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 5장 싸우지 않는 자에게 미래는 오지 않는다 (1)
진무원이 합류한 이후 처음으로 현무대가 소집되었다· 넓은 연무장이 현무대로 가득 찼다·
“무슨 일이지?”
“그러게· 전쟁도 소강상태인데 무슨 일이래?”
대부분의 현무대 무인들은 영문을 모른 채 웅성거렸다· 영문을 모르기는 진무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곁에는 역신위와 고윤우가 함께 있었다·
“또 밀야가 움직였나?”
“아침까지도 아무런 조짐이 없었는데 무슨····”
“그런데 왜 모두를 모이라고 한 거죠?”
“글쎄· 대주가 들어오니 곧 알겠지·”
고윤우의 시선이 위풍당당하게 연무장으로 들어서는 윤주천을 향했다· 현무대의 대주인 윤주천의 등 뒤로 황보중걸 등 익숙한 얼굴 몇이 따라오고 있었다·
윤주천이 연무장 가운데 있는 단상에 올랐다·
“모두 주목하도록·”
내공을 실은 음성이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순간 장내의 소란이 가라앉았다·
“여러분을 모이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니라 위에서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윤주천이 잠시 말을 끊고 연무장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이가 모두 숨을 죽인 채 그를 지켜보고 있다·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모두 자신의 명령을 따른다는 것은 더 기분 좋은 일이었다·
“오늘 우리는 전선 쪽으로 투입된다·”
“설마 적진에 침투하는 겁니까?”
연무장에 모인 무인 중 누군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불안한 심정이 느껴졌다·
윤주천이 미소 지었다·
“아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의 동향과 접경 지역의 상황만 파악하면 된다· 정보에 의하면 밀야는 모두 감천으로 물러났다고 하니 별 위험은 없을 것이다·”
그의 말에 현무대 무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이미 여러 차례 전쟁을 겪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은 후방에서 지원만 했다· 실제로 목숨을 걸고 싸운 경험이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적진에 침입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인근의 동향만 파악하는 것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적은 모두 감천으로 물러났다고 하지 않는가?
이 정도라면 굳이 겁을 집어먹을 이유가 없었다· 굳어 있던 표정이 그제야 풀렸다·
윤주천은 현무대를 열다섯 개의 조로 나눴다· 각 조는 스무 명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진무원은 그중 십조에 속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고윤우와 역신위 등이 모두 그와 같은 조에 배속되었다·
“일조의 조장은 내가 맡는다· 이조의 조장은 황보세가의 황보 소협이 삼조는 종남파의 염 소협이··· 십조의 조장은 고윤우가 맡는다·”
십조의 조장이 발표되자 장내에 소란이 일었다·
각조의 조장은 대부분 명문대파의 제자들이 맡았다· 하지만 십조의 조장이 된 고윤우는 낭인 출신이었다·
“낭인 출신이 조장을 맡는다고?”
“개판이군·”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고윤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스스로도 조장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고윤우였다·
그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전 조장을 맡을 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 차라리 경천봉 단 소협이 맡는 게····”
“다 내가 생각해서 결정한 일이다·”
“하지만 단 소협의 무공이 훨씬 더 강합니다·”
“그는 무공은 강할지 모르지만 아직 운중천과 현무대에 잘 알지 못한다· 아직 외인이나 다름없지· 그에게 조장을 맡기는 것은 이곳에 적응한 이후의 일이다·”
윤주천의 말은 일견 타당해서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고윤우조차 할 말이 없었다·
순간 진무원의 눈이 윤주천과 마주쳤다· 그러자 윤주천이 입꼬리가 살짝 비틀려 올라갔다· 진무원은 그것이 조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윤주천은 자신들이 아닌 고윤우 등과 어울리는 진무원에게 일부러 모욕감을 주려 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진무원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굳이 골치 아픈 조장 따위를 하고 싶지 않은 진무원이다· 때문에 조장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할 이유가 없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진무원이 속한 십조엔 대부분 중소 문파 소속의 무인이나 낭인들이 배정되었다·
고윤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원치 않았지만 스무 명이나 되는 인원을 인솔하고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올랐기 때문이다·
“각조의 조장은 모두 앞으로 나오도록·”
윤주천의 말에 열다섯 명의 조장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윤주천은 그들에게 지도를 한 장씩 나눠 주었다·
“각자가 파악해야 할 지역이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확실히 숙지하고 출동하도록·”
고윤우도 조장들 틈에서 지도를 받았다· 지도를 받아 들고 확인하던 고윤우의 표정이 철갑처럼 굳었다·
십조가 맡은 지역은 밀야가 주둔하고 있는 감천에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고윤우는 다른 조들이 맡은 지역을 확인하려 했지만 다른 조장들은 지도를 보여주지 않았다·
윤주천이 그런 고윤우를 보며 말했다·
“왜 문제 있나?”
