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 4장 세상에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운중천과 밀야의 전쟁이 한참 최고조에 달한 그 시간 감천을 향해 다가가는 행렬이 있었다·
커다란 사두마차와 그것을 호위하는 수십 명의 무인·
화려하기 그지없는 사두마차의 모습도 눈길을 끌었지만 그보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호위를 하는 무인들이었다·
무인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를 발산하고 있었다· 마치 예기가 흐르는 수십 개의 검이 한곳에 뭉친 듯 보였다·
그들이 옮길 때마다 푸석한 흙이 부서져 바람에 흩날렸다· 수십 명의 무인이 같이 이동하면 대화라도 있을 법한데 누구 한 명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살벌한 기세를 풍기며 진행하는 침묵의 진군· 그 중심에 사두마차가 있었다·
사두마차의 마부석에는 적의를 입은 중년인이 앉아 말을 몰고 있었다· 깔끔한 수염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칼날을 오려놓은 것처럼 날카롭게 뻗은 눈썹과 그 아래 차갑게 빛나는 눈동자까지· 중년인은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냉정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문득 중년인이 고개를 들어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수십 명의 무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수십 명의 무인들이 단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똑같이 행동하는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중년인이 고개를 돌리자 수십 명의 무인들 역시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단합이 잘되는 조직이라도 이렇게 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무인들은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었다·
그것은 그들이 한 가지 무공을 익혔기 때문이다· 일심격체신공(一心隔體神功)이 바로 그것이었다·
일심격체신공을 익힌 자끼리는 심령이 연결된다· 의식의 일정 부분을 서로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서로 동등하게 공유하는 것이 아닌 가장 심령이 강한 자에게 귀속이 된다는 것이다·
심령이 강한 자라면 같은 일심격체신공을 익힌 자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마부석에 앉은 중년인처럼 말이다·
중년인의 눈가에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감히!”
저 멀리 무언가가 그의 심령을 자극하고 있었다· 너무 멀어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는지 모르지만 여기까지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지독한 혈향에 머리가 다 지끈지끈해질 정도였다·
“누구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 멀리서 한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처럼 붉은 적의와 죽립을 쓰고 있는 남자였다· 혈향의 근원에 그가 있었다·
“흐흐!”
죽립을 쓴 남자가 살기가 거친 웃음을 흘렸다· 살기가 담긴 그의 웃음소리는 중년인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중년인이 마부석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웬 놈이냐? 감히 누구 앞인지 알고 길을 막는 것이냐?”
“밀야의 야주겠지· 아니던가?”
순간 중년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이름은 노군명 밀야의 야주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자였다· 수십 명의 무인들은 바로 그의 수하들이었다·
“네놈!”
“흐흐!”
남자가 쓰고 있던 죽립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이제껏 감춰져 있던 본모습이 드러났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듯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유난히 붉은 입술이 인상적인 남자는 바로 조운경이었다·
조운경의 눈동자는 붉게 빛나고 있었다· 단순히 실핏줄이 터져 충혈된 것이 아닌 검은자 전체가 붉게 변해 있는 것이다·
삼 년 전 진무원에게 치명상을 입은 후 그는 겨우 숨만 붙은 채 명을 이어왔다· 모용율천은 그런 조운경에게 여인들의 생혈을 끝없이 흡수시켰다·
십자혈마공은 피로 성취를 높이는 마공· 흡수하는 피가 많아질수록 상처를 회복하는 속도 또한 빨라진다· 하지만 상처가 회복되는 동안 조운경은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살아야 했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상념들이 떠오르는데 몸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의식이 육신의 감옥에 갇힌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미쳐서 이성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운경은 달랐다·
