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 6장 폭풍이 불기 전에도 바람은 불어온다 (2)
만신창이가 된 현무대가 귀환했다· 나갈 때는 삼백여 명이었는데 돌아온 이는 겨우 백오십여 명에 불과했다·
어쩌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현무대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었고 적의 전력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백오십여 명이나 살아 온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서문혜령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무사 귀환했다·’
원래 그녀의 계산대로라면 이곳에 있는 이들보다 훨씬 적은 수의 인원이 돌아와야 했다· 그녀는 최소한 삼분의 이 이상의 인원이 귀환하지 못할 거라 봤다·
그녀의 예상보다 오십여 명이나 많이 생환했다· 별거 아닌 숫자 같지만 서문혜령같이 머리로 모든 것을 계산하는 사람에겐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였다·
‘변수가 있었던가?’
그녀의 시선이 현무대를 훑었다·
지금 이곳에서 변수라고 할 만한 존재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단천운·’
서문혜령의 시선은 어느새 진무원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진무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그녀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진무원이 속해 있는 현무대 십조에서 오직 그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진무원만 보이고 나머지 십조의 무인 전부가 낙오되었다는 것이 더 신빙성 있는 이야기였다·
십조는 현무대에서도 별 존재감 없는 자들이 모인 곳이다· 그들의 무위나 배경은 현무대에서 최하였다· 솔직히 서문혜령은 그들이 거의 전멸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들의 무력 평가는 그 정도였다·
변수가 있다면 진무원 정도이다· 그가 도와준다면 생존 확률이 더 높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 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현무대 십조는 전원 무사 귀환했고 오히려 진무원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서문혜령이 현무대 십조를 향해 다가갔다·
“단 소협은 어디 있나요?”
“그게····”
고윤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서문혜령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가장 위험하고 깊숙한 곳에 들어간 십조였다· 그런 결정의 배경에는 서문혜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수고했다는 한 마디 말 없이 진무원의 행방을 묻는 그녀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러나 서문혜령은 고윤우의 눈빛을 무시하고 다시 한 번 물었다·
“단 소협은 어디에 있나요?”
“그는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구요?”
“그렇습니다·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갔습니다· 그 직후 적의 공세가 느슨해졌고 그 덕에 우리는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적의 공세가 느슨해졌다구요?”
“그렇습니다·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고윤의 대답에 서문혜령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그녀가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십조가 가장 피해가 적었고 의외로 윤주천과 황보중걸 등이 지휘하던 조가 가장 많은 피해가 났다· 가장 안전한 곳으로 보냈는데도 많은 피해가 나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들의 표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서문혜령이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서문혜령이 고개를 돌리자 진무원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샌가 그가 현무대 무인들 사이에 나타난 것이다·
“단 소협?”
갑작스레 나타난 진무원의 모습에 서문혜령이 절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늦었습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단 소협 어떻게····”
할 말은 많았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주위에 보는 눈이 많았다· 그녀는 애써 말을 돌렸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피곤할 텐데 쉬세요·”
“그러겠습니다·”
진무원은 담담히 대답했지만 서문혜령은 그렇지 못했다·
그녀가 현무대에게 해산을 명했다·
“모두 수고 많으셨어요· 일단은 쉬고 계세요·”
많은 이들이 불만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누구 한 명 나서서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현무대는 해산했다· 하지만 여운은 오래 남았다·
서문혜령은 뒤돌아서 숙소로 돌아가는 진무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쾅!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서문혜령이 조그만 두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그러자 자단목으로 만든 책상이 산산이 부서졌다·
“아가씨!”
채화영이 급히 서문혜령을 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다른 탁자 위에 있는 물건을 모조리 바닥에 집어 던졌다·
서문혜령과 함께한 지 수년이 지났지만 저렇듯 이성을 잃고 광분하는 것은 처음이기에 채화영은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채화영은 겨우 본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휴우!”
서문혜령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담수천이었다· 그의 등장에 채화영이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서문혜령이 뒤돌아봤다·
“수천·”
“이야기 들었소· 괜찮소?”
