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 7장 멍석을 깔아 판을 키운다 (1)
등유명의 방문은 북천문의 무인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북천문의 경계망에 구멍이 뚫렸다는 것은 크나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이는 직접 위험에 노출됐던 하진월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만든 북천문의 절진과 함정들이 등유명에게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진월은 원점에서 다시 북천문의 모든 것을 점검했다· 절진은 물론이고 무인들의 경계와 배치를 원점에서 돌아봤다· 문제점을 개선하는 데 거의 열흘이 걸렸다·
그사이 운중천과 밀야가 다시 격돌했다·
봄을 알리는 서전은 뜻밖에도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펼쳐졌던 섬서성이 아닌 산서성에서 시작되었다· 한겨울 동안 전력을 비축한 밀야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남하했고 운중천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전력을 증강했다·
다시 민심은 흉흉해졌고 길거리에서는 곡소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많은 이가 산서성을 탈출했다· 산서성과 붙어 있는 하북성과 하남성은 밀려드는 난민들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그렇게 천하는 혼돈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죽음을 뿌리는 밀야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들을 막지 못하는 운중천을 원망했다· 이제 사람들은 예전처럼 운중천을 우러러보지 않았다·
여전히 천하를 지배할 힘은 있으나 명망을 잃은 패자· 그것이 현재 운중천의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아홉 하늘 중 네 명이나 목숨을 잃으면서 운중천의 위세는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무적세가가 세상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들은 운중천을 개혁하겠다며 전권을 휘둘렀다· 무적수사(無敵修士) 모용율천이라는 거물의 후광 아래 그들은 빠르게 운중천을 장악해 갔다·
무적세가가 운중천을 장악하면서 가장 유명해진 이를 뽑으라면 모용율천의 손자인 모용현이었다·
운중천을 습격해 온 군마대를 응징하면서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모용현은 짧은 시간 동안 적잖은 무명을 쌓았다· 그는 칠소천 이후 강호 최고의 후기지수라고 불렸다·
모용율천에게서 직접 사사한 그의 무공 수위는 이미 강호의 여타 노고수들을 능가할 정도였다· 실제로 그와 겨뤄본 몇몇 노고수는 이미 그가 자신들의 수준을 아득히 넘었다고 증언했다·
노고수들의 발언으로 모용현은 단번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들이 증언한 모용현의 무공은 공작처럼 화려하면서 엄청난 위력을 갖고 있었다·
공작신검(孔雀神劍)·
모용현에게 붙여진 별호였다·
사람들은 모용현의 출현으로 인해 운중천이 밀야에 크게 득수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늘의 섭리는 실로 신묘해서 모용현이라는 기재 하나만을 내보내지 않았다· 마치 균형을 맞추기라도 하듯이 밀야에서도 궁문휘라는 기재가 툭 튀어나왔다·
궁문휘가 세상에 처음 모습을 보인 곳은 섬서성 밀야의 진영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궁문휘는 그 어떤 두각도 나타내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후 산서성의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운중천은 그의 무력에 치를 떨어야 했다·
궁문휘는 처음 모습을 드러낸 전장에서 운중천의 초절정고수 셋을 혼자서 격살해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후로도 궁문휘는 수많은 고수들을 척살하며 악명을 떨쳤다·
철혈마룡(鐵血魔龍)·
그것이 궁문휘에게 붙여진 별호였다· 짧은 시간 동안 그가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 알 수가 있는 대목이었다·
모용현에 이어 궁문휘까지 등장하자 강호는 크게 요동쳤다· 그들은 일검일제라 불리는 진무원과 담수천 이후 가장 촉망받는 무인들이었다·
그때 또 하나의 충격적인 소식이 천하를 강타했다·
창천문(蒼天門)의 출범이 그것이었다·
담수천은 부현 지부의 무인들을 한데 모아 창천문을 출범시켰고 운중천이 이를 정식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처음에 이 소문을 믿지 않았다·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작금의 사정이야 어떻든 부현 지부는 운중천 소속이었다· 대부분의 무인들이 운중천에 소속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부현 지부를 담수천이 흡수해 독립적인 문파로 출범시킨다고 하는데 운중천이 순순히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멀쩡한 자신의 수족을 떼어 주는 격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운중천은 그런 세간의 추측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창천문의 출범을 정식으로 허락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창천문의 출범을 축하해 줬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극심한 혼란을 느꼈다· 하지만 몇몇 식견 있는 사람들은 담수천과 운중천이 모종의 거래를 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단순히 창천문이 독립을 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운중천과 깊은 유대 관계를 이어갈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섬서성의 창천문은 사천성의 북천문과 더불어 단숨에 천하무림의 핵으로 떠올랐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단순히 운중천과 밀야의 전쟁뿐 아니라 북천문과 창천문에도 집중됐다·
