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 8장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災殃)이 세상을 휩쓸다 (2)
담수천의 표정은 더할 수 없이 차가워서 한 겹 서리가 내려앉은 것 같았다· 그런 담수천의 모습에 서문혜령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 지냈느냐?”
“아버지가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잊었느냐? 나는 이곳의 주인 중 한 명이다·”
순간 담수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곳의 진정한 주인이 모용율천이라는 사실은 담수천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담적심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저리 태연자약하게 말을 하니 갑자기 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담수천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자신의 속내가 드러나지 않도록 꾹꾹 눌러 참았다·
담수천의 시선이 서문혜령을 향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서문혜령이 살짝 고개를 젓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은 충돌할 때가 아니라는 신호였다· 담수천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불귀곡은 어쩌고 나오셨습니까?”
“네 큰형한테 맡겼다·”
“그렇군요·”
“똑똑한 아이니 별 무리 없이 불귀곡을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씀을 하려고 마중 나오신 겁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담적심이 먼저 뒤돌아서 안쪽으로 걸어갔다· 담수천은 그런 담적심의 뒷모습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서문혜령이 곁으로 다가왔다·
“수천 침착해야 해요·”
“알고 있소· 걱정하지 마시오·”
“믿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담수천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커다란 세력의 주인인 아버지 그리고 정실과 첩실 이복형제의 갈등· 어디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자신이 그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을 질시한 정실의 두 아들 즉 배다른 형제들의 암살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홀로 세상에 나갔다· 불귀곡이라는 커다란 배경을 두고도 백인비무행이라는 위험한 도전을 택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뭐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세상 어느 곳에서나 있을 법한 그런 이야기니까· 그래서 그따위 소소한 이유로 아비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최소한 백인비무행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십수 년 전 어미가 원인 모를 병으로 죽었다· 그가 폐관 수련을 하고 있는 동안 말이다· 문제는 그가 어미의 시신을 보기도 전에 불태워 버렸다는 것이다·
그때 알아차렸다· 자신의 어미가 죽은 것이 병 때문이 아니란 것을· 여러 가지 정황 증거가 어미가 타살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흉수가 누군지도 알아낸 지 오래였다· 그리고 누가 그 모든 것을 묵인했는지도· 그래도 그가 참은 것은 아직은 때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참고 또 참았는데 막상 눈앞에서 아비를 보니 열화가 들끓어 오르는 것이 견디기 힘이 들었다· 만일 곁에 서문혜령이 없었다면 벌써 화가 폭발했을지도 몰랐다·
‘그래!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직 천하를 휘어잡고 발아래 두기엔 내 힘이 많이 모자라· 지금은 참아야 할 때다 담수천·’
담수천이 이를 악물고 담적심의 뒤를 따랐다· 서문혜령이 그 곁에 있었다·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커다란 방문 앞이었다· 그제야 담적심이 뒤를 돌아봤다· 그가 서문혜령에게 말했다·
“아가야! 너는 이 자리에 들어갈 수가 없단다·”
“하지만····”
서문혜령이 반발하려고 할 때 담수천이 손을 들었다·
“혜령 괜찮소· 나 혼자 들어가겠소·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알··· 았어요·”
내키지는 않았지만 서문혜령은 담수천의 뜻대로 따르기로 했다· 담수천 혼자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은 불안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문혜령 혼자 밖에 내버려 둔 채 두 사람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담수천도 익히 알고 있는 이들이 앉아 있었다·
담수천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우선 거대한 탁자의 중앙에는 모용율천이 앉아 있었고 그 양쪽으로 불영신승과 심무외가 앉아 있었다· 담적심까지 합하면 오무존 중 네 명이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셈이다·
아홉 명이었을 때보다는 무게감이 떨어진 것 같았지만 그들의 존재감 자체는 여전했다· 세상의 평이 어쩠든 간에 그들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이었다·
모용율천은 무적세가라는 거대 세가의 주인이었고 불영신승의 말 한마디면 소림사가 움직인다· 거기에 불귀곡의 주인인 담적심과 사사천의 천주인 심무외까지· 어떻게 보면 아홉 하늘 중 가장 실력이 출중하고 세력 역시 강대한 사람들만이 여기 모여 있는 셈이다·
담수천이 그들에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후배 담수천이 여러 선배님들께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에 보는군· 그새 신수가 더 훤해졌어·”
“아미타불! 담 곡주가 자식 교육을 잘 시키셨군요·”
“오랜만이구나 수천아·”
모용율천을 필두로 불영신승 심무외가 각각 한 마디씩 했다·
모용율천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고 불영신승의 눈에는 따스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심무외는 어딘지 모르게 탐탁지 않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모용율천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멀뚱하게 서 있지 말고 자리에 앉으시게·”
“제가 어찌?”
