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 2장 폭풍이 불어오면 갈대는 알아서 고개를 숙인다 (2)
화로 위로 시퍼런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불길은 화로 위에 놓인 항아리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항아리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색 액체가 걸쭉하게 끓고 있었다·
화로 앞에 당기문이 앉아 있었다· 당기문은 눈을 반쯤 내리깐 채 화로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화로의 열기가 강해질수록 액체에서 향긋한 냄새가 더욱 강하게 흘러나왔다· 향기는 넓은 방 안을 가득 채운 것으로도 모자라 문틈을 비집고 밖으로 흘러나갔다·
당기문은 화로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하자 항아리에 담긴 액체를 옆에 있는 커다란 쟁반에 따랐다· 쟁반의 모양을 따라 넓게 퍼져 가는 검은 액체·
당기문은 곁에 있던 섭선으로 부채질을 했다· 바람이 불자 검은색 액체가 서서히 굳어갔다· 당기문은 어느 정도 식은 검은색 액체를 조금씩 떼어서 손바닥 안에서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금세 검은색 단환이 만들어졌다·
당기문은 정성스럽게 단환을 만들었다· 항아리 하나에서 거의 백여 개에 가까운 단환이 만들어졌다·
“휴!”
그제야 당기문이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폈다·
백여 개의 단환을 만드는 데 꼬박 하루의 시간이 소비됐다· 그가 만든 단환의 이름은 속명단(束命丹) 가루로 내서 상처에 뿌리면 지혈이 되고 복용을 하면 어지간한 내상 정도는 금방 치유할 수 있는 명약이었다·
워낙 약효가 좋다 보니 연단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약초가 들어가고 만드는 시간 또한 적지 않게 소요됐다·
당기문은 한 달 전부터 속명단을 제조했다·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곧 전쟁을 치를 북천문의 무인들을 위해서였다· 자신이 만든 속명단이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길 바라면서 제조하는 것이다·
지난 한 달 동안 그는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자신이 고생을 하는 만큼 한 명이라도 더 살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역병 때문에 그 고생을 하고 또다시 속명단의 제작에 몰두하는 그를 두고 걱정이 많았다· 하진월은 직접 찾아와서 당기문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적세가가 역병을 위장해 수많은 이를 죽인 사건은 당기문의 가슴에 치유되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더 이상 무적세가 때문에 사람들이 죽지 않게 만들겠다·’
그러기 위해서 속명단을 만들었다·
현재 활독당에서 속명단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의술이 뛰어난 사람은 당기문과 당미려 숙질뿐이었다· 두 사람의 노력 덕분에 거의 속명단 오천 개가 만들어졌다·
당기문은 새로이 만든 속명단을 목함에 담아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당미려가 제일 먼저 그를 맞았다·
“숙부님·”
“미려야·”
“고생 많으셨습니다·”
당미려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당기문을 바라봤다· 그녀도 고생을 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당기문에 비할 수는 없었다· 당기문은 그야말로 침식을 잊고 속명단을 만드는 데 몰두했으니까·
당미려의 앞에는 그간 만든 속명단이 든 목함들이 쌓여 있었다·
“군사부로 가자꾸나·”
“예!”
활독당의 무인 한 명이 목함을 짊어지고 두 사람을 따랐다· 군사부에 도착하자마자 소식을 들은 하진월이 두 사람을 맞았다·
“당 당주님·”
“군사·”
“고생하셨습니다· 당 당주님 덕분에 많은 문도들이 목숨을 구할 겁니다·”
“휴!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군·”
당기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족히 십 년은 늙어 보였다· 그만큼 지난 한 달 동안 막대한 심력을 소모한 탓이다·
반면 하진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문도들을 전쟁터로 직접 보내야 하는 게 군사의 임무였다· 그들 중 상당수는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속명단이 있으면 한 명이라도 살아서 귀환할 확률이 높아진다· 군사 입장으로서는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없었다·
하진월은 수하들에게 북천문의 모든 무인들에게 속명단을 한 알씩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군사부의 무인들이 속명단을 든 목함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할 일을 다 하셨으니 이제 조금이라도 쉬시지요·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쉬는 것은 전쟁이 끝난 후에 해도 늦지 않네·”
“그럼?”
