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 6장 폭풍이 불기 전에도 바람은 불어온다 (3)
진무원의 단호한 대답에 고윤우가 입을 벙긋거렸다· 설마 진무원이 이렇게 단호히 거절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가 말을 더듬었다·
“왜 왜인가?”
“자신의 목숨은 스스로 도모해야 하는 법입니다· 약간의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제가 그들의 목숨을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네가 아니면····”
“저보고 살려달라고 하셨는데 그럼 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습니까?”
“그건····”
고윤우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진무원의 대답은 무척이나 냉정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싸워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에게 목숨을 맡기려 했구나·’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진무원의 눈을 똑바로 보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를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미안하네· 내가 부끄럽군·”
“아닙니다·”
“일단은··· 우리 힘으로 생존을 도모해 보겠네· 그래도 안 된다면 그때 도와주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네!”
고윤우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제까지는 필요에 의해 진무원을 이용하려 한 것이라면 지금은 진심으로 그에게 탄복하고 있었다·
고윤우가 미안한 표정으로 돌아가고 진무원 혼자 거리에 남았다·
진무원이라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살 곳을 찾아온 짐승은 쫓아내지 않는 법이다· 하물며 그 대상이 인간인 바에야·
그렇지만 지금 이곳에서 그들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운신의 폭이 좁아질뿐더러 얽매이는 것이 많아진다·
그들은 진무원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진무원에게는 그들보다 더 소중하고 먼저 지켜야 할 사람이 많았다· 냉혹하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진무원은 오늘따라 유독 발걸음이 무겁다고 느꼈다· 그는 거리를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가장 골치 아픈 것은 가경의였다· 그와 협상을 했지만 언제까지 그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을 번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운중천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인가?’
진무원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음?”
문득 진무원이 고개를 들었다·
거리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뭐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진무원은 알고 있었다· 이런 사소한 것을 넘어가면 차후에 더 큰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일단 위화감의 원인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진무원과 같은 수준에 이른 고수는 통찰력이 극도로 발달한다· 눈과 귀 같은 일차적인 감각 기관뿐 아니라 육감 같은 이차적인 감각까지 더해져 예지력과 비슷한 능력까지 발휘하게 된다·
진무원은 전방위 감각은 지금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통찰력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미 익숙한 부현의 거리이다· 진무원은 그들 중 이 거리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골라냈다·
‘무인들··· 나이 든 무인들·’
최전선이기에 무기를 든 무인을 보는 것이 길거리의 돌멩이만큼이나 흔한 곳이 바로 부현이다· 하지만 의외로 나이 든 무인들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무인은 무척이나 젊은 편이었다· 그 때문에 전쟁이 한창이더라도 거리의 분위기 역시 역동적인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묘하게 정적이 흐르고 있다·
진무원은 그 이유가 거리를 걷고 있는 무인들의 평균 연령이 높아진 탓이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잘 보이지 않던 나이 든 무인들이 부쩍 눈에 띄었다·
남들이 보기엔 별거 아닌 차이지만 진무원에겐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서문화의 등장과 함께 나이 든 무인들의 유입이 늘었다? 그냥 넘길 일은 아니군·’
자연스럽게 진무원의 걸음이 공방으로 향했다· 청인을 만나려는 것이다·
그때였다·
“방이 없다니요? 아까 왔을 때는 분명 방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앞쪽의 객잔 앞에서 묘령의 소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익숙한 목소리에 진무원의 시선이 객잔으로 향했다·
그곳에 이제 열대여섯 정도로 보이는 소녀와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진무원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두 사람의 모습이 낯익었기 때문이다·
‘함소령·’
삼 년 전 우연히 만나 도움을 주었던 소녀가 훨씬 성숙해진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 그의 곁에 있는 중년의 무인은 바로 아비인 함지평이었다·
곽문정을 통해 두 사람이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비록 두 사람은 진무원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진무원은 감회가 새로웠다·
함소령은 무척 화가 난 듯 조그만 얼굴이 온통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제가 금방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분명 그쪽에서도 기다려 준다고 했고·”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까 점소이 녀석이 그만 착각해서····”
객잔의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난처한 표정으로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진무원은 묵묵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그 결과 함소령이 이곳에 방을 잡으려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록 점소이의 착오로 잠시 다녀온 사이 그만 방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긴 했지만·
그 때문에 함소령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고 곁에 있는 함지평도 난감한 상태였다·
“허! 큰일이구나· 다른 객잔에도 방이 떨어졌다고 하니· 이보시오 주인장· 정말 방이 없소?”
“그렇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휴우!”
함지평이 나직이 한숨을 토했다·
남는 방이 없다고 하는데 그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현재 부현에 있는 객잔은 전부 방이 동이 난 상태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꼼짝없이 노숙해야 할 판이다·
“어떡하죠 아빠?”
