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 7장 누군가는 영웅의 길을, 또 누군가는 패웅의 길을 걷는다 (2)
서문혜령은 서문화와 독대하고 있었다·
서문화는 부현 지부로 들어온 이후 이상할 정도로 조용히 있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서문혜령이 불안해했을 정도이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차를 마셨다· 하지만 서문혜령에겐 한가히 차 맛을 음미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찻잔을 입에 댄 채 서문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반면 서문화의 표정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겉으로만 봐서는 도저히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서문화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혜령아·”
“예 할아버지·”
“아무래도 너를 파문해야겠구나·”
서문혜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녀는 평소의 냉정함을 되찾았다·
“알겠어요·”
“이미 예상하고 있던 모양이구나?”
“그게 일이 잘못되었을 시 본가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서문혜령의 대답에 서문화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말하기 편하겠구나· 너의 부탁을 들어주마· 대신 일이 잘못되었을 시 나는 너를 외면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물론이에요·”
“알았다· 너의 뜻이 그렇다면·”
서문혜령도 그렇고 서문화도 마치 이렇게 결론이 날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자신 있느냐?”
“전 할아버지의 손녀예요·”
서문화가 전뇌호천공이라는 희대의 괴공으로 뇌의 지력을 극대화시킨 것처럼 서문혜령 역시 전뇌호천공으로 두뇌를 극한까지 개발했다·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의 계산에 자신이 있었다·
“좋다 그럼 부현의 전력이 온전히 너와 수천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마· 그 정도면 별 불만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물론이에요·”
“대신 너와 수천이 이끄는 부현의 전력이 도와줄 일이 있다·”
“어떤 일을 말하는 건가요?”
“이제 슬슬 전쟁을 끝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럼?”
서문화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담수천과 서문혜령이 야망을 가지고 하늘을 꿈꾸는 일과 별개로 이젠 전쟁을 끝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 그가 왔다·
“나와 모용율천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너도 눈치챘겠지만 그 때문에 이곳 부현에 많은 전력이 들어왔지·”
“강호를 은퇴한 무인부터 구대문파의 전력까지 면면이 화려하더군요· 하지만 그 어디에도 운중천의 전력은 보이지 않던데요·”
“거기까지 파악했더냐?”
“무슨 생각인가요?”
“어디 한번 네가 생각해 보려무나·”
“시험인가요?”
서문화가 말없이 웃었다· 그러자 서문혜령은 전뇌호천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아직 서문화에 비하면 모자라지만 그녀 역시 거의 십성에 가깝게 전뇌호천공을 익히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가 무섭게 돌아갔다·
‘전쟁을 끝내려 한다고? 이 지지부진한 상황을 타개하려면 밀야의 본거지를 직접 공격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설마?’
서문혜령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퍼뜩 들어 서문화를 바라봤다· 서문화는 그런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설마 밀야의 본거지를 알고 있는 건가요? 운중천의 주요 전력은 바로 본거지를 향했고?”
“정확하다·”
“어떻게 그들의 본거지를 알고 있는 거죠? 수많은 정보 조직을 동원해도 알아내지 못한 사실인데·”
“아직은 네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사실이 더 많다· 그게 세상이다·”
“할아버지·”
“중요한 것은 네가 이곳에서 일을 잘 마무리하면 그토록 원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서문화의 미소가 짙어졌다· 반대로 서문혜령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서문혜령은 운중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것이 많았다·
서문혜령이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서문화는 우월감을 즐겼다·
‘너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아직 멀었다· 너는 이제 겨우 날갯짓을 하는 아기 새에 불과해·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더 강한 근육과 힘이 필요하지·’
한참이나 서문화를 바라보던 서문혜령이 힘들게 말을 꺼냈다·
“알겠어요· 이제 제가 뭘 하면 되죠?”
“수천을 내세워 부현에 있는 병력을 지휘하거라·”
“정말인가요? 할아버지가 직접 나서지 않구요?”
“나는 따로 할 일이 있다·”
“그게 뭔가요?”
“차차 알게 될 것이다·”
“할아버지?”
서문혜령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서문화는 대답 대신 창밖을 바라봤다·
‘물론 그전에 쓸 만한 도구를 손에 넣어야겠지· 그 녀석·’
그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진무원은 연무장 한쪽에 앉아 있었다·
연무장 한쪽에서 무공을 수련하는 무인 수십 명이 보였다· 처음엔 아무도 연무장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틀이 지난 후 두어 명이 나와서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한두 명씩 합류하더니 결국 수십 명이 넘는 인원이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밀야와의 직접적인 전투를 겪으면서 그들은 깨달았다· 지금처럼 안일한 마음으로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잠깐 수련한다고 해서 당장 강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벼랑 끝에 몰린 절박한 심정은 그들을 수련으로 내몰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연무장에서 무공을 수련하는 이의 수가 늘어났다· 그들 중에는 고윤우가 이끄는 십조도 있었다·
그들은 다른 조와 달리 똘똘 뭉쳐 음양사상검진을 수련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무공을 수련하는 것보다 검진을 이용하는 것이 생존에 훨씬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거기 조금 더 빨리 움직여! 그쪽 때문에 전체 진영이 흔들리잖아! 조금 더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해!”