그는 정신만 온전한 상황에서도 분노를 불태웠다· 진무원을 향한 분노였다·
‘가만두지 않겠다 무원· 반드시 네놈을 뼈째 갈아 마시겠다·’
그렇게 원한을 불태우며 삼 년을 견뎠다· 하지만 삼 년 만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진무원은 이미 죽은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분노를 풀 길이 없는 조운경은 어젯밤 미쳐 날뛰었다· 그사이 그에게 죽은 이의 수만 수백 명이 넘었다· 만일 서문화가 나서지 않았다면 희생자는 더욱 늘어났을 것이다·
십자혈마공을 대성한 그는 분명 강했다· 하지만 야주를 죽일 만큼은 아니었다·
야주를 죽이기 위해서는 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특단의 대책이 동원됐다· 더욱 많은 여인들의 피가 투여된 것이다· 보통의 여인들이 아니었다· 무적세가에서 비밀리에 제조한 약을 장기간 복용한 여인들이었다·
혈마단(血魔丹)이라는 이름의 약은 인간의 정신을 황폐화시키는 대신 인간의 잠력을 폭발시킨다· 하지만 직접 복용하면 주화입마에 걸릴 확률이 높기에 무적세가에서도 거의 사용하는 일이 없었다·
그 때문에 관대승은 혈마단을 조운경에게 직접 복용시키는 것보다 여인들에게 일단 복용시킨 뒤 그 정혈을 추출하는 방식으로 조운경에게 복용시켰다·
그렇게 혈마단을 복용한 조운경의 무력은 예전에 비할 수 없이 상승한 상태였다· 몸은 가볍고 모든 신경은 활짝 열렸다· 기분 같아서는 단순히 밀야의 야주만이 아니라 모용율천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운경의 몸에서는 붉은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 조운경의 모습에 노군명이 미간을 찌푸렸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의 피부를 자극하는 살벌한 예기· 이 정도의 기운은 밀야의 내로라하는 고수인 그조차도 쉽게 접해보지 못한 수준이었다·
“어디 밀야의 야주가 어떤 면상을 하고 있는지 볼까?”
“네놈 혼자만으로 가능할 듯싶으냐?”
“흐흐! 누가 나 혼자라고 말했나?”
“뭐?”
조운경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서 십여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조운경과 마찬가지로 붉은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놈!”
노군명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떠오르는 순간 조운경이 손으로 그를 가리켰다·
순간 사내들이 노군명과 수하들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겨우 그 정도로 우리를 뚫을 수 있을 듯싶으냐?”
노군명의 노성과 함께 수하들이 움직였다· 심령 감응으로 한 몸처럼 움직이는 수하들은 인의 장벽을 쌓은 채 사내들을 막았다·
츄앙!
어느새 그들의 손에는 검과 도 같은 무기가 들려 있었다·
수십 명의 무인들이 한마음으로 펼치는 무공이었다·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그들 앞에 은은한 막이 형성됐다· 수십 명의 내공이 일체화되어 강기의 막을 만들어낸 것이다·
절대고수의 반탄강기 못지않은 강기의 막을 만들어내자 노군명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콰앙!
갑자기 뇌성과 함께 폭풍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무슨?”
강기의 막은 파괴되었고 그의 수하들 대여섯 명이 바닥에 쓰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몸은 고깃덩이처럼 짓이겨져 있었다·
쾅!
다시 한 번 폭음이 울려 퍼지고 그의 수하들이 다시 쓰러졌다· 폭음의 실체를 확인한 노군명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미친!”
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조운경의 명령을 받은 사내가 그의 수하들 사이로 몸을 던진다· 방어를 도외시한 육탄 돌격이었다· 그의 몸 위로 수하들의 도검이 쏟아졌다·
육체가 난도분시되는 그 순간 사내의 몸이 굉음과 함께 폭발을 일으켰다· 그의 살점과 뼈가 파편이 되어 수하들의 몸에 꽂혔다·
“인간 벽력탄인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살아 있는 사람을 벽력탄 대용으로 쓰고 있었다·
“크흐흐! 그래 그렇게 하는 거다·”
조운경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사내들은 애초부터 자폭용으로 키워진 존재였다· 특별한 방법으로 키워진 그들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이성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명령에 따라 기꺼이 자신의 몸을 터뜨리는 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였다·
사내들의 자살 공격에 감정이 거의 없던 노군명의 수하들이 동요를 일으켰다· 그들이 익힌 일심격체신공은 그야말로 완벽한 방어 기공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내들의 자폭 공격에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만큼 사내들의 자폭 공격은 무서웠다·
두려움을 느끼자 몸이 굳었고 몸이 굳자 진용에 허점이 생겼다· 사내들은 그곳으로 몸을 날려 자폭을 했다·
“이익!”
