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 1장 피의 강으로도 풀리지 않는 갈증이 있다 (2)
하진월은 심각한 표정으로 황철이 가져온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귀주성을 휩쓸고 사천성에 상륙한 역병이 사실은 독에 의한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하지만 정신이 들자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대체 누가? 왜 무슨 목적으로?’
진무원의 말이 사실이라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사천성에 혼란을 조장하려는 목적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답은 금방 나왔다·
‘모용율천이 움직인 것인가?’
북천문을 세상에 드러낼 때부터 어느 정도의 공격은 각오했다· 그것이 유형의 것이든 혹은 무형의 것이든 간에 말이다· 하지만 설마 역병을 위장한 독공을 펼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독이 위험하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독을 사용하는 문파는 지탄을 받거나 멸시를 받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천하의 당문조차도 독을 사용하는 것을 극히 자제했고 어쩔 수 없이 사용할 경우에는 주위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했다·
독은 대량 살상을 가능케 한다· 수많은 이가 자신이 무엇에 당했는지도 모르고 목숨을 잃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강호에서는 독을 사용하는 자들을 극도로 견제했다· 그리고 대량 살상을 한 자는 공적으로 지목해 반드시 처단했다·
‘설마 모용율천이 독으로 역병을 위장할 줄이야·’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았다·
그렇지 않아도 천하를 암중에서 지배하는 모용율천과 무적세가다· 굳이 독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독을 연구했다는 것은 만일의 사태에 충분히 대비를 했다는 것이다·
‘아마 당 당주님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그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귀주성에서만 수천 명이 죽었다· 이대로 방치하면 사천성에서도 그 이상의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하진월은 황철이 내놓은 지도에 집중했다· 사천성의 지형이 자세히 그려진 지도에는 붉은 점들이 빼곡히 찍혀 있었다· 역병이 발병될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었다·
‘너무 많다· 정말 이 모든 곳이 하독을 하는 곳이라면 북천문과 사천 무림의 힘을 모아도 전역을 경계하는 것이 쉽지 않아·’
결국 우선순위를 두고 병력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또한 쉽지 않았다· 다 같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이었다· 어디가 중요하고 어디가 덜 중요하고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진월은 판단해야 했다·
다 같은 사람의 목숨이지만 지닌 바 가치가 다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진월은 그렇게 냉정한 시선으로 사람의 목숨을 평가하고 바라봐야 했다· 그것이 하진월의 역할이었다·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하진월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츰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딱 북천문과 지원 온 문파들의 전력을 투입할 만큼의 하독 지점과 거리가 아닌가?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절묘하구나·”
그가 급히 밖에 대기하고 있던 황철을 불렀다· 황철이 들어오자 그가 급히 물었다·
“이 지도를 삼합에서 얻었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지도를 얻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그건····”
황철은 달주에서 있었던 일들을 가감 없이 이야기했다· 어떻게 해서 당기문이 광물 독이라 확신했고 또 어떻게 사냥꾼을 추적해서 지도를 얻었는지 말이다·
그의 이야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래서 하진월은 더 의아함을 느꼈다·
‘그렇게 쉽게 하독하려는 자를 추적했다고?’
지금까지 이들의 행사를 보면 절대 허술하게 드러날 자들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냥꾼이라는 자가 너무 쉽게 드러났다·
결국 하진월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유인인가?’
그의 표정이 더할 수 없이 차갑게 변했다· 모용율천이 그린 그림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그의 의도를 파악하자마자 하진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당장 북천문에 남아 있는 수뇌부들을 모두 소집해 주십시오·”
“모두 말입니까?”
“예! 모두!”
하진월이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알겠습니다·”
황철이 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하진월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보통 급한 일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의 발걸음이 자연 급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남은 하진월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문주님·”
진무원은 전력으로 경공을 펼쳤다·
사냥꾼을 잡은 삼합에서 수녕까지는 천 리가 넘었다· 그에겐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진무원은 모든 것을 잊고 오직 경공을 펼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슈우우!