“자네 정도면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충분하지· 창천무제라는 별호는 이미 천하를 오시할 만큼 무겁고 세상의 정상에 설 충분한 가치가 있으니까·”
담수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말 그대롤세· 창천무제라는 이름이 아홉 하늘 아니 오무존에 비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 세간의 평· 그러니 그 자리에 앉아도 뭐라 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네·”
모용율천의 말에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미 사전에 협의가 되었다는 뜻이다·
담수천은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모용율천의 말대로 그의 이름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못지않은 무게와 위엄을 갖고 있었다·
때로는 예의를 차린다고 겸양을 떨 때가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이곳은 강자의 대지· 힘이 있는 자가 대접을 받는 곳이었다· 오무존과 같은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곧 그들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겨우 당신들과 같은 눈높이를 갖게 된 셈인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일들과 우여곡절이 있었다· 하지만 과거야 어떻든 간에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모용율천이 자리에 앉은 담수천을 보며 말했다·
“자네에겐 그 자리가 참으로 어울리는군· 당대의 무인들 중 그 자리에 앉을 만한 무인은 자네가 유일할 걸세·”
“아니 한 명이 더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한 말이었다·
모용율천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누군가?”
“북검!”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그만큼 그는 진무원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 자리에 진무원이 있었으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궁금했다·
모용율천이 빙긋 웃었다·
“그래! 그가 있었군· 그래 그라면 이곳에 앉을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겠지· 하나 불행히도 그에겐 이곳에 올 기회가 없을 것이네·”
“무슨?”
“그냥 예감이라네· 이 나이까지 살다 보면 예감이 꽤나 정확하게 들어맞는 편이지· 아마 그는 무척 바빠져서 이곳엔 신경도 쓰지 못하게 될 거야·”
“····”
“내 말을 믿게! 오직 자네만이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음이니·”
모용율천의 미소가 짙어졌다·
☆ ☆ ☆
소무상이 벽을 허물었다는 소식에 가장 기뻐한 이는 바로 황철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뻐하고 축하해줬다· 내친 김에 그들은 같이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그들은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되는 사이였다· 상대를 존중하면서도 지고 싶지 않아 하는 승부욕이 있었기에 이토록 빠른 시간 안에 성장할 수 있었다· 내친김에 이대로 끝을 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그들의 마음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폐관 수련에 들어가자 다른 이들도 그에 자극을 받아 더욱 무공에 열중했다· 이번에 불이 붙은 이는 마도광이었다·
“썩을! 자신들끼리 강해지려고· 어디 내가 질 줄 알아?”
그는 불같은 승부욕을 불태우며 무공에 열중했다·
그렇게 북천문 전체에 수련 열풍이 불었다· 진무원과 북천문 입장에서는 무척 큰 호재였다· 많은 이가 무공에 몰두하자 바빠진 이는 하진월이었다· 그는 당문과 청성파 아미파의 고수들과 연일 회동을 가지며 결속력을 공고히 다졌다·
그렇게 모두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때 진무원은 청인의 거처를 찾았다· 당기문 숙질의 극진한 간호와 치료 덕분에 청인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청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은류의 수장으로 복귀했다· 모두가 좀 더 쉬라고 만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마치 일에 굶주린 사람처럼 은류에 몰두했다·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닙니까?”