북천문의 진무원· 창천문의 담수천 운중천의 모용현 밀야의 궁문휘·
사람들은 향후 강호의 질서가 그들 네 명을 중심으로 재편될 거라고 내다봤다 그와 같은 추측을 확인이라도 해주듯 모용현과 궁문휘 역시 빠른 속도로 강호에 자리를 잡아갔다·
그렇게 천하는 새로운 분기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북천문이 자리한 북명로는 빠르게 번성하고 있었다· 등유명의 방문 이후 북천문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금가장을 비롯한 사천성의 많은 중소 문파가 북천문과 관계를 맺길 원했다는 것이다· 금가장의 장주인 금진평은 딸 금수경과 진무원의 혼인을 추진하려 했다· 하지만 혼담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신 아들 금우영을 북천문의 제자로 들여보냈다·
그런 문파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은 금진평과 마찬가지로 진무원을 혼인 관계로 엮길 바랐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자신들의 혈육을 북천문의 제자로 들이면서 관계의 확장을 택했다·
중소문파들뿐만이 아니었다· 사천성의 일반인들 중에서 무림에 뜻을 둔 이들은 북천문에 들어오길 원했다· 하지만 북천문은 더 이상 지원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이 사천성 내에 둥지를 튼 당문과 청성파 아미파를 배려했기 때문이다· 밀야 때문에 큰 타격을 받은 세 문파도 인원의 확충이 급한 상태였다·
폐쇄적인 성향을 지닌 당문이야 어떻게든 혈족으로 빈자리를 메우려 하겠지만 청성파와 아미파는 그렇지 않았다· 북천문이 인재를 싹쓸이하면 청성파와 아미파가 타격을 입는다· 그렇기에 북천문은 두 문파를 배려한 것이다·
북천문은 그렇게 사천성에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북천문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더 많아졌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사람이 북천문에 찾아와 진무원을 만나길 청했다· 그들 대부분은 어떻게든 진무원과 연을 맺어 빌붙으려는 자들이었다·
하진월은 철저하게 쭉정이를 걸러냈다· 지금은 내실을 다질 때였지 쓸데없이 관계를 확장할 때가 아니었다·
북천문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하진월은 북명로에 은둔하고 있는 간자들의 색출에 나섰다· 이미 간자들을 감시해 정보를 얻을 만큼 얻은 후라 그의 결정엔 망설임이 없었다·
그렇게 북명로에 한바탕 피바람이 불고 지나갔다·
수많은 이가 죽었지만 북명로의 풍경엔 큰 변화가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생업을 이어가고 있었고 북천문을 찾아온 이들은 줄을 섰다· 그렇게 세상은 크게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이미 세상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법이군! 그 짧은 시간 동안 제법 단단하게 초석을 다졌는걸·”
북명로의 객잔에서 북천문을 보며 한 청년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제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은 무척이나 잘생겼다· 시원하게 뻗은 검미 아래 자리한 눈동자가 서늘한 것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의 곁에는 방립을 눌러쓴 검객이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청년의 시선이 검객을 향했다·
“어때 보이나?”
“철옹성입니다·”
“그래?”
“주위를 둘러봤지만 허점이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담장의 높이와 굴곡 전각의 배치와 조경수의 위치까지 한 치의 허점도 없습니다· 사각이 존재하지 않는 데다가 저들은 은밀히 숨어서 모든 곳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간자들이 왜 한 명도 침투하지 못했는지 이해가 되는군· 제법이야·”
“북천문을 설계한 자는 대단한 심기를 가진 자가 분명합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저 안에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역시 하진월이란 자의 작품이겠지?”
“그럴 겁니다·”
“흠! 그런 자가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 알았다면 분명 본 가에서 포섭했을 텐데· 그도 아니면 확실히 죽여 후환을 없앴거나·”
“서문혜령이 그에 대한 정보를 꽉 쥐고 있었습니다· 제 딴에는 서서히 망가뜨리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래? 하여간 계집들이란····”
청년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검객은 그런 청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청년은 포악한 짐승이었다· 감정의 기복도 심하고 제멋대로여서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뒤를 생각하지 않고 어떤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고민하고 망설여야 하는 일들을 그는 망설임 없이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
그가 이곳에 온 것도 그와 같은 잔혹한 성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검객에게 불운이라면 하필 자신이 청년을 호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 역시 짐승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렇게 검객이 생각을 하는 사이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북천문이 더욱 선명히 보였다· 수많은 전각군이 모여 있는 모습이 여간 위압스럽지 않았다· 보통 사람은 단지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심신이 위축될 터였지만 청년의 눈에는 별 다른 감흥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럼 어디 명성도 자자한 북검의 얼굴이나 보러 가볼까?”