“일단은 식사를 하면서 생각해 보자· 주인장 식사는 할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그럼 두 사람 분의 식사를 준비해 주시오·”
“예!”
진무원은 두 사람이 주인을 따라 객잔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매우 반가웠지만 지금 여기서 그들을 알은척할 수는 없었다· 지금 그는 진무원이 아닌 단천운이었기에·
진무원은 공방으로 향했다·
“문주님·”
“형!”
청인과 곽문정이 그를 반갑게 맞았다· 역시 예상대로 곽문정은 이곳에 있었다·
진무원은 곽문정에게 함소령 부녀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곽문정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져갔다·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지금 방을 잡지 못해 곤란한 모양이더구나·”
“그래요?”
곽문정의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이 떠오르자 청인이 한마디 했다·
“마침 남는 안가가 하나 있는데·”
“형!”
곽문정이 청인의 팔을 와락 잡았다· 그러자 청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허름한데····”
“그래도 좋아요· 형 부탁드릴게요·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 할게요·”
“약속한 거다?”
“물론이에요·”
“알았다·”
결국 청인은 곽문정에게 안가의 위치를 알려줬다· 그러자 곽문정이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저렇게 좋을까?”
청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삼 년이란 시간을 함께했더니 이젠 친동생 같은 곽문정이다· 곽문정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자니 괜스레 그의 기분도 좋아졌다· 그건 진무원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미소를 짓던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현무대가 출동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꽤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는 이야기도·”
“서문혜령이 제대로 작심했더군요·”
진무원은 전날 있던 일을 가감 없이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청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말 가경의가 감천에 왔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직접 만났습니다·”
“밀야의 군사가 직접 움직이다니·”
아직 운중천에서는 가경의의 이름을 아는 이조차 없었다· 그만큼 모든 것이 비밀에 가려진 이가 바로 가경의였다· 남천명이 아니었다면 북천문도 가경의라는 이름을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은류와 흑월 역시 총력을 기울여 가경의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지만 그에 대해 알아낸 것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청인은 가경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가경의라는 인물을 파악하는 큰 단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무원은 그와 나눈 대화와 자신의 느낌을 가감 없이 말했다· 최대한 청인이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마침내 진무원의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청인의 얼굴은 더할 수 없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요· 문주님과의 짧은 대화에서 그 많은 사실을 유추해 내다니·”
“그렇습니다· 그가 이곳에 나타난 이상 모든 것이 서문혜령의 뜻대로 돌아가지는 않을 겁니다·”
“어서 빨리 이 사실을 군사께 알려야겠군요·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오랫동안 정보 계통에 종사해 온 사람답게 청인은 가경의의 비범함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와 같은 부류의 행동을 얼마나 예측하기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상대로 머리싸움을 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이는 오직 같은 부류뿐이었다·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더군요· 무슨 일 있습니까?”
“일이라면?”
“거리에 완숙한 경지에 이른 무인들이 많이 보이더군요·”
“아! 그 일 말이군요· 말씀하신 대롭니다· 요 며칠 동안 꽤 많은 무인이 부현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때문에 저희들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이 청인은 이미 이상한 흐름을 느끼고 반응하고 있었다·
청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문주님·”
“말씀하십시오·”
“놀라지 마십시오· 현재 부현에 거물이 오고 있습니다·”
“거물?”
“평리(平利)에서 마령제가 포착되었습니다·”
“마령제?”
진무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령제(魔靈帝) 현현소 아홉 하늘의 일인이다·
별호 그대로 마도 성향을 가지고 있는 무인으로 성격이 음울하고 기복이 심해 어디로 튈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어떤 때는 한없이 인자하다가도 조금만 수가 뒤틀리면 광포해져서 날뛰었다· 그러다 보니 현현소라는 이름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공포의 대상으로 여겼다·
다행스럽게도 현현소는 외부에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어쩌다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낼 때면 강호에는 평지풍파가 몰아닥쳤다·
“정말입니까?”
“평리에서 포착된 이후 꾸준히 북상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이곳 부현에서 평리는 천여 리에 불과합니다· 그 정도라면 아무리 늦어도 사나흘 정도면 도착할 겁니다·”
진무원의 눈매가 좁아졌다·
평소 세상에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홉 하늘이다· 그런 이들이 연이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굳이 이유를 알지 못해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현현소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의 존재입니다·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문주님·”
“알겠습니다·”
“서문화에 이어 현현소까지· 이러다가 나머지 아홉 하늘도 모조리 등장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청인이 넋두리를 했지만 진무원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피가 들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홉 하늘이 움직일 때면 항상 강호가 뒤집혔다· 예전의 북천문이 멸문한 것처럼·
“가경의에 이어 아홉 하늘까지· 어쩌면 그들은 이곳에서 건곤일척의 승부를 보려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진무원은 거대한 폭풍이 불어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운명처럼 그 중심에 그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