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 7장 하늘의 그물은 생각보다 촘촘하다 (1)
사령(邪令)·
사부인 소금향의 충복이자 한때는 은한설을 소주라고 불렀던 무인이다· 은한설은 사령을 믿었지만 그는 소금향의 명을 받고 자신의 광기를 폭발시키려 했다·
사령은 소금향의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결코 외부에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는 사령이 밝은 대낮에 싸우는 것은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사령의 특기는 은밀한 침투와 암살이었다· 야밤의 싸움은 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지만 백주 대낮에 싸우는 것은 그의 능력을 반감시킬 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령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대낮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그런 그가 백주 대낮에 다수의 무인들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만큼 위기에 몰렸다는 증거였다·
은한설은 말없이 사령을 바라보았다·
비록 실력을 십분 발휘할 수 없었지만 사령의 무위는 가공했다· 하지만 그는 무척이나 지쳐 있었고 전신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바로 사령이었다·
석가장의 무인들 또한 그런 사실을 눈치채고 이제는 섣불리 사령을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포위망을 좁힌 채 그가 더 지치길 기다렸다·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사령의 약점을 파악한 것이다·
“헉헉!”
사령의 입술을 비집고 단내와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이젠 그도 한계에 달한 것이다·
‘제기랄!’
표정 없던 사령의 얼굴에 암담함이 떠올랐다· 그만큼 상황은 최악이었다· 연이은 싸움으로 인해 그의 공력은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대로는 불과 일각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마지막 수를 써야 하는가?’
사령의 눈이 빛났다·
마지막 수는 바로 동귀어진의 수법이었다· 스스로를 폭사함으로써 이들을 모조리 저승길로 데려가는 것이다·
목숨에 미련 따윈 없었다· 애당초 자신의 목숨에 그리 애정도 없기 때문에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그가 내공을 폭주시키려 할 때였다· 갑자기 은백색의 인영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은백색의 인영은 순식간에 석가장의 무인들을 헤집고 들어와 사령의 앞에 도달했다·
사령이 눈을 크게 치뜨는 순간 은백색 인영이 그의 마혈을 제압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대응할 틈이 없었다· 사령은 순식간에 정신을 잃었고 은백색의 인영이 그를 어깨에 가볍게 짊어졌다·
“웬 년이냐?”
석가장의 무인들이 갑작스럽게 난입한 은백색 인영을 향해 노성을 터뜨렸다·
은백색 인영은 두꺼운 천으로 얼굴을 칭칭 동여매고 있어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굴곡진 몸매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으로 미뤄보아 여인이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은백색 인영은 대답 대신 몸을 훌쩍 날렸다· 석가장 무인들이 급히 그녀를 막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몸을 몇 번 흔드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석가장 무인들이 뒤쫓으려 했을 때는 이미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가공할 경공술이었다·
“도대체····”
졸지에 닭 쫓던 개 꼴이 된 석가장의 무인들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하느냐? 어서 저것들을 쫓지 않고·”
뒤늦게 우두머리 무인이 사태를 깨닫고 추적에 나섰다·
“으음!”
나직한 신음성과 함께 사령이 정신을 차렸다· 그가 눈을 뜬 후 제일 먼저 본 광경은 칠흑처럼 어두운 밤하늘이었다·
‘내가 왜?’
사령은 눈을 끔뻑거리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 애를 썼다· 석가장 무인들에게 포위되어 동귀어진 하려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개입한 은백색의 인영까지도·
사령이 급히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한쪽에 모닥불을 피운 채 식사를 하고 있는 남녀와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사령은 자신이 본 밤하늘이 사실은 동굴의 천장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누구냐?”
사령이 공력을 끌어 올리며 그들을 경계했다·
다행히 공력의 운용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어찌 된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만신창이가 되다시피 했던 육신의 상처도 많이 나아 있었다· 하지만 사령은 그런 사실까지는 깨닫지 못하고 낯선 남녀를 경계했다·
그때 여인이 사령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느낌·
유난히도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푸른 기가 감도는 머리카락· 간간히 은광이 스쳐 가는 검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사령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설마?”
“오랜만이야 사령·”
여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사령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소··· 주십니까?”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네·”
사령을 보고 있는 여인은 바로 은한설이었다· 그녀를 확인하는 순간 사령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소주!”
