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 4장 머리로 싸우는 자들도 있다 (2)
청인의 예측대로 다음 날 군마대와 자객이 운중천과 모용율천을 습격한 사실이 알려졌다· 군웅들은 운중천의 본진이 습격을 당했다는 사실에 경악했고 또 그들의 습격을 멋지게 물리친 모용율천과 무적세가의 위용에 감탄했다·
은둔을 깨고 나타난 절대고수의 등장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모용율천과 무적세가의 등장은 군웅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기에 충분했다·
무인들은 둘 이상만 모이면 모용율천과 무적세가를 이야기했다·
그렇게 모용율천과 무적세가에 관한 이야기로 부현 전체가 들썩일 때 서문화가 부현 지부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서문화의 등장에 사람들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용율천에 이어 서문화까지 강호에 나왔다· 그들이 나왔다는 것은 다른 아홉 하늘도 얼마든지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귀제갈이 나선 이상 전쟁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문화가 신묘한 계략으로 전쟁을 끝내길 기대했다· 그만큼 사람들이 서문화와 아홉 하늘에게 바라는 기대치는 하늘을 찔렀다·
그런 사람들의 기대를 아는지 모르는지 서문화는 부현 지부에서 두문불출하며 외부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의 손녀인 서문혜령조차 그의 얼굴을 본 지 며칠이 되었을 정도이다·
그동안 진무원은 현무대의 숙소에서 편한 시간을 보냈다· 그와 함께 있는 이라고 해봐야 역신위과 고윤우 정도였다·
다른 현무대의 무인들은 세 사람을 대놓고 따돌렸다· 식사도 따로 했고 모임에도 철저하게 세 사람을 배제시켰다· 그나마 진무원에게는 간간이 호의를 보이긴 했지만 세 사람이 함께 있을 때는 싹 무시했다·
고윤우와 역신위를 떠나 자신들의 무리에 합류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진무원은 압박 따위는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듯 유유자적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진무원은 뜻밖의 손님을 맞았다·
“아저씨!”
얼굴 가득 웃음을 짓고 있는 소년을 확인한 순간 진무원도 미소를 머금었다·
“아소구나·”
“어떻게 말도 없이····”
눈가에 물기가 그렁그렁 고여 있는 소년은 아소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잘 지냈느냐?”
“아저씨 덕분에 이렇게 건강해졌어요·”
아소가 자신의 가슴을 쾅쾅 쳤다·
진무원에 의해 목숨을 구함받은 아소는 훌쩍 자라 있었다· 예전의 왜소하고 초췌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젠 또래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건강해 보였다·
진무원에게 치료를 받은 후 아소는 광혈단을 완전히 끊었다· 광혈단을 끊자 오히려 더 건강해지고 머리도 맑아졌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똑같죠 뭐·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최일선에 투입되었어요·”
“용케 살아남았구나·”
“헤헤!”
아소가 해맑게 웃었다· 그런 아소의 모습에 진무원은 왠지 가슴이 짠해지는 것을 느꼈다·
옷 밖으로 드러난 아소의 손등과 목덜미에는 아직 딱지가 채 떨어지지 않은 자잘한 상처가 수도 없이 보였다· 옷에 감춰진 부위에는 얼마나 큰 상처가 자리 잡고 있을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무공도 변변치 않은 아소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악전고투를 했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이제까지 살아남은 아소가 대견했다·
“고생했다·”
“헤헤!”
아소는 마냥 웃기만 했다· 진무원에게 듣는 한마디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밥은 먹었느냐? 아직 식전이면 같이 먹자·”
“저도 그러고 싶지만 빨리 돌아가야 해요·”
“지금?”
“네· 전 탕마군에게 출전 대기 명령이 떨어졌거든요·”
“지금 말이냐?”
진무원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전선은 지금은 소강상태였다· 밀야의 움직임이 잔잔한 이때 탕마군에게 출전 대기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나마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서문혜령의 작품인가?’