“누워 있는 게 더 힘듭니다· 차라리 이렇게 일에 몰두하는 것이 오히려 건강에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진무원의 걱정에 청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힘들다 싶으면 바로 쉬십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주님·”
청인은 아직 안색이 창백했다· 그래도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보다는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만일 그를 구하지 못했다면 진무원은 천추의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문주님이 오신 것을 보니 외부의 상황이 궁금한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운중천의 움직임이 조용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저도 그게 의아해서 산서성에 간자들을 더 파견했습니다·”
날이 풀리면서 운중천과 밀야는 격돌을 했다· 산서성에서는 연일 격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진무원이나 청인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규모가 작은 국지전에 불과했다· 애초 예상했던 것과는 상황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되지는 않을 겁니다· 밀야의 야주가 등장한 이상 저들도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폭풍 전의 고요함이란 건가요?”
“그렇습니다· 밀야나 운중천 모두 전쟁을 길게 가져갈수록 크게 손해를 보는 상황입니다· 아마 여름이 되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 할 것이 분명합니다·”
진무원이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도 청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지금이 그와 북천문이 누리는 마지막 평화의 순간인지도 몰랐다·
“알겠습니다· 그쪽의 정보를 얻는 데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물론입니다·”
“몸조리 잘하십시오· 부족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시구요·”
“알겠습니다·”
청인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의 거처를 나온 진무원은 북천문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곳은 그의 새로운 터전이었다· 그가 지켜야 할 터전이었고 그를 따르는 수많은 이가 살아가는 보금자리였다· 자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수천 명의 목숨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었다·
자신의 한마디 자신의 결정 하나에 따라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래서 힘들었다· 양어깨를 만근 바위가 짓누르고 있었다·
차라리 혼자서 무공을 익히는 게 훨씬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만둘 수도 물러날 수도 없었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을 왔다· 그래서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도 늘 이런 중압감을 느끼고 계셨던가?”
이제까지 진관호를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의 입장이 되자 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진관호가 살아 있었으면 그에게 여러 충고를 해줬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어깨가 무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휴!”
진무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비의 입장이 되자 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북천문을 이끌기 위해 그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도 말이다·
진무원은 자신의 거처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후원으로 들어섰다· 말이 후원이지 가산과 커다란 연못까지 조성되어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진무원은 조촐한 거처를 원했지만 하진월은 일문의 문주가 머무는 곳이 너무 초라하면 문도들의 사기에 좋지 않다고 하며 이렇게 독립적이면서도 커다란 공간을 꾸몄다· 진무원은 후원으로 들어섰을 때 뜻밖의 인물을 볼 수 있었다·
“한설·”
커다란 연못 한가운데 지어진 정자 위에 홀로 앉아 있는 여인은 은한설이 분명했다· 그녀의 어깨 위로 달빛이 부서져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무원·”
은한설도 진무원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고 바라봤다·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진무원이 은한설이 있는 정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은한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뭐 하고 있어?”
“그냥 잠도 안 오고 달빛도 아름답고 해서····”
“그렇구나·”
진무원이 은한설의 곁에 나란히 섰다· 그러자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후원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은한설이 넋을 잃고 바라볼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이런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냈다·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름답네·”
“그렇지? 이렇게 달빛을 받은 밤이면 더욱 아름다워· 미안해! 허락도 없이 무원의 거처에 들어와서·”
은한설의 사과에 진무원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나에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 이곳은 너의 집이기도 하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물론이야·”
“고마워!”
은한설의 입가에 달콤한 미소가 어렸다·
문득 그녀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났다· 독이 잔뜩 올라 살기만 가득 느껴졌던 그때가· 지금 그녀의 얼굴만 봐서는 도저히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이 변했듯 그녀 역시 많은 것이 변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변하지 않았다· 바로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이제껏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배반하거나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녀를 극진하게 생각하듯 그녀 역시 자신을 한결같이 생각하고 위했다·
진무원은 잠시 눈을 감았다·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유독 은한설의 얼굴만은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눈을 떴다· 은한설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그녀만이 눈에 들어왔다·
“한설·”
“응?”
“우리 혼인하자·”
“뭐?”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영원히·”
은한설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