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 5장 들어오는 자는 많아도 실속이 있는 자는 드물다 (2)
북천문으로 청인이 돌아온 즉시 당기문과 당미려가 곁에 붙었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청인을 회복시키기 위해 당기문 숙질은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런 두 사람의 정성이 통했는지 청인은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진무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겨울 동안 무공을 익히면서도 마음속엔 항상 청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자신을 탈출시키기 위해 혼자 남은 후 행방불명됐기 때문이다·
진무원은 그래서 은류와 흑월의 힘을 총동원해서 청인의 행방을 추적했다· 그리고 불과 얼마 전 청인이 섬서성의 비밀 뇌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결국은 그를 구해낼 수 있었다· 만일 구해내지 못했다면 천추의 한이 되었을 터였다·
“휴!”
“고생하셨습니다 문주님·”
하진월이 다가왔다· 하진월의 손에는 산더미 같은 책자가 들려 있었다·
“그게 뭡니까?”
“현재 면양에 들어와 있는 간자들의 명단입니다· 주군께서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많습니까?”
진무원의 질렸다는 표정에 하진월이 웃었다·
“이미 예상하지 않으셨습니까? 현재 북천문은 폭풍의 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문파에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으음!”
“아마 당분간 더 많은 간자들이 면양으로 들어올 겁니다·”
“그들을 그냥 지켜보실 생각입니까?”
“당분간은요·”
하진월이 당연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진무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입니까?”
“그들을 파견한 문파들의 역량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
“이해가 잘 되지 않으실 겁니다· 머리를 쓰는 자들의 영역이니까요· 하지만 이 하진월이 장담하건대 그들은 간자들을 파견함으로써 자신들의 모든 것을 오히려 저희에게 알려주는 꼴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 점은 군사만 믿겠습니다·”
하진월의 호언장담에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하진월은 그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현재의 북천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있었기에 북천문을 이만큼이나 키울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뭐가 말입니까?”
“제 곁에 있어주셔서· 덕분에 이만큼이나 올 수 있었습니다·”
“저한테 고마워하실 것 없습니다· 오히려 주군 덕에 제 웅지를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원이라는 전장에 저를 초대해 주셔서 오히려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진월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났다·
어려서부터 문(文)에 두각을 나타내고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천하를 움직일 지략이 머릿속에 있으면 무얼 하는가? 지략을 펼칠 기회 자체가 원천 봉쇄되었는데·
무공을 익힌 무인이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이 목표라면 책사의 길을 걷는 이들에겐 천하를 놓고 다투는 전장에서 지략을 겨루는 것이 일생의 목표였다·
운중천의 서문혜령 밀야의 가경의와 더불어 자신의 지략을 겨눌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진월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는 이런 기회를 준 진무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문득 진무원이 물었다·
“봄이 머지않았습니다· 운중천과 밀야가 다시 전쟁을 치를까요?”
“그들은 전쟁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이 소모되었습니다· 여기서 멈추면 그간의 전쟁이 무의미한 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부의 비난과 분열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싫어도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군요·”
“정확합니다· 그래서 그들도 골치 아플 겁니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저희 북천문을 견제해야 하니까요·”
“결국 전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다는 뜻인가요?”
“그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상황에서 섣불리 전력을 빼돌렸다가는 열세에 처할 테니까요·”
“복잡하군요·”
“복잡한 만큼 저희에겐 유리합니다· 이제부터 두고 보는 재미가 쏠쏠하실 겁니다·”
“기대되는군요·”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진월의 미소가 짙어졌다·
“알겠습니다·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것은 군사만 믿고 맡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할 일이 더 있습니까?”
“이미 충분히 하셨습니다· 당분간은 쉬셔도 좋습니다·”
“그래도 됩니까?”
