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화 : 7장 피눈물이 가슴 위로 흐른다 (3)
진무원이 향한 곳은 궁문휘가 싸우던 연무장이었다·
연무장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거대한 전각은 통째로 무너져 있었고 수많은 이가 죽거나 다쳐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팔 다리가 날아가 시뻘건 속살을 드러낸 채 신음하는 이들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어떤 이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짓이겨져서 시신을 수습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게 처참하게 죽은 이들 중에 총관 관대승도 있었다· 관대승은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꺾인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런 그의 가슴뼈는 움푹 함몰되어 있었다·
“총관님·”
“크흑!”
곳곳에서 관대승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무원은 잠시 관대승을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서도 궁문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관대승을 죽인 후 빠져나간 것 같았다·
진무원이 고개를 저었다· 궁문휘는 그야말로 폭풍처럼 운중천을 휩쓸었다· 비록 운중천 전체가 무너질 만큼 큰 타격을 입힌 것은 아니었지만 관대승을 비롯해 중요 인사들을 격살해 운중천이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운중천이 한천에 자리를 잡은 이래 최악의 피해였다· 그리고 피해를 입힌 당사자는 운중천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진무원은 더 이상 운중천에 미련을 두지 않고 몸을 돌렸다·
‘궁문휘가 이렇게 드러내 놓고 운중천을 공격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 피해를 입히려고 그가 운중천을 공격했단 말인가?’
진무원이 고개를 저었다·
산서성에서 전력의 반이 날아가는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남하를 한 밀야다· 남은 전력이야말로 밀야의 정예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운중천에 기습한 이들 중 밀야의 정예라 할 수 있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야주인 등유명과 소금향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정말 운중천을 몰락시키려 했다면 반드시 이 자리에 나타나야 했다· 그런데도 이 자리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운중천보다 더 큰 목표가 있다는 뜻이겠지·’
현 천하에 그런 곳은 단 한 곳밖에 없었다·
무적세가(無敵世家)·
☆ ☆ ☆
등유명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무적세가는 역시 무적세가였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을 했을 텐데도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대항했다· 그 때문에 밀야의 피해가 커지고 있었다·
그 많은 고수들이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무적세가에 머물고 있는지 몰랐다· 밀야의 무인들을 막아서는 자치고 고수가 아닌 자 없었다·
그만큼 무적세가의 저력은 무서웠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운중천에서 지원군이 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제자인 궁문휘가 제 역할을 해준 것이 분명했다·
“제자에게 뒤처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
등유명이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그의 목표는 무적세가의 가주인 모용율천이었다· 모용율천만 제거하면 무적세가는 구심점을 잃고 와해될 것이다·
무적세가의 무인들이 다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흔한 함성이나 기합성도 없었다· 마치 평소와 다름없다는 듯이 그렇게 그들은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이 정도의 습격에 흥분할 필요가 없다는 듯한 그들의 모습에서 무적세가의 견고함과 저력이 보였다·
등유명은 그들이 무적세가 내에서도 꽤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무인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들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아 보였다·
무적십팔령(無敵十八令)·
무적세가를 지키는 방패라 불리는 그들이었다· 평소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는 그들이었지만 무적세가가 경각의 위기에 처했거나 그에 준하는 위기가 닥쳤을 때 모습을 드러낸다·
굳이 격돌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무척이나 강하다는 것을·
등유명이 문득 주위를 돌아봤다· 그러자 육마존 중 넷과 소금향이 보였다· 그를 따라온 자들 중에 최고수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등유명은 그중 육마존에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아무래도 자네들이 고생해 주어야겠군·”
“흐흐!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려고 우리가 따라온 것 아닙니까?”
육마존이 미소를 지었다· 두 명이 빠졌지만 그렇다고 위축될 그들이 아니었다· 사대마장을 제외하면 밀야 내에서도 당할 자가 없다는 소리를 듣던 육마존이었다·
열여덟 명의 무적십팔령을 향해 그들이 다가갔다·
말은 필요 없었다· 이미 서로가 만만치 않은 적수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거의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쩌어엉!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고 단련된 육체와 육체가 얽혔다·
육마존과 무적십팔령이 격돌하면서 길이 열렸다· 등유명과 소금향은 육마존이 연 길을 걸었다·
쾅!
