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 3장 혼돈의 시대, 모두가 진흙탕에 발을 딛고 있다 (1)
서문화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의 앞에는 각진 턱에 호목(虎目)을 한 인상적인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제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무척이나 강한 무력의 소유자였지만 감히 서문화에 비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남자는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니까 탕마군의 꼬마 하나가 도주했단 말이군· 그것도 무적세가 기환대(奇幻隊)의 추적을 뿌리치고·”
“죄송합니다·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변수?”
서문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기환대주 강위산이었다·
기환대는 무적세가에서 특별한 물건을 호송하거나 주요 인사들을 보호할 때 주로 이용하는 조직이었다· 개개인이 일류 이상의 고수들로 이뤄져 있고 각 조장은 절정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기환대주인 강위산의 이름은 강호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만큼 은밀하게 활동했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일이 극히 적었다·
강위산이 고갯짓을 하자 한쪽에 서 있던 남자들이 밖에서 서너 구의 시신을 들고 왔다·
“이게 뭔가?”
“탕마군의 꼬마를 잡으러 움직였던 사조의 무인들입니다· 꼬마를 잡기 직전 정체불명의 무인에게 습격을 당해 모조리 절명했습니다·”
“정체불명의 무인?”
“시신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강위산의 말에 서문화가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자세히 살폈다· 순간 서문화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시신의 절단된 면에서 강한 예기가 느껴졌다·
“이건?”
“저희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수의 솜씨입니다·”
“죽은 지 얼마나 됐나?”
“두 시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상흔에서 예기가 느껴집니다·”
“검인가?”
서문화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비록 귀제갈이라는 별호로 더 많이 알려졌지만 그 역시 절대의 경지를 넘어선 무인이었다· 상처만 봐도 무기의 종류를 알 수 있었다·
“검이라· 적엽진인과 비사원 정도만이 이런 검공을 사용할 수 있을 터· 그들이 죽은 지금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룬 검객이 존재했던가?”
문득 그의 눈이 빛났다· 가능성이 있는 자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살천랑·”
무당산에서 적엽진인을 죽인 자· 그 역시 검을 쓴다고 했다·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정체불명의 검객· 적엽진인을 죽인 그의 검술이라면 능히 이 정도의 흔적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강위산의 눈이 빛났다·
“살천랑이라면 적엽진인을 죽인····”
“지금으로서는 그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군·”
“살천랑이라니· 그가 왜 이들을 죽였을까요?”
서문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도 마땅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살천랑이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진 그의 짐작일 뿐이었다·
서문화의 시선이 강위산을 향했다·
“그는?”
“탕마군 꼬마가 도주한 직후 옮겼습니다·”
“안전한가?”
“운 좋게도 운공이 절정을 지난 후라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서문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운경은 삼 년 전 엄청난 중상을 입었다· 십자혈마공으로도 치유하기 힘들만큼의 상처를 입은 그를 살리기 위해 무적세가와 서문화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
수많은 여인을 납치해 와 그녀들의 생혈을 공급했다· 그렇게 조운경을 살리기 위해 죽어간 여인들의 수만 수천 명이 넘어갔다· 하지만 워낙 은밀하게 이뤄지고 조직적으로 은폐되었기에 중원인들 중 누구도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만큼 큰 희생을 치르고 회복시킨 조운경이었다· 이제 그가 깨어날 일이 멀지 않았다· 그가 깨어나면 활용도는 무궁무진했다· 모용율천은 진무원에게 죽은 혼마 대신 조운경을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 첫 번째 임무가 바로 밀야의 야주를 암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근까지 여인들의 생혈을 듬뿍 공급했는데 하마터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탕마군의 꼬마 때문에 대계가 망가질 뻔했다·
“언제 깨어나지?”
“오늘이 지나기 전에 깨어날 겁니다·”
“그가 깨어나는 데로 작전에 투입하겠다·”
“허면 살천랑은?”
