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 4장 봄에 깨어나기 위해 겨울에 잠을 잔다 (2)
세상으로의 진출이 결정되자 북천문의 무인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동안 누구보다 치열하게 담금질을 해왔던 무인들이었기에 세상에 대한 갈증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사람들은 북천문이 어디에 자리를 잡을지 궁금해했다· 사천성은 이미 당문과 아미파 청성파가 자리를 공고히 잡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북천문이 자리를 잡을 만한 곳을 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이야 필요성에 의해 북천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람의 인심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사람들은 과연 수뇌부가 어느 곳에 북천문의 터전을 마련할 것인지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가 무색하게 수뇌부에서는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적당한 장소가 나오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청성파 당문 아미파에서 제동을 건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불안감이 점차 커질 때쯤 하진월이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이주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사람들은 서둘러서 짐을 쌌다· 척박한 산골 생활이라 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모으고 보니 제법 많았다· 백룡상단에서 보낸 수십 대의 마차에 짐을 가득 실었다· 수천 명의 무인들 역시 등에 짐을 가득 지었다·
그날부터 대이주가 시작되었다· 한 번에 수천 명의 인원이 이동하면 사람들의 눈길을 끌 것이 분명하기에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으로 인원을 나눠 상단으로 위장했다·
상단으로 위장한 북천문의 무인들은 각각 다른 날 산을 내려갔다· 목적지를 아는 이는 오직 무리를 이끄는 수장뿐이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따라나섰다·
몇 날 며칠을 걸었는지 모른다·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이 많은 곳은 피했다· 도시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렇게 무작정 걷다 보니 눈앞에 커다란 도시가 나타났다·
“이곳은?”
“면양(綿陽)이다· 이곳이 우리의 목적지다·”
일행들을 이끌고 온 조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면양?”
무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면양은 사천성 동쪽에 있는 유서 깊은 도시였다·
그 옛날 제갈공명은 이곳에서 천하삼분의 계를 내놨고 유비가 촉에 첫발을 디딘 곳이기도 했다· 그만큼 오랜 역사와 뜻 깊은 의의를 지닌 곳이 바로 면양이었다·
조장은 면양 북쪽에 있는 부락산(富樂山)으로 일행을 데려갔다· 면양 제일 산이라고도 불리는 부락산 아래에 거대한 장원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장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어느 대부호가 부락산 인근의 땅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시세보다 훨씬 더 높은 값을 부르는 부호에게 땅 주인들은 망설이지 않고 땅을 넘겼다· 그렇게 일대의 모든 토지가 이름 모를 부호의 소유가 되었다·
일대의 땅을 모두 사들인 부호는 즉시 거대한 장원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그 규모가 얼마나 엄청난지 담장의 길이만 사방으로 십여 리가 넘었다·
삼 장이 넘는 높은 담장 안에 둘러싸인 장원 안에는 수십 채의 전각이 들어섰다· 엄청난 대공사에 면양에 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인부로 고용됐다· 그 때문에 면양은 때아닌 호황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때까지도 장원의 주인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조정의 고관대작이 낙향하기 위해 지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고 어떤 거대 상단이 들어선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면양의 모든 사람이 장원의 주인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장원은 한 달 전에 완공됐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장원의 주인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의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어만 갔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갑자기 장원에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상단으로 위장한 북천문의 무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조장이 수하들을 이끌고 장원으로 다가갔다· 장원 앞에 경계를 서고 있는 무인들이 보였다· 순간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경계를 서고 있는 무인들은 그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보다 먼저 산을 내려간 북천문의 무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경계를 서는 무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가 말을 걸어왔다·
“왔는가? 고생했네·”
“수고하네· 우리가 많이 늦었나 보군·”
“아닐세! 아직 도착 안 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네· 딱 적당할 때 왔어· 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게·”
“안은 어떤가?”
“직접 확인해 보게· 흐흐!”
“알겠네·”
조장이 대답과 함께 수하들을 이끌고 장원의 정문을 넘어섰다·
“아!”
“이 이곳이 북천문?”
순간 그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거대한 연무장이 펼쳐져 있었다· 족히 수천 명이 연무를 해도 될 만큼 너른 연무장 바닥에는 청석이 깔려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수십 채의 커다란 전각· 그리고 잘 정돈된 가산과 주변 풍경들· 척박한 서부고원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어서 오게·”
탄성을 내뱉는 그들을 익숙한 얼굴이 맞이했다·
이제 오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얼굴 가득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상대경· 본래는 마도광을 따라 마적질을 하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성격이 진중하고 침착해 다혈질의 마도광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많이 했었다·
하진월은 상대경에게 새롭게 출범하는 북천문의 총관직을 맡겼다· 상대경은 석 달 전부터 이곳에 머물면서 북천문의 무인들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상대경과 친분이 있던 조장이 반갑게 그를 불렀다·
“상 형님·”
“이젠 총관이라고 부르게·”
“총관직을 수락하신 겁니까? 그렇게도 안 하겠다고 버티시더니·”
“할 사람이 없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래도 잘 어울려 보이십니다·”
“고맙네· 먼 길을 왔을 텐데 어서 들어가서 쉬게·”
“근데 어디로 가면 됩니까?”
“나를 따라오게·”
상대경이 미소를 지으며 앞장섰다· 조장과 수하들이 그 뒤를 따랐다·
“우와! 엄청나군요· 세상에 언제 이런 장원을 지었데요?”
