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화 : 3장 꿈은 길지 않고, 악몽은 쉬이 끝나지 않는다 (1)
귀주성 적수(赤水)는 사천성과 인접한 조그만 현이었다· 적수라는 이름처럼 이곳에는 사천성에서부터 발원한 강이 흐르고 있었다· 유난히 붉은 모래가 많이 섞여 있어 강물 자체가 타는 듯 붉게 보였다·
보기엔 무척 신비로웠지만 강물은 무척이나 거세서 인근 현에 사는 사람들조차 감히 배를 띄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특히 사천성에 있는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지형이 험준해지고 물결 또한 배는 거세졌다· 그 때문에 누구도 배를 타고 사천성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모든 이들의 상식을 뒤엎고 적수 위에는 스무 척의 배가 떠 있었다· 선폭이 유난히 좁고 선수가 보통의 배보다 훨씬 더 낮아 보였다·
보통 중원의 강을 운행하는 배는 선고가 높고 갑판 또한 널찍해서 많은 이들을 태우기 적합하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금 적수에 떠 있는 배들은 기존의 형태와 많이 달랐다·
많은 인원을 태우고 편하게 여행하는 목적이 아닌 거친 물살을 헤쳐 나가기에 적합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갑판에는 일반 선객이 아닌 중무장을 한 무인들이 타고 있었다·
“이곳을 통해서 사천성으로 들어갈 수 있단 말이지?”
선두에 있는 배 위에 여타 무인들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가진 무인이 서 있었다·
무인의 이름은 모용진·
무적세가의 이공자인 그가 적수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의 곁에는 심복인 연무월이 서 있었다·
“적수를 거슬러 올라가면 분명 사천성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워낙 물길이 거칠고 험해 일반인들은 감히 배를 띄울 엄두조차 못 내니 사천의 문파들도 이곳을 경계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가?”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워낙 물길이 험해 제아무리 노련한 해룡방의 무인들이 배를 몰더라도 피해가 적잖을 겁니다·”
“그 정도의 피해도 없이 사천성에 입성하길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지· 안 그런가?”
“하지만····”
“아무리 많은 이가 죽어도 상관없어· 사천성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주군·”
“놈의 놀라는 얼굴을 보고 싶군·”
모용진이 히죽 웃었다· 그런 모용진을 보며 연무월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모용진은 진무원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이번 출정 역시 그가 모용율천에게 간청해 이뤄진 것이었다·
무적세가와 운중천의 정예들 중 천 명이 그와 함께 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배 위에는 오대수호장(五大守護將) 중 두 명 십대무객(十大武客)의 세 명이 함께하고 있었다·
모용율천이 직접 이끄는 병력에는 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대문파 한두 곳쯤은 세상에서 너끈히 지워 버릴 만한 엄청난 전력이었다·
스무 척의 배에는 무적세가의 정예들이 타고 있었고 배의 운행은 해룡방의 무인들이 맡고 있었다·
해룡방은 장강에서 활동하는 문파로 배에 관해서는 자타 공인 천하제일이라 알려져 있었다· 그런 해룡방의 무인들에게도 적수를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무적세가와 운중천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지라 해룡방주 임오경이 직접 수하들을 이끌고 이곳까지 왔다·
“모두 정신 바짝 차려라· ‘아차’ 잘못했다가는 거친 물살에 휩쓸려 시신도 못 건질 테니”
“예!”
“노잡이들부터 몸을 확실히 풀어두도록· 이제 곧 죽도록 노를 저어야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씨발! 그럼 시작하자· 모두 자리를 잡아·”
임오경의 명령이 떨어지자 해룡방의 무인들이 분분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들은 배에 타고 있는 무적세가와 운중천의 무인들을 무사히 사천성으로 이동시킬 임무가 있었다·
임무에 실패하면 해룡방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했다· 그 사실을 모두 알기에 해룡방의 무인들과 노잡이들의 얼굴에는 결연한 빛이 가득했다·
“간다·”
임오경의 힘찬 외침에 맞춰 노잡이들이 노를 젓기 시작했다· 보통은 바람을 이용해서 배를 운항하지만 이렇듯 거친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서는 노잡이의 역할이 필수였다·
해룡방의 노잡이들은 일반적인 뱃사람이 아니었다· 비록 기본공에 불과하지만 그들 역시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었다· 때문에 보통의 뱃사람보다 근력과 지구력이 월등했다·
“어이차!”