악다문 노군명의 잇몸 새로 억눌린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수하들이 벌써 삼분지 이 이상 죽었다· 방어선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무너진 방어 사이로 조운경이 쇄도하고 있었다· 그의 뒤를 아직 살아 있는 사내들이 따르고 있었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위협이 전신을 엄습했다·
‘위험하다·’
밀야에서 은밀히 준비한 것 이상으로 무적세가는 많은 것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하긴 강호를 은밀히 지배해 온 세월이 이백 년이 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노군명이 허리에 차고 있던 도를 꺼내 들었다·
귀문구류도(鬼門九流刀) 일명 악마의 도법이라 불리는 극악한 무공이었다·
끼이이이!
삼초식인 청마귀호(靑魔鬼號)의 초식이 귀곡성과 함께 펼쳐졌다· 순간 무지갯빛 강기가 조운경을 덮쳤다· 순간 조운경의 모공에서 핏빛 운무가 발산됐다·
쿠콰가각!
강기와 운무가 부딪치며 뼈가 갈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막대한 압력이 조운경의 전신을 압박했다·
근육이 제멋대로 떨리고 뼈마디가 삐걱거렸다· 그래도 조운경은 웃었다·
몸 안에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십자혈마공을 처음 익혔을 때와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힘이· 마치 몸 안에 활화산이 터진 듯했다·
“흐흐흐!”
그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힘에 취했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대신 모든 것을 죽이고 싶다는 파괴의 욕구가 그를 지배했다· 그는 파괴의 욕구에 자신의 몸을 내맡겼다·
쉬익!
무지갯빛 도강이 어린 노군명의 도가 조운경의 목젖을 노렸다· 조운경은 노군명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손을 쭈욱 뻗었다·
“미친!”
노군명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의 도강을 맨손으로 감당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공력을 더욱 끌어 올렸다·
“건방진 손모가지를 단숨에 잘라주마·”
“흐흐!”
하지만 그의 호언장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조운경이 붉은 운무에 휩싸인 손으로 그의 도를 덥석 잡았기 때문이다·
노군명이 눈을 크게 치떴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적어도 그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도를 빼려고 했지만 강철 집게에 잡힌 것처럼 꼼짝을 하지 않았다· 마치 바위 사이에 검이 낀 것 같았다·
“야주는 내 거야· 아주 잘근잘근 씹어 먹어주지· 흐흐!”
“놈!”
“언제까지 그 마차 안에 처박혀 있을 거지? 야주·”
조운경의 시선이 화려한 사두마차로 향했다·
노군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있는 이상 절대 야주께는 가지 못한다·”
“그건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내가 결정하는 거지·”
조운경이 히죽 웃었다·
노군명이 그런 조운경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그의 주먹도 조운경의 손에 잡혔다·
우두둑!
“크윽!”
가공할 힘에 그의 주먹이 우그러들었다· 노군명은 내공을 이용해서 버티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흐흐흐!”
“끄으!”
조운경의 몸에서 흘러나온 붉은 운무가 그의 주먹을 집어삼켰다· 마치 수천만 마리의 개미가 갉아먹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손가락이 사라지고 이어 손목마저 뜯겨 나갔다·
“으아악!”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노군명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조운경 그런 노군명의 머리에 주먹을 날렸다·
퍼석!
노군명의 머리가 터져 나가며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조운경의 얼굴에도 피와 회백색 뇌수가 튀었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비척거리다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피를 뒤집어쓴 채 조운경은 히죽 웃었다·
“흐흐!”
그가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이제 그를 막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어디에 숨을 거냐?”
그가 마차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핏빛 운무가 일어나 마차를 덮쳐 갔다·
콰앙!
굉음과 함께 마차가 부서져 나갔다·
순간 조운경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부서진 나무만 있을 뿐 사람의 흔적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큿! 그새 도주한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가?”
조운경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조운경은 후자라고 생각했다·
어디에서 정보가 누수되었는지 모르지만 서문화가 심혈을 기울여 꾸민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원래대로라면 이대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 싫었다· 그에겐 삼 년 만의 외출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잠시간의 자유를 즐겨볼까? 흐흐!”
아직도 사내들과 노군명의 수하들이 싸우고 있었다· 조운경이 그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잠시 후 그가 떠났을 때 살아남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