전설의 어풍비행을 펼치는 것처럼 그의 몸은 마치 빗살처럼 뻗어나갔다· 몸이 공기보다 가벼운 느낌이었다· 한번 대지를 박찰 때마다 족히 십여 장은 쭉쭉 뻗어나가는 그의 모습은 일반인들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강이 앞을 막으면 수상비(水上飛)를 펼쳤고 수풀이 나타나면 초상비(草上飛)를 펼쳤다· 그렇게 반나절을 달리자 저 멀리 수녕이 보였다·
동이 어슴푸레 떠오르고 있었다· 진무원은 늦지 않았기를 기도하며 수녕에 입성했다· 여명에 잠긴 수녕은 아직 고요했다·
진무원은 전방위 감각을 끌어올린 채 걸음을 옮겼다· 아직까지는 이상한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에서 일찍 깨어난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 아낙네가 밥을 준비하는 기척 아비가 농기구를 정리하는 기척이 전방위 감각을 통해 그의 뇌리로 흘러들어 왔다·
수많은 이의 기척이 일제히 뇌로 유입되면서 정보의 홍수가 일어났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미쳐 버렸을 만큼 엄청나게 유입된 정보는 진무원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진무원은 차분히 정보를 분석하고 걸러냈다·
걸러내고 또 걸러내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진무원은 수상한 기척 하나를 감지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거칠어진 호흡에 빨라진 심장 박동 소리가 그의 신경을 거슬렸다·
진무원은 수상한 기척이 느껴진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이 있는 곳이었다· 우물가에는 사냥꾼 복색을 한 남자가 서성이고 있었다·
그가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뺐다· 그런 그의 손에는 예의 광물 독이 들려 있었다·
순간 진무원이 대지를 박찼다· 날카로운 파공음에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그런 그의 망막 가득 진무원의 모습이 확대되고 있었다·
“제기랄!”
남자가 입술을 깨물며 급히 광물 독을 우물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진무원의 반응이 훨씬 더 빨랐다·
무형의 검기가 그의 손을 통해 발출되었다 싶은 순간 남자의 팔목이 송두리째 잘려 나갔다·
“크윽!”
남자가 신음성을 흘리며 도주했다· 그런 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빛이 가득했다· 그도 제법 강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는데 설마 단 일수에 팔목을 잃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팔목을 잃은 남자는 그대로 도주를 택했다·
“멈춰라!”
진무원은 남자를 추적했다· 남자는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무공 차이는 현격했다· 그 때문에 진무원은 금방 남자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진무원은 손을 뻗어 남자의 마혈을 제압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남자가 자신의 몸 안에 흐르는 독을 폭주시켰다· 순간 그의 칠공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남자의 얼굴에 죽음이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안색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죽은피를 왈칵 토해내며 쓰러졌다· 그는 진무원이 어찌할 사이도 없이 그대로 절명했다·
진무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남자가 하독을 하기 전에 막은 것은 다행이지만 자결을 함으로써 무적세가와 연결할 증거가 사라져 버렸다·
“후!”
진무원이 나직이 한숨을 토해냈다·
겨우 역병으로 위장한 독이 퍼지는 것을 막았지만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아직도 지도에 표시된 지점은 많이 남아 있었고 위험은 끝나지 않았다·
진무원은 남자의 품을 뒤졌다· 그러자 예의 지도가 다시 나타났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자양인가?”
가깝다고 하더라도 꼬박 하루 거리다· 그나마 진무원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족히 이틀은 걸릴 거리였다·
진무원은 광물 독을 수습한 후 곧바로 경공을 펼쳤다· 천여 리를 달려왔지만 그의 얼굴엔 피곤한 빛 하나 없었다·
내공이 극에 달해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만영결은 이미 새로운 경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진무원은 한가하게 자신의 성취를 음미할 여유가 없었다·
하루를 꼬박 달려 자양에 도착했다· 아직까지 역병이 도는 소문을 듣지 못했는지 자양은 다른 곳과 달리 평온해 보였다·
진무원은 자양에 입성하는 순간이었다·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음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누군가 암기를 날린 것이다·
순간 진무원의 몸이 팽이처럼 제자리에서 무섭게 돌았다·
피피핑!
쇳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암기들이 비산했다·
“누구냐?”