그들은 구호를 맞추며 일사불란하게 노를 저었다· 그들이 노를 저을 때마다 배가 쭉쭉 앞으로 나갔다·
처음 두 시진 정도는 그래도 순탄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격류가 나타나면서 배가 부서질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삐걱!
배 곳곳에서 소름끼치는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그래도 배는 용케 거친 물살을 견디며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문제가 터진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 후였다·
“선창에 구멍이 뚫렸다· 젠장!”
중간에 있는 배에서 문제가 터졌다· 암초에 선창이 찢겨 나간 것이다· 물이 배안으로 콸콸 쏟아져 들어오면서 배가 크게 요동쳤다·
해룡방의 무인들은 급히 준비해 둔 판자로 배의 선창을 보수하고 물을 빼냈다· 그들이 발 빠르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배는 벌써 침몰했을 것이다·
“허! 대단하구나·”
“배를 귀신같이 몬다더니 정말이군· 저들이 아니었으면 벌써 물귀신이 되었을 거야·”
배에 타고 있는 무인들 중 상당수는 물질을 할 줄 몰랐다· 개천에 빠져도 허우적거리다 목숨을 잃을 정도인데 이와 같은 험악한 물길이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죽으나 사나 그들은 해룡방의 무인들을 믿고 의지해야 했다· 처음에 배를 탈 때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던 무인들이었지만 지금은 갑판의 기둥을 꼭 붙잡은 채 거친 물살을 견디고 있었다·
“제기랄!”
오죽했으면 모용진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선창에 호기롭게 서 있던 그의 몸은 물에 젖은 생쥐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체면 때문에 선실로 피신하지 못하고 서 있었지만 그의 얼굴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나마 천근추를 이용해 몸을 선창에 단단히 고정했기에 더 이상의 험한 꼴을 보이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모용진이 한참 선두에서 배를 진두지휘하는 임오경에게 물었다·
“얼마나 더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나?”
“앞으로 세 시진 정도만 더 가면 잠시 물살이 잠잠해질 겁니다·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테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아직도 세 시간이나 더 이런 물살을 견뎌야 한단 말인가?”
모용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임오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합니다· 최소 이틀은 이런 물살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이틀이나?”
“그것도 짧게 잡은 겁니다· 제대로 물길을 거슬러 오르지 못하면 더 늦어질지도 모릅니다·”
“우웩!”
갑자기 모용진이 바닥에 엎어져 토악질을 했다· 멀미를 하는 것이다·
모용진뿐만이 아니었다·
“우웨엑!”
“크헉!”
배에 나누어 타고 있는 무적세가와 운중천의 무인들이 연신 토악질을 했다· 거친 물살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배 멀미를 하는 것이다·
물살이 들이치고 사람들은 멀미를 하고 배 위엔 지옥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임오경은 그런 사람들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거기 돛을 더 팽팽하게 당기지 못해? 바람을 제대로 못 받잖아· 뒤따라오는 배에 조금 더 거리를 두라고 해· 자칫하다가는 충돌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곳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제기랄! 정말 시원하군·”
임오경이 투덜거리면서 전방을 노려봤다· 쉴 새 없이 거친 물살이 그의 몸을 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지시를 했다·
그렇게 세 시진이 지나자 임오경의 말처럼 물살이 잔잔한 지점에 이르렀다·
“크하!”
“죽겠다·”
그제야 해룡방의 무인들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힘없이 널브러져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그들의 몸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강렬한 열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갑판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을 정도였다·
“휴우!”
기력이 다해 널브러진 선원들과 달리 운중천과 무적세가의 무인들은 그제야 활력을 되찾았다·
그들이 이제껏 거슬러 온 하류를 바라보았다· 마치 광룡처럼 굽이쳐 흐르는 물살을 보고 있자니 여기까지 온 것이 기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크윽!”