“물론 제거해야겠지·”
“하지만 그의 정체도 알지 못합니다·”
“당장 알지 못한다는 것뿐이지 앞으로도 알 수 없다는 것은 아니지· 시신을 두고 나가라· 이제부터 상흔을 분석할 테니· 놈이 사용한 검초를 알아낼 수 있다면 진정한 정체도 유추해 낼 수 있을 터·”
“알겠습니다·”
강위산이 대답과 함께 물러났다·
혼자 남은 서문화가 전뇌호천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평상시 사용하지 않던 두뇌가 깨어나면서 지력(知力)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누구냐 살천랑·”
그의 눈은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빛나고 있었다·
진무원은 거처로 돌아왔다· 감시자들은 진무원이 밖에 다녀온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기에 그들의 수준으로는 진무원의 은신술을 파악할 수 없었다·
아소는 청인에게 맡겨두었으니 당분간 안전할 것이다· 몸이 많이 상하긴 했지만 다행히 거동하는 데 지장은 없었다· 심마가 문제였지만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몸이 완전히 나으면 부현에서 빼내 사천성으로 보낼 예정이었다·
“현현소와 십자혈마공을 익힌 조운경· 서문화가 제대로 작정했구나·”
현시점에서 서문화가 동원할 수 있는 최상의 패를 빼어 든 셈이었다· 조운경이 야주를 죽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설령 실패하더라도 밀야에 큰 타격은 줄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진무원은 이런 상황이 싫었다· 아니 두고 볼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모용율천과 서문화의 의도대로 진행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가만있을 수 없었다·
“결코 당신들의 뜻대로 돌아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가슴속에 용암 같은 열화가 들끓었다· 하지만 진무원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냉철한 이성이 강렬한 본능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가슴속엔 화산과 같은 불을 담고 머릿속에는 북해의 차가운 설원을 그리며 살아간다·
지금의 진무원이 그랬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제일 먼저 할 수 없는 일들을 분류했다·
“전체적인 상황 통제 병력 운용 등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반대로 할 수 있는 일들도 있었다·
“저들이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를 만드는 일· 그리고 야주를 암살하려는 시도를 이용하는 일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의 생사대적은 운중천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밀야와 은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밀야 역시 그에겐 적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결론은 하나로 귀결됐다·
“상잔(相殘)·”
서로를 상하게 만든다·
그것도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힐 만큼 잔인하게·
생각을 정리한 진무원이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연무장에 모여 있는 우태천 설공 등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무언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듯 표정이 사뭇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한쪽에는 남수련과 연소소가 가벼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우태천이나 설공과 달리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무원이 나오자 우태천이 적의를 담은 시선으로 노려봤다· 그는 이제 진무원을 생사대적으로 인식하는 듯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설공 역시 어정쩡한 표정으로 진무원을 바라봤다·
두 사람 사이에서 노선을 확실히 정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진무원이 새로이 등장한 신성임이 분명하고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 역시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태천이 가진 배경은 그런 진무원의 장점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말이다·
많은 이들이 강호인이 되길 꿈꾼다· 강력한 힘을 갖게 되면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뿐이다·
실제로 강호를 살아가는 자들 중에 은원이 엮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무공이 강할수록 더욱 많은 은원 관계에 엮이게 되고 하루하루가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위태해진다·
그래서 굳건한 마음이 없는 자는 감히 정상에 서지 못하며 정상에 군림하는 자치고 독심이 없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설령 도문이나 불문에 속해 있는 자라 할지라도·
운중천의 아홉 하늘만 해도 그랬다·
이미 세상사에 모든 것을 다 이룬 그들이었다· 세상사에 탈속해질 만도 하지만 그들은 괴물 같은 탐욕과 욕망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 배후에 모용율천이란 진정한 괴물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정체성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었다·
진무원이 싸워야 할 자들은 그렇게 강호 정상에서 군림하는 괴물들이었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진무원 역시 괴물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우태천은 자신의 감정이 상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진무원을 적대시하고 있었다·
“단 소협·”
남수련이 다가왔다·
“남 소저·”
“간밤에 푹 주무셨나 봐요?”
“네! 어쩌다 보니···· 그런데 무슨 일 있습니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이네요·”
“사실은 방금 전 서문화 대협께서 저희 모두를 소집했어요· 그래서 단 소협이 나오길 기다리던 참이었어요·”
“그렇군요·”
진무원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순간 우태천이 말했다·
“모두 모였으면 이제 가지· 누구 때문에 많이 지체되었으니·”
그는 다른 사람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에 설공이 진무원을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우태천의 뒤를 따랐다·
“우리도 가죠·”
연소소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우태천과 달리 진무원에게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여전히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은 채 앞장을 섰다·
진무원과 남수련은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진무원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어가며 남수련이 입을 열었다·
“조심하세요·”
“예?”
