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 7장 누군가는 영웅의 길을, 또 누군가는 패웅의 길을 걷는다 (1)
함소령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문정 오빠?”
“오랜만이야·”
그녀의 앞에서 활짝 웃는 남자는 바로 곽문정이었다·
그는 함소령을 본 그 순간부터 가슴이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자신의 귀에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함소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빠가 어떻게?”
“어쩌다 보니 다시 돌아왔어· 그러는 넌 공동파로 돌아간 것 아니었어?”
“아빠를 따라왔어·”
그제야 곽문정의 시선이 함소령의 곁에 있는 함지평에게 향했다· 곽문정이 실수를 깨닫고 급히 인사를 했다·
“함 대협 죄송합니다· 옆에 계셨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아닐세· 그럴 수도 있지· 다시 소형제를 보게 되니 반갑군·”
함지평이 인자하게 웃었다· 곽문정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일단 자리에 앉지·”
곽문정은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함소령이 배시시 웃었다· 뜻밖에도 곽문정을 만나게 된 것이 반가운 모양이다· 그런 딸의 모습에 함지평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소형제가 어찌 부현에 있는가? 전에 사천성으로 간 것이 아니었나?”
“일이 있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는 함 대협은 여기 어쩐 일입니까?”
“본산에서 명이 떨어졌네·”
“공동파에서요?”
“그렇다네· 운중천에서 각 문파에게 정예의 파견을 요청했네·”
“운중천에서 말인가요?”
“그렇다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 셈인가 보네· 그 때문에 지금 무진 사형이 정예를 추려 이곳으로 오고 계시는 중이네·”
“음!”
곽문정의 입술을 비집고 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요 며칠 부현이 돌아가는 모양이 심상치 않다 생각했지만 공동파에서도 정예를 파견할 줄은 몰랐다·
공동파에서 정예를 보냈다면 다른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에서도 정예를 파견할 것이 분명했다· 생각보다 판이 커지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워낙 많은 사람이 몰리다 보니 숙소를 잡는 것이 만만치 않아· 무진 사형이 도착하기 전에 제대로 된 숙소를 잡아놓아야 할 텐데·”
“부현 지부에 들어가면 되지 않나요?”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그쪽에서 거절하더군· 자리가 없다면서·”
“음!”
“그 때문에 숙소를 따로 구해야 하는데 만만치가 않아·”
“괜찮으시다면 제가 알아봐 드릴까요?”
“소형제가?”
함지평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백룡상단에서 나중에 사용하려고 사놓은 곳인데 지금은 비어 있어요·”
흑월의 안가라는 사실은 말할 수 없기에 곽문정은 대충 얼버무렸다·
“정말인가? 그런 곳이 있다면 감사하지·”
“제가 안내할게요· 같이 가요·”
“그러세·”
함지평은 급히 셈을 치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곽문정이 앞장서자 함소령이 급히 따라붙었다·
“헤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며 함지평도 웃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금만 식견이 있는 자라면 부현에서 분명 큰일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것이다·
급한 대로 숙소를 구한 것은 다행이지만 아수라지옥도가 될지도 모르는 이곳에 하나뿐인 소중한 딸과 곽문정이 있다는 사실이 못내 불안했다·
곽문정이 안내한 곳은 부현 외곽에 있는 제법 큰 농가였다· 방이 여섯 개에 마구간까지 있어 그런대로 공동파의 제자들이 머물 수 있을 것 같았다·
함지평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좋군! 정말 이곳을 우리가 써도 괜찮겠는가?”
“얼마든지 사용하십시오·”
“이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저희 사이에 보답은요· 그냥 함 대협과 소령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전 만족해요·”
“고맙네·”
“헤헤!”
곽문정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릴 때 함소령이 다가와 두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 오빠·”
조그만 두 손이 그렇게 부드러울 수 없었다· 곽문정의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곳을 내주면 소형제는 어디서 지내는가?”
“저는 당분간 부현 지부에 있을 겁니다·”
“부현 지부에?”
함지평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보표인 곽문정이 부현 지부에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정이 있어서 잠시 그쪽에서 머물 거예요· 나중에 다 말씀드릴게요·”
“알겠네· 혹시 우리 공동파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나를 찾아오게·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자네를 돕겠네·”
“감사합니다·”
“이젠 소형제가 남 같지 않아·”
의미심장한 함지평의 말에 곽문정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런 곽문정의 순수한 모습에 함소령이 더욱 활짝 웃었다·
☆ ☆ ☆
요 근래 하진월은 하루 두 시진 이상 잠을 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때문에 심신은 무척이나 지쳐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한시도 시간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았다·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 수많은 일을 처리했다· 오전에는 북천문의 전력을 끌어 올리려 애를 썼고 오후에는 당문 등과 함께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그 후엔 천하 각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취합해야 했다· 흑월이 합류한 이후로 그에게 들어오는 정보의 양이 무려 세 배나 늘었다·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늘어난 셈이다·
정보를 분류하는 일은 제자인 한선우가 도왔다· 한선우는 하진월의 제자답게 뛰어난 천재성으로 정보를 체계적으로 분류했다· 그래도 결국에 정보를 분석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것은 하진월의 몫이었다·
“음!”