“아··· 닙니다·”
고윤우가 이를 악물며 물러났다·
“왜 그래요?”
역신위가 고윤우에게 다가와 물었다· 고윤우는 말없이 지도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역신위의 표정 또한 그와 비슷하게 변했다·
“제기랄! 이건 완전히 제일 위험한 지역으로 들어가라는 거네·”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그래도 이곳에 오래 있던 역신위이다· 한눈에 그들이 파견되는 지역이 제일 위험한 곳임을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역신위가 다른 조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들의 표정은 십조만큼 심각하지 않았다· 그로 미뤄보아 그리 위험하지 않은 지역에 배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젠장! 배경도 없는 것들은 그냥 위험한 곳에서 뒈지든 말든 상관없다는 건가?”
십조의 누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에 다른 조원들이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그 순간 윤주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모두 무사히 돌아오길 빌겠다! 모두 출발하도록!”
연무장에 모여 있던 현무대가 해산했다· 하지만 십조는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그만큼 그들이 느끼는 압박감과 부담감은 엄청났다·
진무원은 연무장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윤주천과 황보중걸 등을 보고 문득 의문이 들었다·
‘현무대를 동향 파악에 투입한다? 서문혜령의 생각인가?’
지금 이곳 부현을 장악한 이는 담수천과 서문혜령이다· 당연히 서문혜령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았다·
십조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들이 이성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제길! 결국은 제일 위험한 곳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군·”
그제야 그들은 현실을 제대로 인지했다·
고윤우도 이성을 되찾았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제기랄! 좋아 다녀오지· 대신 멋지게 살아 돌아오겠다·”
“그럽시다· 우리가 그렇게 녹록한 존재가 아니란 것을 저들에게 보여줍시다·”
다른 이들이 고윤우의 말에 동조했다·
진무원은 그들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위기에 강한 부류인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 고윤우는 처음엔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덩달아 주위 사람들까지 정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야기를 모두 끝냈는지 고윤우가 진무원에게 다가왔다·
“자네는 괜찮은가 보군· 아니 당황하는 게 이상한가? 자네 정도의 무위를 가진 자가 이 정도 임무에 당황할 이유가 없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염치 불고하고 자네에게 부탁하려 하네·”
진무원은 말없이 고윤우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고윤우가 진무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 중 가장 강한 사람은 자네네· 그러니까 부디 우리 뒤를 봐줬으면 좋겠네·”
진무원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고윤우는 산전수전 다 겪은 낭인이다· 낭인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아는 진무원으로서는 고윤우가 이렇게 쉽게 고개를 숙인다는 사실 자체가 의외였다·
단순히 자신의 생존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과 같이 십조에 배정된 사람들을 살리고 싶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마음이 눈빛과 목소리를 타고 전해졌다·
“같은 조에 속했으니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부탁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고맙네· 자네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네· 덕분에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어·”
고윤우가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섰다·
“일각을 주지· 모두 출발 준비를 하고 다시 이곳에 모인다· 각자 무기와 필요한 도구 하나도 빼놓지 말고 모조리 가지고 나오도록·”
“예!”