사령이 제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은한설은 그런 사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령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살아계셨습니까?”
“운이 좋았어·”
은한설은 담담히 대답했지만 사령은 그렇게 태연할 수 없었다· 그의 주먹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그동안 어디 계셨던 겁니까?”
“그것까지 사령에게 말해줄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소주!”
“이제 난 밀야의 사람도 아니고 사령의 소주도 아니야· 삼 년 전 그날 이후·”
“그건 제 뜻이 아니었습니다·”
“사부님의 뜻이었겠지· 하나 그렇다고 해도 사령이 나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죄··· 송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만일 그때로 돌아가 다시 저에게 선택권이 주어져도 주군의 말을 따랐을 테니까요·”
“알고 있어· 그래서 나도 사령을 원망하지 않아· 사령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이젠 어떤 감정의 찌꺼기도 남아 있지 않아·”
“그러면 저를 왜 구하셨습니까? 아무런 감정의 찌꺼기도 남아 있지 않다면 저를 구하지 않으셨어야 하지 않습니까?”
“궁금했어· 사령이 왜 석가장의 무인들에게 쫓기는지· 사부는 어디에 있는지·”
은한설은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솔직히 그녀의 심정은 매우 복잡했다· 사령까지야 어떻게 넘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부 소금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비록 그녀를 이용하려 했지만 그래도 키워주고 무공을 가르쳐 준 사부였다· 소금향이 없었다면 지금의 그녀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지금도 사령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사부를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마음이 복잡하기만 했다·
사령이 그런 은한설의 속내를 모른 채 대답을 했다·
“주군의 명을 받아 석가장의 장주인 석주화를 암살했습니다·”
“석가장의 장주를 왜?”
“석가장에서 부현 지부에 대규모로 물자를 지원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기 때문입니다· 부현 지부에 물자가 지원되는 만큼 밀야의 무인들이 죽어나갈 것이기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석가장의 추혼대가 나선 거군·”
“처음엔 놈들을 우습게 봤습니다· 그래서 놀아줄 셈으로 적당히 상대했는데 그만····”
“늑대가 사냥개 무리의 역습에 당한 모양이네·”
“그렇습니다·”
“사부님은?”
“먼저 감천으로 가셨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도착하셨을 겁니다·”
“그래?”
은한설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괜스레 마음이 복잡했다·
그때 갑자기 사령이 은한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주! 밀야로 돌아오십시오· 주군께서도 소주를 흔쾌히 받아들일 겁니다·”
“사령·”
“한 번의 실수라고 생각하십시오· 아시잖습니까? 주군께서 소주를 얼마나 끔찍이 생각하는지· 지금 밀야는 존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소주의 힘이 필요합니다·”
사령의 목소리에는 절실함이 가득했다· 할 수만 있다면 힘으로 은한설을 제압해서라도 밀야로 데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령····”
“부디 밀야를 생각하셔서····”
“나는 돌아가지 않아· 내가 사령을 구한 것은 옛정을 생각해서지 밀야로 돌아가기 위함이 아니야·”
“소주! 어째서?”
“밀야보다 더욱 소중한 사람이 있어·”
“설마?”
“그래! 나에겐 그가 밀야보다 훨씬 더 소중해·”
은한설의 대답에 사령은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 ☆
황보중걸은 비칠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곁에는 현무대의 무인 서너 명이 같이 걷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에서는 진한 주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휴전을 틈타 진탕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신이 피폐해져 있었다·
“하여간 개 같은 세상이야· 제기랄!”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공을 세워 척마대에 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던 황보중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얼마나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지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곳은 지옥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이곳에 강호의 낭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 일단 들어오면 사람들은 점차 짐승이 되어간다·
인간성은 점점 메말라가고 광기에 서서히 침습당하다 보면 어느새 짐승이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된다· 그때는 너무 늦어서 자신의 몸에 배어버린 피비린내를 맡게 된다· 그 향은 너무 지독해서 아무리 목욕을 해도 지워지지 않고 술을 마셔도 잊히지가 않는다·
그렇게 이곳에서 인간은 광기에 물든 짐승이 되어갔다· 황보중걸도 마찬가지였다· 현무대가 전쟁에 본격적으로 투입되면서 그 역시 피에 미쳐 가고 있었다·
사소한 일에도 광분을 하고 동료들끼리 주먹질을 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렇다 보니 현무대 내부의 분위기도 최악이었다·
“씨발! 개 같은 년· 지가 전쟁에 나가지 않으니까 좆도 모르지·”
황보중걸의 입에서 평소 상상할 수도 없었던 욕이 쏟아져 나왔다· 같이 술을 마신 동료들이 그의 욕설에 동조했다·
“썅년 직접 칼을 들고 싸워보라지· 뭐 작전을 따르지 않으면 군율에 의해 처벌하겠다고? 여기가 군이냐? 지가 군사면 다야? 엉?!”
