만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멀리서 날아오는 화살을 능히 튕겨낼 수 있는 수준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마도광은 더 이상 활로 공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돌진할 것을 명령했다·
“챠앗!”
선두에 선 이는 역시 마도광이었다·
그는 맹렬한 기세로 창천문을 향해 돌격했다· 지축이 흔들리고 먼지가 하늘 높이 피어올랐다·
천여 명에 이르는 기마병들이 돌진하는 광경은 살 떨리게 무서웠다· 하지만 살아남은 창천문의 무인들은 모두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고수들이었다·
“챠앗!”
그들이 비황대가 난입하는 순간 허공에 몸을 띄우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기마병의 돌진으로 창천문의 허리를 끊어놓으려던 마도광의 계략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창천문의 반격은 매서웠다· 그들이 각자의 절기를 펼쳐 비황대를 공격했다·
“더러운 무적세가의 사냥개들·”
“모조리 죽어라· 북천문의 비겁자들아·”
무기가 부딪치고 피가 튀었다·
창천문의 무인들이 죽어나가고 비황대의 무인들이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주인 잃은 말들이 날뛰면서 장내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차앗!”
마도광은 앞을 가로막는 창천문의 무인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넘기며 전진했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에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의 전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우우우!”
담수천이 사자후를 내뱉으며 허공으로 몸을 뽑아 올리더니 이내 방향을 바꿔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마도광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런 담수천의 입가에는 한 줄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서문혜령의 말대로였다· 비록 수많은 제자가 목숨을 잃었지만 그 대신 적의 수괴와 마주하게 되었다· 담수천이 그토록 원하던 순간이었다·
“끝이다·”
“씨부럴 놈!”
마도광이 그런 담수천을 향해 전력으로 도를 휘둘렀다·
후웅!
도가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강력한 도강을 발산했다· 하지만 담수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쩌어엉!
도강과 맨손이 격돌했는데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담수천의 손은 멀쩡한데 마도광의 전신은 충격으로 크게 들썩였다·
“무슨?”
마도광이 눈을 크게 치뜨는 찰라 담수천의 전신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크헉!”
마도광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성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의 몸이 환한 빛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