“우 공자가 단 소협을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아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이미 진무원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래도 사심 없이 충고해 주는 남수련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잠시 후 그들은 서문화의 거처에 도착했다·
서문화의 거처는 무척이나 단출해서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진무원은 보이지 않는 경계망이 그물망처럼 펼쳐진 것을 알아차렸다· 그 한가운데 서문화가 있었다·
“칠소천의 우태천이 위대한 하늘 서문화 대협을 뵙습니다·”
“소림의 설공이 인사드립니다·”
“용린살막의 연소소가····”
우태천을 필두로 기재들이 서문화에게 분분히 인사를 했다· 그 뒤를 이어 남수련과 진무원도 간단히 인사를 했다·
서문화가 미소를 지었다·
“모두 그동안 잘 쉬었는가? 다들 내가 부른 이유를 짐작했을 것이네·”
모두의 표정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서문화의 말처럼 그들은 오늘 모이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흥분이 조금씩 고조되고 있었다·
“오늘 밤 자네들은 모처로 떠날 걸세· 그곳에서 마령제를 비롯해 안내인과 합류할 걸세·”
“으음!”
누군가의 입술을 비집고 침음이 흘러나왔다· 이미 예상은 했던 바이지만 서문화에게 직접 듣는 것은 또 달랐다·
흥분으로 인해 혈류가 몸 안을 휘도는 속도가 빨라졌다· 자연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고 심장도 거세게 뛰었다·
‘야주를 암살하는 일에 동참하다니· 나는 정말 대단한 행운아가 분명하다· 이날 이후 나의 이름은 역사에 올라갈 것이다·’
우태천이 주먹을 꽉 쥐었다·
설공 역시 두근거리는 심장이 쉽게 진정이 되지 않는지 연신 ‘아미타불’ 하면서 애꿎은 염주만 손안에서 굴렸다·
남수련과 연소소도 표정이 상기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들 중 유일하게 예외인 사람이 있다면 진무원뿐이었다·
진무원은 서문화의 달콤한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겉모습만큼은 넘어간 척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일부러 혈류를 빠르게 해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서문화가 그런 기재들의 모습을 보면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물건만 챙겨서 부현 지부 동문으로 가게·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밤이 되면 움직이게·”
“알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길 빌겠네· 자네들이 돌아오면 강호의 영웅이 될 걸세·”
“그럼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기재들이 서문화를 향해 일제히 포권을 취한 후 밖으로 나갔다· 서문화는 그들이 나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마침내 기재들이 모두 사라졌을 때 서문화의 거처 쪽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담수천과 서문혜령이었다·
서문혜령이 서문화의 옆에 섰다·
“이것이었군요· 할아버님이 준비한 것이·”
“야주를 없애지 않고서는 이 전쟁을 끝낼 수 없으니까·”
“저들 중 과연 몇이나 살아올까요?”
“글쎄다·”
서문화가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무심히 대답했다· 서문혜령은 그런 서문화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팔 위로 소름이 올라왔다·
어떤 때는 과연 서문화에게 진정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의 냉철함을 보여줬다· 그에게 인간이란 이용 가치가 있는 인물과 없는 인물 딱 두 가지 부류로 나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언젠가 나에게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나 역시 저들과 같은 취급을 받을까?’
그녀가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질근 깨물었다·
서문화가 담수천을 바라봤다·
“이젠 자넬 차롈세·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잔혹한 죽음을 뿌리게· 저들의 이목이 자네에게 집중되도록·”
“그리하겠습니다·”
담수천이 담담히 대답했다·
이미 진흙탕에 발을 디뎠다· 흙이 덜 튀고 더 튀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더러워졌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이미 더러워졌기에 담수천은 망설이지 않고 더욱 깊은 진창을 향해 전진할 수 있었다·
‘끝까지 가보자· 이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난 반드시 그곳까지 도달하고 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