모용진도 소매로 입술을 닦으며 허리를 폈다· 그의 입가에는 토사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전혀!”
연무월의 물음에 모용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처음으로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는 중이었다· 앞으로 이틀이나 더 이런 물길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의 눈을 깜깜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이틀은 더 가야 한다니까 수하들에게도 이번 기회에 푹 쉬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경계는 어떻게 할까요?”
“경계? 이런 강 한가운데서 무슨 경계? 물살이 이렇게 거친데 누가 감히 접근한단 말이야·”
“알겠습니다·”
모용진의 신경질 섞인 말에 연무월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급히 다른 이들에게 모용진의 말을 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녹초가 되었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떤 이들은 운공을 하며 피로를 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그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스무 척의 배에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래서 그들은 몰랐다· 그들이 강 한가운데 정박한 그 순간부터 강가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을·
윗옷을 벗은 남자들 수십 명이 강가 갈대숲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매서운 눈으로 강가에 정박한 배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역시 이쪽으로도 병력을 보내왔군·”
남자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입을 열었다· 구릿빛 피부에 콧수염이 인상적인 남자의 이름은 서진효· 북천문 군사부에 속한 무인이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수공에 능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수공에 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진월은 일 년 전에 서진효를 불러 수공을 익힐 것을 지시했다·
당시에는 하진월의 지시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존경하는 군사의 말인지라 이유가 있겠지 하며 수공을 익혔다·
하진월은 그가 수공을 어느 정도 익히자 수하들을 배정해 주며 그들에게도 전수해 주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흑무조(黑霧組)였다·
흑무조 전원은 서진효가 전수한 수공을 익혔다· 개개인의 무력은 대단할 것이 없었지만 물속에서만큼 누구보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서진효는 하진월의 말을 떠올렸다·
‘북천문이 있는 사천성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숙성과 섬서성 접경의 관도를 이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저들이 반드시 정해진 관도만으로 이동한단 보장이 없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우리의 의표를 찌르기 위해 예상할 수 없는 경로를 이용할 겁니다· 그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이 바로 귀주성에서 강으로 들어오는 경로입니다· 물살이 워낙 세고 거칠어서 거의 가능성은 없지만 그래도 일말의 대비는 해야 합니다·’
서진효는 팔뚝 위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런 상황까지 예상했다니· 군사 당신의 능력은····’
하진월이 같은 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으로 그를 만난다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서진효가 흑무조에게 손짓으로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소리도 없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강가에서 숨을 크게 들이쉰 그들이 잠수를 해서 정박해 있는 배의 밑바닥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배의 밑바닥에 구멍을 뚫었다· 각종 도구를 사용하자 배의 밑바닥에 어른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다·
순식간에 배 선창에 구멍을 낸 그들은 잠시 수면위로 올라가 가쁜 숨을 골랐다· 신선한 공기를 폐부 가득 담고서 다시 잠수를 해서 다른 배에 구멍을 뚫었다·
그렇게 흑무조가 연이어 일곱 척의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었을 때였다·
“물이 센다·”
“누군가 배에 구멍을 뚫었다·”
“배가 침몰하고 있어· 어서 구멍을 막아야 해·”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변고가 일어난 것을 깨닫고 소리를 질렀다·
“강 아래 누군가 있다·”
“적이다·”
뒤이어 해룡방의 무인들이 강으로 뛰어들었다·
흑무조의 무인들만큼이나 수공에 뛰어난 해룡방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배에 구멍을 낸 흑무조의 무인들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렇지 않아도 붉은빛을 띠고 있던 강이 선혈로 더욱 붉게 물들어갔다·
“제길! 어떤 놈들이·”
배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용진이 노성을 터뜨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물속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그는 수공에 문외한이었다·
물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해룡방의 무인들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강물은 점점 더 붉게 변했고 그사이 미처 구멍을 막지 못한 배들이 연이어 침몰했다· 배에 타고 있던 무인들은 어떻게 해볼 사이도 없이 강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사 살려줘·”
공포에 질린 비명성과 숨넘어가는 소리가 강을 가득 채우며 지옥도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