“군사께서 이 년 전부터 준비하시다가 일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지었다네·”
“그 양반 정말 엄청나군요· 서부고원에서의 일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이런 대역사를 감쪽같이 해내다니요·”
“그러니까 우리의 군사가 아니겠는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전각들로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비밀이 감춰져 있다네·”
“비밀?”
상대경은 대답 대신 웃음을 흘렸다·
이곳에 배치된 전각들은 오행천무진(五行天霧陣)이라는 상고의 절진의 묘리에 따라 배치되어 있었다· 평화 시에는 그저 평범한 전각에 불과하지만 적의 침입 시에는 그 모든 것이 죽음의 함정으로 돌변한다·
그 모든 설계를 하진월이 했다· 하진월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이곳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북천문의 수뇌부 몇 명에 불과했다· 상대경은 진실을 아는 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여기가 자네들이 머물 곳일세· 이곳에 머물고 있으면 다른 이들도 합류할 것이야·”
상대경이 안내한 곳은 커다란 연무장을 둘러싸고 있는 장방형 형태의 건물들이었다· 방 하나에 다섯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수십 개가 넘었다·
“우와! 방 넓은 것 좀 봐· 이제는 끼어서 자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러게! 침상 푹신한 것 좀 봐요· 완전 좋아요·”
수하들이 제일 먼저 환호성을 내질렀다·
서부고원에서는 늘 잠잘 곳이 부족했다· 좁은 곳에 많은 이들이 모여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환경이 열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이곳은 방도 큰 데다가 머무는 인원도 적어 한결 쾌적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곳· 그리고 지켜야 할 곳·”
무인들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장원에 커다란 현판이 걸리는 순간 면양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북천문(北天門)·
오래전에 멸문했다고 알려진 북천문이 설마 면양에 떡하니 현판을 걸고 부활할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대 사건이었다·
북천문의 부활에 사람들은 반가움보다 두려움을 나타냈다· 사천무림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청성파와 당문 아미파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사천의 터줏대감으로 모든 것을 장악해 온 세 문파가 북천문이 안마당에 들어오는 것을 쉽게 용납할 리 없었다· 최악에는 이곳 면양에서 무림 문파 간의 큰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우려했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현판이 걸리는 날 수많은 무림 명숙이 북천문을 찾았다· 당문과 아미 청성파에서 축하 사절단을 보낸 것이다·
사천무림은 고인 우물과 같아서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제까지 사천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이었다· 그런데 북천문의 등장은 그런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날려 버리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북천문의 문이 활짝 열렸다·
당문 청성파 아미파의 무인들뿐 아니라 면양에서 사는 사람들의 방문까지 받아들였다· 그 때문에 거대한 연무장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은 연무장 중앙에 자리한 높은 단상을 바라보았다· 단상 위에는 당문 청성파 아미파에서 파견한 장로들을 비롯해 북천문의 수뇌부가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수군거렸다·
“설마 북천문이 면양에 문을 열다니· 정말 놀랄 노 자군·”
“누가 아니라는가? 거기다가 사천무림의 터줏대감들이 저렇게 인정을 해주다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군·”
“저리 친한 것을 보면 예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 같기도 하고·”
“그럴 리가 있는가? 저들이 얼마나 배타적인 사람들인데· 아마 진 문주의 위세가 두려워 사람들을 파견한 것일 테지·”
“그런가?”
“말이 나와서 그렇지 지금 진 문주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지 않는가? 아홉 하늘 중 세 명이나 그의 손에 죽었으니 누가 있어 감히 그와 무력을 견주겠는가?”
“하기사····”
“어쨌거나 이로서 강호의 지각이 변동하겠군· 설마 진 문주가 북천문을 이곳 사천성에 세울 줄이야· 거기다 인원들 보게· 족히 수천이 넘지 않는가? 이미 오래전부터 북천문을 재건하고 있었단 뜻이지·”
몇몇 식견 있는 자들은 나름의 의견을 내놓았다· 의견은 분분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제 북천문이 사천무림의 핵이 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북천문이 사천성에 자리를 잡은 것이 화가 될지 복이 될지는 정말 모르겠군·”
“그러게 말일세· 자칫하면 사천성 전체가 전화에 휩쓸릴 수도 있음이니·”
“일단은 진 문주와 북천문을 믿을 수밖에· 자신이 있으니 이렇게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의 말속에는 우려와 기대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만일 북천문이 이곳에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되면 면양은 강호 최고의 명문대파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북천문이 자리를 잡음으로써 수많은 이가 유입될 것이고 그들을 따라서 엄청난 양의 물자들이 들어올 것이다· 그렇게 경제는 윤택해질 것이고 면양에 사는 백성들도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때 갑자기 단상 쪽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단상에 앉아 있던 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누군가 단상 위로 오르고 있었다·
“진 문주다·”
“와아! 북검이다·”
곳곳에서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진무원의 얼굴을 제대로 아는 사람 한 명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그가 진무원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단상에 오른 진무원이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구름처럼 몰린 인파를 바라보았다· 우려와 기대가 섞인 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엄청난 중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진무원은 그 모든 압박감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북천문이 새롭게 출범하는 자리였다· 문주인 그가 흔들리면 제자들도 흔들린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 되어야 했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하진월이 황철이 그리고 북천문의 수많은 무인이 오직 그의 입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진무원은 그들의 부름에 답할 의무가 있었다·
“하늘과 만천하에 고하니 나 진무원은 이제 북천문을 다시 세상에 열 것이다·”
그의 외침이 태풍이 되어 장내를 휩쓸었다·
“우와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