최근에 들어온 정보를 확인하는 하진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경의가 직접 움직였다고?”
부현에 있는 청인에게서 지급으로 들어온 정보였다·
가경의는 밀야의 군사· 이제껏 어둠의 장막 뒤에 숨어 있던 그가 직접 움직였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았다·
“운중천 역시 부현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경의가 직접 움직였단 뜻인가?”
근래 들어 그에게 전해지는 정보 대부분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화산이 대폭발을 하기 전에 약한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커다란 사건이 있기 전에는 연관된 소소한 사건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하진월은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라고 생각했다· 천하 각지에서 수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얼핏 보면 전혀 별개의 사건들이지만 그것들은 분명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전조가 부현으로 향하고 있다·”
하진월은 조만간 부현에서 큰 사건이 일어나리라 예상했다·
지금 부현엔 진무원과 곽문정이 나가 있다· 그들이 알아서 잘 대응할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군사로서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 한다?”
한참을 고민하던 하진월이 몸을 일으켰다·
“스승님 어디 가세요?”
한쪽에서 조용히 정보를 분류하던 한선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잠시 밖에 다녀와야겠다·”
“제가 모시지 않아도 되나요?”
“은 소저께 다녀올 테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 알겠어요·”
한선우가 납득했다·
하진월은 한선우를 뒤로하고 북천문을 나섰다· 그는 세 개의 산봉우리를 넘어 북천문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바로 은한설이 머무는 곳이다·
하진월이 크게 외쳤다·
“은 소저!”
잠시 후 공간이 일렁이며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군사님·”
“오랜만입니다 은 소저· 그동안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군요·”
“감사해요· 그러는 군사님께서는 왠지 걱정이 더 많아지신 것 같네요·”
“그렇게 보입니까?”
은한설이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하진월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근심걱정이 많습니다· 그 때문에 은 소저께 염치없는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부탁이요?”
“그렇습니다·”
“뭔가요?”
은한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미 하진월이 어떤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은 소저· 이번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현으로 가주셨으면 합니다·”
“부현? 무원이 가 있는 그곳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무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은한설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높아졌다·
하진월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
“당장은 문제가 없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 말해보세요·”
“사실은····”
하진월은 그동안 자신이 취합하고 분석한 정보를 자세히 말했다· 그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은한설의 표정 또한 심각하게 변했다·
“그럼 무원이 위험하다는 건가요? 말도 안 돼요· 당금 무림에 그를 상하게 할 만한 사람은 몇 되지 않아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아마 무인 대 무인의 대결이라면 문주님께서 곤란해질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둘 이상의 아홉 하늘이 움직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서문화에 이어 현현소가 부현으로 향했습니다· 다음엔 누가 움직일지 모릅니다·”
“으음!”
“은 소저가 세상에 나가길 꺼리는 것은 알지만 이번 한 번만 제 부탁을 들어주었으면 합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문주님과 관계된 일이니·”
은한설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하진월은 긴장했다· 머릿속에는 그녀를 설득하기 위한 수많은 말이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겠어요· 지금 당장 준비할게요·”
“예?”
다음 순간 들려온 그녀의 대답은 그를 허무하게 만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이제껏 한사코 세상 밖으로 나오길 거부하던 은한설이다· 그만큼 세상에게 받은 상처가 컸고 더 이상 다른 사람들과 엮이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그의 뜻을 따르니 오히려 하진월의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하진월에겐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지만 사실 은한설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에게 진무원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를 잃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북천문을 위해 싸울 수는 없었지만 진무원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던질 수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매우 작은 차이일지 모르지만 은한설에게는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절대 명제였다·
“은 소저 정말 부현으로 가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준비를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전 이대로가 편해요·”
“하지만····”
“지난 삼 년 동안 놀고 있지만은 않았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은 소저의 무공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은 소저가 외부와 담을 쌓은 삼 년 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겁니다·”
세상이 변하고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다· 수많은 문파가 사라졌고 인심은 흉흉해졌다· 하진월은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를 은한설이 감지하지 못할 것을 걱정했다·
은한설은 무공만 강할 뿐 속내는 아직 여린 아이나 다름없었다· 하진월은 그런 은한설이 또 상처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한 명만 데리고 가십시오·”
“누구?”
“제 제자인 선우를 데리고 가십시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제법 똘똘한 데다가 상황 판단도 빠릅니다· 무엇보다 부현 인근이 고향이라 그쪽 사정에도 환하니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겁니다·”
“알았어요·”
은한설은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수 있도록 선우에게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부디 문주님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은 소저·”
“걱정하지 마세요·”
은한설의 시선이 동쪽을 향했다·
진무원의 이름을 듣는 그 순간부터 잠잠하던 심장이 거세게 고동치고 있었다·
‘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