“활독당 아이들의 성취를 확인해야지· 그 아이들도 전장으로 나갈 텐데 내가 직접 봐줘야 하지 않겠나?”
“그렇긴 하지만····”
하진월이 말끝을 흐렸다·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 당기문을 쉬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당기문이 이끄는 활독당은 북천문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조직이었다· 활독당의 무인들은 독을 이용해서 내공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그 때문에 독에 대한 이해도가 남달랐다· 만일의 경우 무적세가가 독을 사용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하진월의 머릿속에는 활독당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계획이 이미 수립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당기문이 무리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말릴 수가 없었다·
당기문이 문득 물었다·
“문주는?”
“아마 지금쯤 공방에 계실 겁니다· 은 소저와 같이 계시지 않을 때는 공방에 있으니까요·”
“그런가?”
당기문의 시선이 당미려를 향했다· 의외로 당미려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진무원에게서 마음을 접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그녀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지 잘 알기에 당기문의 마음은 안쓰럽기만 했다·
그때였다·
“군사 급보입니다·”
갑자기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하진월이 급히 대답했다·
“들어오게·”
말이 끝나자마자 군사부의 무인이 누군가를 대동하고 뛰어 들어왔다· 같이 들어온 이는 바로 윤광이었다· 조국호와 함께 감숙성으로 떠났던 그가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무슨 일인가?”
“무도에서 적의 척후조를 만났습니다·”
“척후조? 적들이 무도까지 척후조를 보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조국호는 어떻게 되었는가?”
“형님은 크흑!”
윤광이 말문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전후 사정을 짐작한 하진월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본래의 냉철한 표정을 회복했다·
지금은 개인의 감정을 앞세울 때가 아니었다· 적들의 척후조가 무도에 도착했다면 본진이 사천성으로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 전에 움직여야 했다·
그가 부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수뇌부에게 계획대로 움직이라고 전하게·”
“존명!”
이미 수차례 수뇌부 회의를 통해 비상시 대응 방안을 마련해 두었다· 또다시 회의한다고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었다·
명령이 떨어지면 각 조직들은 각장 맡은 바 지역으로 떠나게 된다· 하진월은 그들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할 체계를 이미 구축해 놨다·
하진월이 명령을 내린 즉시 소무상과 마도광이 각각 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천문을 떠났다· 그들이 움직이자 북천문은 완벽하게 전시 태세로 전환했다·
북천문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그 시각 진무원은 뜻밖에도 공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질 좋은 철괴였다· 북천문 무인들 대부분이 이와 같은 철괴로 만든 무기를 사용했다·
진무원은 차분한 눈빛으로 철괴 옆에 있는 화로를 바라보았다· 화로는 새하얀 불빛을 토해내며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진무원은 망설이지 않고 철괴를 화로에 집어넣었다· 강렬한 열기에 철괴가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열기가 최고조에 달하자 진무원은 강철 집게로 철괴를 끄집어내 망치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땅 땅!
듣기 좋은 쇳소리가 공방 안에 울려 퍼졌다·
불꽃이 튕기면서 철괴가 금세 길쭉하게 늘어났다· 진무원은 늘어난 철괴를 반으로 접은 후 다시 한참을 두들겼다· 그러고는 황톳물에 담가 열기를 식혔다·
치이익!
뜨겁게 달궈진 철괴가 들어가자 황톳물이 달아오르며 공방 안에 수증기가 가득 찼다· 숨이 막힐 만도 하건만 진무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철괴를 화로에 집어넣었다·
어느 정도 뜨겁게 달궈졌다 싶으면 다시 망치로 두들겨 철괴를 접고 그 후에 다시 식히고· 일련의 과정이 십여 번 이상 반복됐다· 그렇게 쇠가 한 번씩 접힐 때마다 불순물은 빠지고 표면이 빛나기 시작했다·
혹독한 열기 속에서 격렬하게 망치질을 하고 있었지만 진무원의 전신에는 땀방울 하나 흘러나오지 않았다·
땅 땅 땅!