소금향의 일수에 앞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문이 부서져 날아갔다· 그리고 나타난 거대한 대전과 그 앞에 서 있는 세 명의 남자· 그 선두에 용포를 입고 있는 젊은 남자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모용율천·”
선두에 서 있는 이십 대 후반의 남자를 보는 순간 든 생각이었다· 세상에 알려진 모용율천의 나이는 일흔이 넘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외모는 아무리 많이 봐줘도 이십 대 후반을 넘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반로환동(返老還童)·
모용율천 역시 등유명처럼 반로환동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의 곁에 있는 자들은 등유명도 익히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심무외 담적심·”
모용율천과 마찬가지로 아홉 하늘의 반열에 올라있는 자들· 비록 이제는 오무존으로 격하되었다고 하지만 그들의 존재감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모용율천이 등유명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밀야의 야주가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무한한 영광이군·”
“드디어 만났군· 모용율천 보고 싶었다·”
등유명이 야수처럼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먹잇감을 보고 울림을 토해내는 맹수 같았다·
그가 뿜어내는 거친 살기가 일대를 장악했다· 그에 담적심과 심무외가 미간을 찌푸렸다· 피부가 송곳으로 찌르는 듯 아파왔기 때문이다·
‘우리를 탈출한 맹수 같은 자군·’
‘범상치 않은 살기· 그때 확실히 제거했어야 했는데· 쯧!’
두 사람이 내심 혀를 찼다· 하지만 등유명에게 위축된 모습은 아니었다·
등유명이 밀야의 야주로 일세를 풍미하고 있다지만 그들 역시 인생의 높은 파고를 헤쳐 온 노강호였다· 무공 또한 오래전에 절대의 경지에 달해 두려울 것이 없었다·
등유명의 살기 어린 말에 모용율천의 미소가 짙어졌다·
“나는 그다지 자네가 보고 싶지 않았다네·”
“왜 내가 두려운가 보지?”
“두렵다기보다는 거추장스러웠지· 원래 지배하는 자는 거추장스러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니거든·”
“그래서 부야주를 시켜 밀야 내에 반란을 일으킨 것인가?”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밀야의 야주를 제거하는 일인 바에야·”
모용율천이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에 등유명의 살기가 더욱 들끓어 올랐다·
“당신의 방식은 언제나 똑같지· 항상 남을 이용할 뿐 자신의 손에는 절대 피를 묻히지 않지· 그런 방식으로 천하를 지배해 오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네· 어떤 길을 택하든 정상에 도달하는 것은 똑같지· 단지 차이가 있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 하는 것뿐이겠지· 나의 방식 역시 그중에 하나일 뿐 그런데 내가 왜 부끄럽겠는가?”
모용율천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그의 모습이 등유명을 더욱 화가 나게 만들었다·
“세상은 우리 밀야를 욕하지만 당신과 무적세가야말로 진정한 악마다· 자신들의 필요성에 따라 우리 밀야를 만들고 우리가 독립된 길을 걸으려 하자 제멋대로 말살하려고 했지· 그러고도 스스로 떳떳하다 자부할 수 있는가?”
“이런 이런! 그래도 밀야의 야주쯤 되면 통치에 대한 철학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늘· 자네는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군·”
“그게 무슨 개소리냐?”
“본시 군림자(君臨者)는 모든 수단을 이용해야 하는 법일세· 제 아무리 수단이 더럽다고 하더라도 결과만 좋다면 그 어떤 과오도 용서받을 수 있는 법이지· 오욕을 뒤집어 쓸 각오가 없는 자는 군림자가 될 자격이 없지· 자네 또한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진정한 군림자가 되기는 힘들 걸세·”
모용율천의 말에 등유명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말로는 그를 당해내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 좋은 주먹 놔두고 굳이 입으로 싸울 필요는 없겠지· 모용율천 이 자리에서 진정한 천하의 패자가 누군지 결정을 내자·”
“도전하는 건가?”