“이제 괜찮아요·”
서문혜령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담수천이 눈을 빛냈다· 평온을 되찾은 모습이지만 아직도 그녀의 눈 속에는 가라앉히지 못한 열기가 보였다·
그가 아는 사람 중 누구보다 침착하고 냉철한 이가 바로 서문혜령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서문혜령이 이렇게 감정의 동요를 일으킨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잠깐 흥분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변수라는 것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으니까요·”
“다행이군·”
“미안해요 걱정을 끼쳐서·”
“미안해할 것 없소· 당신의 계획을 승인한 것은 나였으니까·”
담수천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 계획을 세운 것은 서문혜령이지만 승인한 것은 자신이다·
너무나 과격한 방법이었지만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쨌거나 많은 이들이 살아 와서 다행이군·”
“그 때문에 저들의 진실된 역량을 알 기회가 사라진 것도 사실이에요·”
대규모 병력을 지휘하기 위해선 그들의 역량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벌인 일이다· 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다·
담수천이 서문혜령을 조용히 끌어안았다· 서문혜령은 반항하지 않고 그의 품에 기대 눈을 감았다·
“괜찮소· 급하게 일을 진행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변수도 발생하는 법· 우린 충분히 빨리 왔소· 지금은 잠시 멈춰 숨을 골라도 되오·”
“수천·”
담수천이 서문혜령의 등을 토닥였다·
서문혜령이 눈을 감았다·
흥분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담수천이란 남자의 품은 너무나 따뜻했다·
☆ ☆ ☆
고윤우는 마치 고양이처럼 진무원을 몰래 쳐다봤다· 진무원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진무원이 홀연히 사라지고 난 후 갑작스럽게 적들의 파상공세가 멈췄다·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무원과 연관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일이 진무원과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저자는····’
위기의 순간마다 진무원이 나섰고 그때마다 상황은 일변했다· 십조가 가장 위험한 곳으로 파견되었는데 사상자 한 명 없이 전원 무사 귀환했다·
고윤우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이다· 그래서 부담스러웠다· 진무원과 같은 조에 있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고 자기가 그를 이끌어야 하는 조장이라는 사실은 더욱 거북했다·
그때였다· 이제껏 가만히 있던 역신위가 진무원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엔 친근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헤헤! 형님·”
“형님?”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역신위가 진무원의 곁에 앉으며 넉살 좋게 말했다· 그런 역신위의 태도에 진무원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형님으로 모셔야지요·”
“한 일도 없는데 무슨····”
“헤헤! 왜 이러십니까?”
역신위가 진무원 옆으로 더욱 바싹 붙었다· 진무원은 그런 역신위가 부담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역신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형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앞으로도 형님 곁에서 머물고 싶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저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지만 그는 아예 확신하고 있었다·
‘체면이 대순가? 일단 살고 봐야지·’
이번 작전에 투입되면서 절실하게 느꼈다· 실전을 경험하지 못한 무인은 반쪽짜리라는 것을·
그렇게 본다면 지금 현무대에 제대로 된 무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십조가 실전을 경험했을 뿐 나머지 조는 전장의 살벌함을 간밤에 처음 경험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현무대는 앞으로도 계속 전장에 투입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역신위의 선택은 진무원이었다·
진무원의 진신 능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유일하게 의탁할 만한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말로는 표현을 안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심정도 역신위와 비슷했다· 어느새 진무원 주위로 십조 무인들이 슬금슬금 모여들기 시작했다·
진무원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저희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슨···?”
“저희도 살고 싶습니다·”
그들의 음성엔 절박함이 가득했다·
진무원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떠올랐다· 설마 이들이 이렇게 나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때 고윤우가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우리 조용히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부현 지부를 나와 함께 길을 걸었다· 부현 지부가 멀어지자 고윤우가 입을 열었다·
“당황스럽겠지? 갑자기 저들이 달려드니까·”
“솔직히 그렇습니다·”
“자네가 이해해 주게· 저들도 나름 절박해서 그러는 거니까·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그렇다네·”
고윤우의 말은 진무원에게 의외였다·
그가 본 고윤우는 무척이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솔직히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줄은 몰랐다·
“자네가 보기에 우리는 어떤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솔직히 말해주게· 무인으로서 우리는 어떤가?”
“글쎄요·”
“그럼 내가 말하지· 우리는 어중간하네· 무공은 제법 강한 편에 속하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애송이들· 아마 그 정도일 걸세· 어쩌면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우리의 현실일세·”
“말하고 싶은 게 무엇입니까?”
“살고 싶네·”
“····”
“정말 살고 싶네· 명성을 얻기 위해 이곳에 자진해 왔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네· 그냥 살아서 돌아가고 싶네·”
고윤우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
그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자존심도 접고 진무원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그는 절박했다·
단지 자신의 목숨만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졸지에 십조의 조장이 되었고 스무 명의 목숨을 떠안게 되었다·
자신 혼자라면 모르지만 스무 명의 목숨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실제로 이번 임무에서 그가 한 일은 거의 없었다· 실질적으로 그들을 이끈 것은 진무원이었다·
역신위가 그런 것처럼 고윤우도 진무원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기기로 결심했다· 지금 고윤우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제발 우리를 살려주게·”
고윤우가 진무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돌아온 진무원의 대답은 단호했다·
“거절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