“됩니다· 주군께서 휴식을 취하시든 아니면 다른 어떤 일을 하던 간에 북천문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에겐 큰 도움이 됩니다·”
진무원의 명성은 천하를 울리고 있었다· 북검(北劍)이라는 별호는 젊은 무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전술적 가치를 지닌다· 그가 북천문에서 어떤 일을 하든 간에 그의 가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그동안 건엽이의 무공이나 손봐줘야겠군요·”
“그러십시오·”
“그럼····”
진무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하진월이 그런 진무원을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었다·
밖으로 나온 진무원은 북천문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전각으로 향했다·
소웅전(小雄殿)· 곽문정 한선우 유건엽 아소 등 북천문의 미래라 할 수 있는 동량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소웅전에 들어서자 혼자서 무공을 익히고 있는 유건엽의 모습이 보였다· 해를 넘기면서 유건엽의 나이도 일곱 살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골격은 도저히 일곱 살 소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잘 발달되어 있었다· 체계적인 수련 덕분인지 유건엽은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었다·
유건엽은 진무원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연신 주먹과 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진무원은 자리에 앉아서 유건엽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휙휙!
어린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쾌한 움직임이었다· 무공을 배운 지 몇 달 되지 않았는데 유건엽은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라서 그런지 힘이 부족했다·
진무원은 유건엽의 눈에서 강해지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느꼈다· 보통 그 나이 때 소년들이 시키는 대로만 무공을 익히는 것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모습이었다·
한선우 등과 어울리면서 항시 두 눈에서 감돌던 살기도 많이 순화되었다· 아직 스스로 살기를 제어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좋아진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유건엽이 수련을 멈추고 잠시 휴식을 가졌다· 잠시 숨을 고르던 유건엽이 진무원을 발견했다·
“사부님·”
“잘 있었느냐?”
진무원이 유건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건엽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무원을 올려다봤다· 살기는 많이 가셨지만 그래도 유건엽의 눈빛은 여전히 강렬했다· 아마 유건엽의 또래에서 이만큼 강렬한 눈빛을 가진 소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 보자·”
진무원은 유건엽의 양손을 바라보았다· 유건엽은 진무원이 만들어준 수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맨들맨들하던 수갑의 표면이 거칠어지고 닳은 것이 그동안 유건엽이 얼마나 고련을 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열심히 했구나·”
유건엽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눈은 어떤 기대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제부터 너에게 심법을 알려주겠다· 하루도 빠짐없이 두 시진 동안은 반드시 심법을 익혀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물론이에요·”
“좋다! 이제 내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거라·”
“예!”
“너에게 알려주려는 심법은 내가 창안한 것이다· 이름은 벽해심공(碧海心功)이라고 한다·”
“벽해심공?”
천성적으로 살기가 짙은 유건엽을 위해 고심해 만들어낸 심공이었다· 푸른 바다처럼 도도하면서 장대한 흐름이 특징인 벽해심공을 대성하면 웅혼한 내공과 함께 강인한 부동심을 얻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유건엽은 오히려 살기를 제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진무원은 유건엽에게 구결을 알려주었다· 벽해심공에는 그가 강호를 주유하면서 얻은 깨달음이 담겨 있어 강호의 절학이라 할 만했다·
유건엽이 온정신을 집중해서 진무원의 말을 들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사부인 진무원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말이다· 그래서 그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벽해심공의 구결은 무척이나 길었다· 그래서 한 번에 외우기가 힘이 들었다· 유건엽은 네 번이나 구결을 듣고 나서야 겨우 외울 수 있었다· 진무원은 유건엽이 완벽하게 외운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구술을 멈췄다·
내친김에 진무원은 유건엽이 구결을 따라 호흡하게 했다· 진무원은 유건엽의 호흡을 바로잡아 주며 한참을 지켜봤다· 처음 몇 번만 도와주자 유건엽은 안정적으로 구결을 운용했다·
아직 내기도 형성 안 된 유건엽이었다· 당장은 아무리 벽해심공을 운용해도 내기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굳게 믿고 운공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기를 쌓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시기가 가장 중요했다· 마치 갓 구운 사기그릇처럼 깨지기 가장 쉬운 시기 그리고 망가질 가능성이 높은 시기였다· 그래서 명문대파에서는 촉망받는 제자들이 처음 운공을 시작할 때 가장 신경을 쓰게 마련이었다·
진무원도 마찬가지였다· 진무원은 유건엽의 호흡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바르게 호흡을 하는지 정신이 흐트러지지는 않았는지 살피며 혹시라도 있을 변수에 대비했다·
다행히도 유건엽은 어긋남이 없이 진무원이 알려준 호흡법대로 숨을 쉬었다· 진무원은 꼬박 두 시진 동안 유건엽이 호흡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두 시진이 지났을 때 유건엽은 녹초가 되어 널브러졌다· 진무원은 그런 유건엽에게 추궁과혈을 해주었다· 그러자 유건엽이 금세 곯아떨어졌다·
진무원은 유건엽을 침상에 누인 후 밖으로 나왔다·
“나왔군·”
소웅전을 나서자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진무원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움직이셔도 됩니까?”