서문화가 개입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럴 확률은 무척 희박했다· 부현 지부를 장악하고 있는 이는 담수천과 서문혜령이었다·
서문화가 제아무리 아홉 하늘의 일인이라지만 그들을 무시하고 단독으로 작전을 진행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담수천과 서문혜령은 이곳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어떤 임무를 맡을지 모르지만 각별히 조심하거라·”
“걱정하지 마세요· 이러다가 취소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진무원은 자신 있게 대답하는 아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비록 잠깐의 동행에 불과했지만 그에겐 소중한 인연 중 하나였다· 비록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었지만 마음으로는 그의 무사 귀환을 간절히 기원했다·
“전 이만 가볼게요· 잠깐이지만 아저씨 얼굴을 봐서 너무 좋았어요·”
아소가 진무원에게 인사를 꾸벅 하고는 다시 뛰어나갔다· 진무원은 오랫동안 그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또다시 일단의 무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십여 명의 무인을 이끌고 기세등등하게 걸어오는 무인의 등장에 진무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선두에 선 무인은 바로 척마대의 대주인 심원의였다· 그의 뒤로 좌문호를 비롯한 척마대가 따르고 있었다·
심원의와 척마대는 진무원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누가 봐도 진무원을 찾아왔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심원의와 척마대가 진무원의 앞에 섰다· 진무원은 방금 전까지 좋던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심원의의 눈빛에 은은한 살기가 어려 있다·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척마대의 눈빛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원의가 입을 열었다·
“네가 단천운인가?”
“그렇습니다만?”
“난 심원의다· 모두가 알다시피 척마대의 대주지·”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니 이야기가 쉽겠군· 시간이 없으니 본론만 이야기하지· 왜 척마대에 들어오는 것을 거절했나?”
그제야 진무원은 심원의의 눈에 어린 분노와 살기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척마대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 진무원에 대한 분노가 바로 그 원인이었다·
모두가 선망하고 들어오길 원하는 척마대이다· 비록 이번 전투에서 체면을 조금 구겼다고 하지만 그 위상까지 손상된 것은 아니었다· 심원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 정도로 척마대에 대한 심원의의 자부심은 엄청났다·
아직도 척마대에 들어오려는 자들은 줄을 서고 있고 모든 젊은 무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척마대는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진무원은 그렇게 엄청난 척마대에 들어올 것을 거부하고 한낱 현무대에 만족했다· 명백히 척마대를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심원의는 분노했다· 진무원이 척마대를 구해준 것과는 별개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원의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왜 척마대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나?”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넌 척마대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고 현무대를 택했다· 설마 현무대 따위가 척마대보다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딱히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습니다만·”
“그런데 왜 척마대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 것인가? 그렇게 척마대가 우습게 보였나?”
심원의의 언성이 높아졌다· 아울러 그의 살기도 더욱 고양되었다· 일대를 잠식해 가는 그의 살기에 척마대가 동조했다·
진무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을 한다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의지가 공기를 타고 전해지고 있었다·
진무원은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였다· 그 모습이 심원의와 척마대의 심기를 건드렸다· 진무원이 자신들을 비웃는 것이라 느껴졌기 때문이다·
“척마대보다 현무대가 지내기 편해서입니다·”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나?”
“안 될 것은 또 뭡니까? 나는 척마대처럼 규율이 엄격한 곳보다 이렇게 자유로운 곳이 훨씬 좋습니다·”
“정신이 썩었군!”
심원의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좌문호와 다른 척마대 무인들의 얼굴에도 비슷한 표정이 떠올랐다·
좌문호가 이죽거렸다·
“무공이 조금 강하다고 아주 제멋대로 사는군· 눈에 보이는 게 없나보지? 아니면 척마대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거나·”
“그러면 안 됩니까?”
“뭐?”