“그렇다· 밀야의 야주가 무적세가의 가주에게 정식으로 도전을 한다· 나의 도전을 피하진 않겠지?”
“미안하군! 자네는 아직 나에게 도전할 자격이 없다네·”
“천하의 무적세가주가 도전을 피하겠다는 건가? 겁쟁이군·”
“쯧! 그래서 자네가 아직 그 모양인 걸세·”
등유명의 도발에 모용율천이 가볍게 혀를 찼다· 명백히 등유명을 무시하는 모습이었다·
이쯤 되자 인내심이 강한 등유명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입만 살았구나 모용율천·”
“그걸 이제 알았는가? 내 대신 싸워줄 자가 지천에 널렸는데 굳이 내가 손발을 쓸 필요는 없지· 그렇지 않은가?”
부르르!
등유명의 전신에 잔경련이 일었다· 그에 소금향이 나직히 말했다·
“흥분하면 안 됩니다 야주·”
“알고··· 있소·”
“그냥 평상시처럼 하시면 됩니다 야주·”
“고맙소·”
소금향의 충고에 등유명이 냉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의 투지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좋다 모용율천· 네가 나서지 않겠다면 내가 너에게 가마·”
그가 모용율천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소금향이 등유명을 따랐다· 그녀는 지금 등유명이 무척이나 흥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았다·
가슴은 흥분했지만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냉철한 상태· 무인이 자신의 무력을 발휘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이었다· 이런 상태가 되어야 자신의 무력을 십 할 발휘할 수 있었다·
등유명의 예상대로 모용율천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앞을 막아선 이는 심무외와 담적심이었다·
“우리를 넘어서기 전에는 그에게 갈 수 없다네·”
“끝까지 모용율천의 개로 남겠다는 건가?”
등유명의 말에 두 사람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들의 얼굴엔 은은한 분노가 떠올랐다·
비록 모용율천에게 져서 그의 수족과 같은 신세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등유명에게 모욕 어린 말을 듣고도 괜찮을 정도로 마음이 넓지는 않았다·
그들은 등유명을 보고 이를 빠득 갈 때 소금향이 앞으로 나섰다·
“심무외는 내가 맡을게요 야주·”
“부탁하겠소·”
“걱정하지 마세요·”
소금향이 자신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꽤나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고대해 왔다· 이 세상을 지배해 온 아홉 하늘과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얻기를·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기회가 선물처럼 찾아왔다·
소금향이 은혼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심무외와 담적심도 독문의 심공을 운용했다·
쿠우우!
대전에 강렬한 기파가 요동쳤다·
등유명과 소금향이 눈짓을 교환했다·
굳이 전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었다· 이심전심(以心傳心) 마음이 통한 순간 그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챠핫!”
전사력이 실린 권기와 은빛 수강이 담적심과 심무외를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담적심과 심무외가 움직였다·
콰릉!
멀쩡한 하늘에 뇌성벽력음이 울려 퍼지며 네 사람이 격돌했다· 그 여파로 무적세가의 고풍스러운 전각과 담장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도 모용율천은 미소를 지었다·
“전력을 빼돌려 무적세가를 직접 칠 생각을 하다니· 정말 깜찍하구나·”
솔직히 밀야가 무적세가를 기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놀랐다· 그만큼 신선한 역발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희는 모를 것이다· 이런 너희의 행위가 오히려 무적세가가 자연스럽게 세상으로 나올 빌미를 준 것을·”
중원무림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운중천이 밀야에 의해 짓밟혔고 무적세가 역시 침입을 받았다·
이제 사람들은 알게 될 것이다· 중원에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위기 앞에서 극도로 이기적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이전까지는 북천문에 대한 동정 여론 때문에 운중천이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여론은 운중천 쪽으로 기울 것이다· 그리고 무적세가는 자연스럽게 세상의 전면에 나서게 될 것이다·
모용율천이 미소를 지으며 전각 밖에 있는 수하에게 전음을 보냈다·
[암혼대(暗魂隊)를 내보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