그가 북천문을 향해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방립을 쓴 검객이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북천문의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이 청년과 검객을 발견했다· 히죽히죽 웃으며 걸어오는 청년의 모습에 무인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들어오기 위해 줄을 서는 북천문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저처럼 불량한 태도로 다가온 사람은 없었다·
무인이 손을 들었다·
“거기 젊은 형장 잠시 정지하시오·”
“누구? 나?”
청년이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자 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뉘신데 겁도 없이 북천문으로 접근하시는 거요?”
“나 북천문의 문주를 보러 왔는데·”
“그렇다면 먼저 신분을 밝히시오· 우리 문주님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오·”
“내 이름을 들으면 반드시 보고 싶어 할걸·”
청년의 광오한 말에 경비를 서고 있던 무인들의 턱이 씰룩거렸다· 평소라면 단번에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려 본때를 보여주겠지만 이상하게 청년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오?”
“모용진· 그게 내 이름이다·”
청년의 대답에 경비를 서고 있는 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 대단한 이름이라고 저리 힘을 주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청년이 한마디를 더 붙이는 순간 그의 안색이 싹 변했다·
“나는 무적세가에서 왔다·”
“지 지금 무적세가라고 했습니까?”
“그렇다·”
“맙소사! 무적세가라니·”
무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려 나왔다·
그는 모용진을 몰랐다· 하지만 무적세가는 잘 알고 있었다· 오무존의 일원인 모용율천이 주인으로 있는 문파· 그리고 현재 운중천을 장악한 가문이 바로 무적세가였다· 그곳에서 나오고 모용씨를 성으로 쓴다면 직계가 분명했다·
“정말 무적세가에서 나오신 것이 맞습니까?”
“무적수사 모용율천 대협이 나의 조부님이시고 공작신검 모용현이 바로 나의 형님이다· 나는 오늘 조부님과 형님을 대신해 사자의 자격으로 왔다·”
그의 음성이 폭풍이 되어 북천문의 정문을 휩쓸었다·
갑작스러운 거물의 등장에 북천문이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워졌다· 북천문의 누구도 모용진이 이렇게 예고도 없이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모용진은 빈객청으로 안내되었다· 주로 귀빈들이 왔을 때 사용되는 곳이었다· 빈객청에서 북천문을 내려다보는 모용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는 이런 떠들썩함이 좋았다·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같이 들어온 검객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분명 처음 자신들이 들어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소란스럽던 북천문이었다· 모용진의 예상치 못한 등장에 의표를 찔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북천문은 빠르게 안정을 찾고 있었다·
뒤늦게 모용진도 그런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표정이 굳었다·
“호! 이것 봐라·”
다른 것도 아닌 무적세가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웠다· 북천문이 무적세가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와 의미를 모를 리 없을 터· 그렇다면 응당 문주가 버선발로 달려와야 옳았다· 일반적인 반응은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조용하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검객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의미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모용진이 팔짱을 꼈다·
사방이 적막했다· 마치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듯한 고립감이 느껴졌다·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인지라 모용진의 얼굴에 약간은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모용진이 북천문에 들어온 지도 한 시진이 흘렀다· 그때까지도 누구 한 명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이것 봐라?”
모용진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적세가의 소가주로 태어나 한없이 떠받들어지며 살아온 그였다· 그가 어디서 이런 대접을 받아보았을까? 생전 처음 받아보는 푸대접이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래!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지 두고 보마·”
그가 이빨을 뿌득 갈았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세 시진이 지났을 때 모용진이 드디어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것들이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그가 의자를 집어 던졌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방 안의 기물이 부서졌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밖에 있던 시비가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 지금 무슨 일이라고 했나?”
“예?”
“너는 내가 무시를 당하는 꼴이 안보이나? 어서 네 문주를 불러오지 못하겠느냐?”
시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공도 모르는 그녀가 언제 이런 압박을 받아봤을까?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모용진의 분노는 무서웠다· 이대로 노기를 조금만 더 발산하면 연약한 시비의 심맥 따윈 갈가리 찢어지고 말 것이다·
“고 고정을···· 문주님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서····”
“그래서 못 불러오겠다는 말이냐? 어디 네년이 죽어도 그가 엉덩이를 떼지 않을지 두고 보마·”
모용진이 기세를 끌어 올리자 시비가 꺽꺽거렸다· 숨이 끊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남의 집에서 난동을 피우는 것은 그쯤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순간 진무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