진무원의 반문에 좌문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돌아봤다· 곁에 있는 척마대 모두가 똑같은 심정인지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생각하고 추구하는 방향이 다릅니다· 나는 스스로 척마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현무대에 들어왔습니다· 그게 왜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군요·”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군· 어떻게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돼·”
“말조심하십시오· 한번 입 밖에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는 법입니다·”
“흥! 그쪽이야말로 말조심하는 게 어떨까?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렇게 떠드는 거지? 공을 조금 세웠다고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모양인데 그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뒈지는 수가 있어·”
좌문호의 독설은 그야말로 신랄했다· 하지만 진무원은 흥분하지 않았다·
“그럴 능력이나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의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갔다· 명백한 조소였다· 그에 좌문호의 얼굴에 살기가 떠올랐다·
“너 죽인다·”
순간 좌문호가 벼락처럼 검을 뽑아 진무원을 향해 휘둘렀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삼환검문(三環劍門)의 비전 검공인 현월무궁검(弦月無窮劍)이 펼쳐졌다· 삼 년 동안 전장에서 갈고닦은 현월무궁검은 가공할 살기와 응축된 기운을 담고 있었다·
좌문호는 이번 한 수로 진무원의 목숨을 빼앗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따끔하게 혼을 낼 수는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기선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빠각!
하지만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머리가 팩 하니 뒤로 돌아갔다· 눈에 검은자위는 사라지고 흰자위만 남았다·
쿵!
마치 고목처럼 좌문호가 쓰러졌다·
진무원이 그런 좌문호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단봉이 들려 있었다· 좌문호가 현월무궁검을 채 펼치기도 전에 반격한 것이다·
“····”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좌문호가 진무원을 공격한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진무원의 반격은 더더욱 상상도 못했다· 설마 척마대가 이렇게 에워싸고 있는데 저렇게 거침없이 손을 쓸 줄은 정말 몰랐다·
심원의가 잠시 말없이 눈만 끔뻑거렸다· 그 짧은 순간 그의 표정이 수차례 바뀌었다·
의아함에서 당혹스러움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분노로·
“감히!”
심원의가 살기를 폭출시켰다· 하지만 좌문호처럼 경거망동할 수는 없었다·
상대는 단 일격에 좌문호를 항거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솔직히 그가 어떤 수법을 썼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심원의와 척마대의 예상을 뛰어넘는 가공할 무력이었다·
이긴다는 보장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가 제압당하면 강호에 두 번 다시 고개를 들고 돌아다니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꼬리를 만 개처럼 물러날 수도 없었다· 단순히 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척마대의 위신이 달린 사안이었다·
‘놈의 무력이 이 정도였나?’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몸으로는 살기를 발산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번 싸움으로 인한 득과 실 그리고 결과에 따라 자신들에게 미칠 영향이 연이어 떠오르고 있었다·
‘좋지 않아·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날 수도 없다·’
그가 곁눈질로 척마대를 바라봤다·
이미 삼 년이나 함께해 온 그들이다· 심원의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협공!’
어차피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좌문호가 쓰러진 이상 이대로 물러나면 척마대의 위신과 명예가 바닥에 떨어진다·
척마대가 진무원을 둥글게 에워쌌다· 그런 척마대의 모습에 진무원이 나머지 단봉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수도 없었다·
자존심 싸움 이전에 기세 싸움이었다· 여기서 밀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끼릭!
진무원이 단봉을 끼워 맞췄다· 그러자 기다란 장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천봉·”
심원의가 침음성을 흘리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성명절기인 홍옥마수(紅玉魔手)를 펼치려는 것이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순간이다·
“여기서 뭐 하시는 건가요?”
그때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서문혜령이었다· 그녀가 채화영을 대동한 채 연무장에 나타난 것이다·
“다들 통성명이라도 나누시나 보죠?”
서문혜령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심원의는 전신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오한을 느꼈다·
서문혜령의 눈빛은 분명 그를 질책하고 있었다· 무공이나 배경으로 심원의가 서문혜령에게 달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서문혜령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대주님 바쁘지 않다면 제가 먼저 단 소협하고 대화를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흥! 그러지· 우리는 이만 돌아간다·”
물러날 명분을 얻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이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심원의가 진무원을 잠시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척마대의 무인들이 좌문호를 들쳐 업고 그를 따랐다·
진무원은 그들이 물러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사이 서문혜령이 다가왔다·
“우리 잠시 이야기 좀 나눌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