“움직인 지 오래되었네· 아직 무공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해서 괴로울 뿐이야·”
대답을 하는 이는 무척이나 추레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그는 무척이나 대단한 사람이었다·
풍운번주 능군휘· 그것이 노인의 진정한 정체였다·
그동안 능군휘는 당기문에게 집중적인 치료를 받았다· 그 덕에 몸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하지만 아직도 무공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다·
당기문은 석 달 이상은 더 치료를 받아야 운공을 하는 데 지장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때까지는 꼼짝없이 안정을 취해야 했다·
“잠시 걷겠나?”
“그러지요·”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북천문의 후원을 거닐었다·
“내가 산에 있는 동안 많은 일들을 했더군· 정말 대단하네·”
능군휘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진무원을 바라봤다·
그가 산에 있는 사이 진무원의 위상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급변해 있었다· 지금 진무원이 강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예전 능군휘의 전성기보다 오히려 더 대단했다·
아홉 하늘을 오무존으로 끌어내리고 자신은 일검일제의 일원이 되었다· 강호인들은 오히려 오무존보다 진무원을 위로 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능군휘는 그런 세간의 평가가 맞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무공이 온전했어도 진무원을 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적엽진인을 쓰러뜨렸고 서문화와 현현소도 그에게 목숨을 잃었다· 진무원은 이미 능군휘의 영역을 벗어난 무인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능군휘가 진무원을 찾아온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북천문을 세상에 내보였다는 것은 곧 운중천과 밀야를 상대하겠다는 자네의 의지겠지?”
“그렇습니다·”
“휴우!”
능군휘가 나직이 한숨을 토하며 눈을 감았다· 진무원은 말없이 능군휘를 바라보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능군휘가 눈을 떴다·
“어차피 출사표를 던졌으니 이제 와서 자네를 말린다고 한들 소용없겠지· 그렇다면 이것 하나만은 명심하게·”
“경청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절대 모용율천을 우습게 보지 말게· 전에도 말했다시피 그는 아홉 하늘이라 불렸던 이들을 모조리 굴복시켰던 무인일세· 당시에도 절대의 경지를 넘어섰던 위대한 무인이 바로 그일세·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는지 추측조차 되지 않는군· 그러니 자네는 반드시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혹여 그가 나이 들었다고 지구전으로 끌고 갈 생각은 버리게· 그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던진 괴물· 육신의 나이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걸세· 그러니까 기회가 온다면 망설이지 말고 단숨에 베어버리게·”
“알겠습니다·”
“그 말을 꼭 하고 싶었네· 그리고 부족하지만 무공을 회복하는 즉시 나도 자네를 돕겠네·”
능군휘의 합류는 진무원과 북천문에게 천군만마가 합류한 거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진무원으로서는 양손을 들고 반길 일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한 가지를 확인해야 했다·
“허면 흑월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제 흑월에서 손을 떼려 하네· 재능 있는 아이에게 물려줄 걸세· 하나 걱정하지 말게· 그래도 흑월은 자네와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이어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북천문의 장로직을 맡아주십시오·”
“장로라· 좋네! 그리하겠네·”
능군휘가 진무원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