진무원이 암기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자 암기를 날린 자가 후다닥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진무원은 생각할 것도 없이 추적에 나섰다·
암습자는 경공이 무척 뛰어났다· 그는 자양의 골목길을 제집 안마당처럼 누비면서 진무원과의 거리를 벌려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수를 쓰든 간에 진무원과의 거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무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골목길을 이리 꺾고 저리 꺾고 있었지만 암습자는 일관되게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유인하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이곳까지 오는 과정 또한 석연치 않았다· 만일 자신이 반대 입장이었다면 증거가 될 만한 지도 따윈 지니고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마치 자신들의 행적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버젓이 지도를 가지고 다녔다·
진무원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들이 무적세가와 연관된 증거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암습자를 따라 도착한 곳은 자양 외곽 이름 모를 야산 중턱에 있는 폐사찰이었다· 오래전에 버려진 듯한 사찰의 규모는 무척이나 컸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각이 무너지고 담장도 쓰러져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그나마 멀쩡한 것이라면 대웅전 옆쪽에 있는 커다란 동종이었다· 대여섯 사람이 팔을 벌려도 닿지 않을 것 같은 동종은 대들보에 위태하게 매달려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현판이 보였다·
보광사(保光寺)·
진무원은 모르지만 보광사는 유서 깊은 사찰이었다· 한창 전성기 시절에는 승려의 수만 팔백여 명에 이를 정도로 컸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쇠퇴해 이제는 그 흔적만이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이곳이 호굴인가?”
진무원이 대웅전 앞에 선 순간 보광사 곳곳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언뜻 보아도 족히 백여 명은 넘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진면목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실로 막강해서 진무원의 신경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고수가 아닌 자가 없었다· 문제는 그런 고수들이 무려 백여 명이 넘는다는 것이다·
진무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함정이 준비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백여 명이 넘는 고수들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
하지만 복면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 한 명 숨소리 크게 내지 않고 진무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몸에서는 패도적인 기세가 뭉클뭉클 피어나고 있었다·
진무원은 그런 그들의 기세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도 쉽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복면인들 사이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다른 이들보다 더 깊고 유현한 눈동자를 한 사내였다· 그는 잠시 갈등 어린 눈빛으로 진무원을 바라봤다·
‘분명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데·’
그 순간 선두의 복면인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포위를 하고 있던 백여 명의 복면인들이 진무원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의 손에는 검고 길쭉한 물체가 들려 있었다·
복면인들이 길쭉한 물체를 들어 진무원을 겨냥했다·
댕!
그 순간 웅혼한 종소리가 보광사에 울려 퍼지고 진무원의 몸이 휘청였다· 그의 입가엔 혈흔이 내비치고 있었다· 종소리가 심맥을 진탕했기 때문이다·
진무원의 시선이 대웅전 옆에 매달린 동종으로 향했다· 어느새 동종 곁에는 네 명의 복면인이 빙 둘러서 있었다· 그들은 맨손으로 동종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때마다 동종이 웅혼한 종소리를 토해냈다·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진무원의 몸이 움찔거렸다· 단순한 종소리가 아니라 음공이었다· 강력한 기운이 실린 음파는 진무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시작으로 복면인들이 진무원의 주위를 맹렬히 휘돌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오른쪽으로 또 어떤 이들은 왼쪽으로 돌며 길쭉한 무기를 휘둘렀다·
후웅!
강렬한 바람이 폭풍처럼 휘몰아쳐 왔다· 그제야 진무원은 복면인들이 들고 있는 물체가 승려들이 주로 사용하는 선장과 계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댕댕!
사자후를 연상케 하는 종을 이용한 음공 그리고 승려들이 사용하는 선장· 그리고 백 명이 넘는 복면인·
그 순간 진무원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 하나·
“당신들은 백팔나한들이군·”
진무원은 피가 싸늘히 식는 것을 느꼈다·
백팔나한(百八羅漢)·
소림사를 대표하는 무승들·
개개인의 무력도 대단하지만 그들이 무서운 점은 바로 백팔 명이 펼치는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이었다·
고금 이래 가장 완벽하다고 평가받는 대일인(對一人) 진법인 백팔나한진이 진무원을 향해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