십조의 무인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고윤우는 현무대에 있는 무인 중 가장 연장자에 속했다· 또한 많은 신망을 얻고 있었다· 누구 한 명 고윤우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모두 흩어져 숙소로 돌아갔다· 하지만 진무원은 딱히 준비할 게 없기에 근처에 있는 큰 나무에 등을 기댄 채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어쩌면 이것 또한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부현에 머물면서 운중천의 허실을 파악했다· 서문혜령과 서문화 사이에 묘한 기류가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진무원에게는 큰 소득이었다·
진무원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흩어졌던 십조의 무인들이 다시 하나둘 돌아왔다·
“모두 왔으면 출발하지!”
고윤우의 외침에 십조가 움직였다·
진무원은 맨 뒤에서 십조를 따랐다· 그의 옆으로 역신위가 따라붙었다· 역신위는 무척이나 초조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가 진무원에게 말했다·
“단 소협은 긴장되지 않는 모양이네요· 역시 무공이 강해서 그런가?”
“저도 긴장됩니다· 단지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할 뿐입니다·”
“그래요?”
역신위는 허리에 검을 차고 있다· 평소에도 신경 써서 손질하는지 상태가 좋아 보였다· 그는 불안감을 떨치기라도 하듯 진무원의 곁에 착 붙어 수다를 떨었다·
진무원은 적당히 대답해 주면서 주위를 살폈다· 다른 조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다른 문을 통해서 나갔거나 방향이 다른 모양이었다·
아직 새벽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십조는 새벽 거리를 지나 부현 북쪽에 도착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곳이다· 대부분의 시신을 수습했지만 아직도 혈향이 공기 중에 짙게 배어 있었다·
십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직도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기억이 생생했다· 아무리 평정심을 유지하려 해도 절로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수많은 이가 죽었고 그중 상당수는 그들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이를 보낸 곳에 다시 돌아오니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다·
고윤우가 앞장섰다· 그래도 이곳에서 가장 연장자인 데다가 오래 있었다· 인근 지리에 그만큼 해박한 사람도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윤주천이 그에게 조장 자리를 맡긴 것인지도 몰랐다·
“모두 각별히 주의하고 내 뒤만 따라오도록·”
“예!”
십조가 조심스럽게 고윤우를 따랐다·
주위를 둘러보는 진무원의 눈에 감천 쪽으로 이동하는 다른 조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 역시 십조와 마찬가지로 불안한 표정이었다·
“흠!”
진무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단순히 밀야의 진용이 있는 감천에 가까이 접근한다고 해서가 아니었다·
무언가 불순한 의도가 느껴졌다·
‘대체 무슨 이유로?’
진무원은 서문혜령을 떠올렸다·
그가 아는 서문혜령은 결코 아무런 목적 없이 움직일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하는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었다· 단지 철저히 의도를 숨길 뿐이었다·
문제는 그녀의 의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다·
☆ ☆ ☆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누군가 가경의의 방문을 두들겼다·
“들어오세요·”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중년의 무인이 급히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요?”
“부현 쪽에 있는 간자들에게서 지급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간자들에게서?”
“예! 지금 부현 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고 합니다· 일단의 무리가 감천 쪽으로 투입된 것 같은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흠!”
무인의 보고에 가경의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필 이 시기에 병력을 움직였다?”
전쟁에도 시기가 있는 법이다·
기세를 몰아칠 때는 확실하게 해야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확실한 휴식을 줘서 전력을 비축해야 한다·
“서문혜령이 그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테고· 그렇다면 왜?”
가경의가 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는 서문혜령이 무언가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게 뭐냐는 것이다·
가경의는 담수천과 서문혜령을 떠올렸다· 그들의 성격과 처해진 상황 그리고 현재 그들의 입장까지도·
문득 그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피어올랐다·
“희생양이 필요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