망치질이 이어질수록 철괴도 점차 검의 형태를 갖춰갔다· 진무원의 손에 가장 잘 어울리는 형태로·
마침내 제 모습을 드러낸 검신에 물결 문양이 일렁이고 있었다· 진무원은 집게로 검신을 들고 자세히 살펴봤다·
흠집 하나 없이 유려하게 곡선을 그리며 이어진 검신엔 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땅!
손가락으로 검신을 튕기자 청명한 쇳소리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진무원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평범한 쇠로 만들었지만 무게와 균형 모든 것이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진무원은 내친김에 손잡이까지 만들었다·
그렇게 완성된 검신엔 특이하게 날이 서 있지 않았다· 날을 세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대로 숫돌에 갈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진무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날이 서지 않은 무인검(無刃劍)· 이 정도면 충분했다· 날이 없기에 굳이 검집을 만들 이유도 없었다·
진무원은 갓 만든 무인검을 들고 공방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하진월과 은한설이 그를 맞았다·
“문주님·”
“무원·”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까?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요?”
“워낙 집중을 하고 계셔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들어오셔도 상관없는데·”
진무원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쓰던 설화만큼 명검을 만드는 거라면 당연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만 지금 만든 검은 명검이라고 부르기엔 많은 부족함이 있었다·
재료도 그렇고 투자한 시간도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단시간 동안 쓰기엔 부족함이 없는 강도를 지녔다· 진무원이 딱 원하는 수준이었다·
“무적세가가 움직였습니다· 사천성으로 넘어오는 접경 지역에서 본 문의 무인들과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문주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먼저 병력을 움직였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진무원은 놀라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하진월도 그런 진무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진무원은 전운을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경지에 이른 도사들이 천기를 읽듯 전운을 느낄 수준까지 오른 것이다·
그가 무인검을 만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검이 필요 없는 경지에 이른 그였지만 모용율천을 상대하기 위해선 검이 있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진무원은 무인검을 허리에 꽂았다· 무척이나 투박한 모습이었지만 진무원에겐 꽤나 어울려 보였다·
“일단 검혈대와 비황대가 움직였으니 시간은 벌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문주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전 언제든 군사의 명령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필요한 곳에 저를 투입하세요·”
“각오 단단히 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이제부터 혹독하게 부려먹을 생각이니까요·”
“이거 벌써부터 겁이 나는군요·”
하진월의 엄포에 진무원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에 하진월이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제야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되었던 근육이 이완되는 느낌이었다·
수년을 함께하다 보니 이제 눈빛만 보아도 뜻을 알 수 있는 사이가 된 두 사람이었다· 농담 몇 마디로 긴장이 풀리고 새롭게 전의를 북돋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진무원이 물었다·
“제가 어떡하면 되겠습니까?”
“혹시 제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어떤?”
“사천성은 철옹성이라고· 하지만 철옹성에도 약점은 있다고·”
“기억합니다·”
“적들은 분명 약점을 공략할 겁니다· 문주님께서 약점을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진무원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해서 전쟁을 눈앞에 둔 사람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하진월은 진무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진무원을 믿었다·
“문주님·”
“말씀하십시오·”
“보름 딱 보름만 버티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이 하진월이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하진월의 음성엔 비장함이 감돌고 있었다· 결의에 찬 그의 눈빛에 진무원이 빙그레 웃었다·
“보름이라· 한번 힘써봐야겠군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은 소저에게도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군사·”
“군사부의 무인들 중 정예들을 따로 빼놓았습니다· 그들을 이끌고 먼 길을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할 일이 있나요?”
“물론입니다· 은 소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은 소저가 어떻게 해주느냐에 따라 전쟁의 불씨가 더 크게 타오를 수도 혹은 완전히 꺼질 수도 있습니다·”
“알겠어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쉽지 않은 일이 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군사· 각오는 충분히 되어 있으니까·”
은한설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결의만큼은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다·
진무원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물러설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전쟁이 이제 시작되고 있었다· 진무원은 전쟁의 중심을 향해 뛰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