“누가 아니라는가? 하여간 먹물 좀 먹었다는 것들은 세상 물정을 몰라서 문제야·”
그들이 하나같이 욕을 하는 대상은 바로 서문혜령이었다·
이제까지 안전한 후방에 있다가 서문혜령의 명령에 의해 최전방에 투입되어 지옥을 경험했다· 그 후 그들은 늘 서문혜령을 욕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들은 술을 진탕 마시고 서문혜령을 욕하는 것으로 화를 풀었다· 이렇게라도 하고 나면 그나마 속이 후련해졌다·
“으하하하!”
기분이 좋아진 황보중걸이 허공을 향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같이 있던 동료들도 함께 웃었다·
한바탕 웃음이 지나간 후 그들은 다시 부현 지부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냐?”
게슴츠레한 눈으로 황보중걸이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얼굴이 흐릿했지만 체형으로 미뤄보아 남자가 분명했다·
“흐흐!”
어둠속에서 남자가 씨익 웃었다· 순간 황보중걸 등은 전신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황보중걸이 목소리를 높였다·
“웬 놈이냐고 물었다· 감히 우리가 누군지 알고 길을 막는 것이냐?”
“흐흐! 그것까지 내가 알아야 하나? 어차피 죽을 놈들인데·”
“무슨?”
순간 남자가 황보중걸 등을 덮쳐 왔다· 마치 박쥐처럼 옷깃을 펄럭이며 달려드는 남자의 모습에 황보중걸이 기겁했다·
“미친!”
황보중걸은 급히 뒤로 물러나며 연거푸 세 번의 주먹질을 날렸다· 황보세가 비전의 권공인 천왕권(天王拳)의 구명절초인 천왕강림(天王降臨)의 수법이었다·
터터텅!
황보중걸의 주먹이 연이어 남자의 몸을 두들겼다· 하지만 그의 주먹에 담긴 경력은 남자의 몸에 닿기 무섭게 사라졌다·
황보중걸이 눈을 크게 치떴다·
“흐흐!”
순간 남자의 수도에 핏빛 기운이 맺혔다· 남자는 핏빛 기운이 맺힌 수도로 황보중걸의 목을 후려쳤다·
서걱!
마치 날카로운 칼에 베인 것처럼 황보중걸의 머리가 몸통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중걸!”
“젠장! 습격이다!”
황보중걸의 동료들이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반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남자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남자의 몸에서 핏빛 기운이 칼날처럼 쏘아져 갔다·
“크헉!”
순식간에 동료들이 목숨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황보중걸과 무인들을 죽인 남자의 얼굴에는 짜증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빌어먹을! 모용율천·”
그는 바로 조운경이었다· 조운경이 황보중걸을 비롯해 남자들의 시신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으로 피가 흡수되었다· 그제야 조운경의 얼굴에 어려 있던 짜증이 조금은 가셨다·
“자유 좀 누리려고 했더니 이렇게 족쇄를 채워놓다니·”
그가 익힌 십자혈마공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다· 바로 여인들의 피를 주기적으로 공급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혈마단을 복용한 여인들의 피로· 남자들의 피로는 약간의 갈증을 덜어주는 것밖에 안 됐다·
혈마단을 먹은 여인들의 피를 주기적으로 공급받으려면 결국 모용율천과 무적세가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크으! 제기랄!”
조운경의 눈에 어린 혈광이 더욱 짙어져만 갔다·
이젠 돌아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