호통을 치는 고윤우의 목소리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평소라면 건성으로 대답했을 십조의 무인들이 악을 쓰며 그의 지적을 받아들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무원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결국 원하는 바를 얻었군·”
서문혜령이 현무대를 죽음의 함정으로 밀어 넣은 이유는 그들에게 절박함을 심어주고 쭉정이를 걸러내기 위해서였다· 진무원 때문에 쭉정이를 완벽하게 걷어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마음에 절박한 심정은 생기게 했다·
언제 또 전장에 투입될지 모른다· 지금은 살아남았지만 다음에도 살아남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선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그들은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진무원은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 역시 그런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마음을 잊어버린 적이 없는 반면 저들은 죽음의 위기를 경험하고 나서야 절박한 마음이 생겼다는 것뿐이다·
“충격적인 경험은 사람의 가치관과 인생을 바꾸기도 하지· 서문혜령은 그것을 노린 것이고·”
처음에 진창에 발을 들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두 번 세 번 발을 담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처음엔 옷이 더럽혀지는 것이 꺼려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감각은 점점 무뎌져 가고 결국에는 더럽다는 사실 자체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서문혜령은 현무대를 전장에 투입함으로써 진창에 발을 담그게 만들었다· 그들을 다시 전장으로 밀어 넣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현무대 역시 그런 사실을 느끼고 절박한 마음으로 무공을 수련하는 것이고·
“이로써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 셈인가?”
진무원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서문혜령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었다· 그녀와 담수천의 행보는 더디게 보이지만 결코 멈추는 법이 없었다· 결국엔 그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원래 목표한 곳에 도착하고 말 것이다·
그때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소?”
갑자기 진무원의 상념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무원이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인형이 서 있다· 강렬한 기세를 자연스럽게 흘리는 남자·
‘담수천·’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무원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담수천이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이오· 벌써 찾아왔어야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된 인사 한번 하지 못했구려·”
“아닙니다·”
“고맙소· 덕분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구했소·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소·”
진무원은 대답 대신 담수천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담수천의 몸에서는 패도적인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예전에도 남다른 기세를 발산하던 담수천이지만 이젠 차원이 다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만인 위에 군림하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기세·
진무원은 알 수 있었다· 담수천이 패왕의 길을 택했다는 것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의 세계에서 담수천은 자신이 가야 할 바를 확고히 정하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패도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제 부현을 완전히 장악했으니 그의 행보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그 끝이 어디든 간에 결국은 진무원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진무원을 바라보는 담수천의 눈에 기광이 일렁이고 있다·
“그것 알고 있소?”
“····”
“단 형의 눈빛은 내가 아는 그 어떤 사람과 많이 닮았다는 것을·”
“그런가요?”
“그는 무척이나 강한 사람이었소· 그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었소· 사실 나 역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소·”
“영광이군요· 그런 사람과 닮았다니·”
“단 형도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오· 북검 진무원이라고· 그는 내가 유일하게 경쟁자로 생각하는 사람이었소· 오직 그만이 나와 대등한 위치에 서 있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
담수천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은 그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혼이 위축될 정도였다· 하지만 진무원은 담담히 그의 눈빛을 받아들였다·
담수천이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이라면 진무원은 고요한 바다였다· 한없이 깊은 그의 눈빛은 그 어떤 감정의 편린도 내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만이 나의 경쟁자라고 생각했소·”
“이젠 아니란 뜻 같군요?”
“시대가 변하고 있소· 강호는 연일 새로운 무인들을 내놓고 있지· 예를 들면 단 형과 살천랑 같은 무인을 말이오· 단 형과 살천랑이면 능히 나의 경쟁자가 될 자격이 있소·”
“과찬이군요·”
“나는 과찬 따윈 하지 않는다오· 있는 그대로 평가하지·”
한없이 광오한 목소리와 눈빛이다· 하지만 진무원은 그런 모습이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담수천은 그런 남자였다· 일단 목표를 정하면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달린다· 그렇다고 단순무식하게 돌진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명철한 두뇌와 이성으로 냉철한 판단을 한다·
그렇기에 더욱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바로 담수천이었다· 자신에게 흔들리지 않는 존재는 타인에 의해 휘둘리지 않기에·
담수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연무장에서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현무대를 향했다· 그들의 절박한 모습을 보면서도 담수천은 표정의 변화 하나 없었다·
저들의 절박함 따윈 그에게 어떤 감흥도 줄 수 없었다· 그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그런 절실한 마음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제 저들의 운명은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 그가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 역시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담수천은 이미 그들의 용도를 결정했다·
세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은 서문혜령이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이는 담수천이었다· 그의 말 한 마디 결정 하나에 저들의 목숨이 갈린다·
수많은 이가 죽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오롯이 담수천이 견디고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그를 강하게 만드는 원동력 중 하나는 치열한 투쟁심이었다·
그의 눈앞에 투쟁심을 자극하는 무인이 나타났다·
무당파의 적엽 진인을 쓰러뜨린 살천랑 그리고 척마대를 구한 단천운·
살천랑은 이미 가공할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단천운은 담수천에 가려져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단천운의 무위를 직접 목도한 담수천은 누구보다 경계할 자가 바로 그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살천랑이 더 강할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아홉 하늘 중의 하나를 무너뜨렸으니까· 그런데 신경이 쓰이는 이는 바로 단천운 곧 진무원이었다·
“단 형·”
“말하십시오·”
“난 단 형과 같은 눈빛을 가진 자를 알고 있소· 그런 눈빛을 가진 자는 결코 타인의 운명에 편승하지 않는다는 것도· 무슨 목적으로 단 형이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와 함께하지 않을 거란 사실 정도는 짐작하고 있소·”
“····”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소· 어설픈 마음으로는 절대 내 앞을 막아서지 마시오·”
“어설픈 마음이라····”
“내 말 명심하시오 단 형·”
담수천의 눈에서 강렬한 안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의 눈빛은 세상을 불태울 만큼 강렬했다· 하지만 그의 강렬한 눈빛도 진무원의 고요함을 깨뜨리진 못했다·
담수천이 그런 진무원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당신이 누구이든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