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 3장 같은 곳에 있어도 각자 다른 꿈을 꾼다 (2)
모용율천의 눈 속엔 폭풍이 담겨 있었다· 그 속에서 초한경은 세상의 모든 것을 파괴할 듯한 엄청난 패력을 조금이나마 엿보았다·
절로 몸이 떨려왔다· 그는 이를 꽉 물었다·
모용율천을 죽이기 위해 키워졌지만 본능 속에 각인된 두려움은 아직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모용율천을 죽이면 이 두려움 또한 떨쳐 버릴 수 있을 터· 반드시 죽인다·’
초한경이 기형도를 꼬나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기형도가 붉은 빛을 폭사하기 시작했다·
수라진염도(修羅眞炎刀)·
무적세가의 무공을 파훼하기 위해 만들어진 최강의 도법이다·
초식이나 형식보다는 본능과 감각에 의지하는 도법이 바로 수라진염도였다·
초한경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는가 싶더니 전신의 감각이 활짝 깨어났다· 세상 전체가 붉게 물들어가며 오직 모용율천의 모습만 확대되어 보였다·
그의 모든 감각 신경 의식이 모용율천 단 한 명에게 집중된 것이다· 숨 쉬는 것 생각하는 것 미세한 몸짓 하나까지 모용율천에게 맞췄다·
완벽한 동조화·
상대에게 자신을 맞춤으로써 허점과 파탄을 유도해 내고 단숨에 숨통을 끊는다·
동조화를 끝낸 초한경의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칼을 든 야수에 가까웠다·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거친 살기는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팟!
“크아아!”
초한경이 대지를 박찼다·
기형도가 허공을 그었다·
쿠콰가각!
허공에 다섯 줄기 선이 그어졌다· 야수의 발톱 같은 도강이 공기를 발기발기 찢어발겼다·
하지만 모용율천은 피하지도 않고 초한경이 수라진염도를 펼치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확실히 많은 연구를 한 것 같군·”
초한경은 야수와 같은 모습으로 수라진염도를 펼치고 있었다· 수라진염도의 각 초식은 그야말로 무적세가라 불리는 모용세가의 무공과 철저히 상극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무적세가 최강의 무공 중 하나인 현천구류공(玄天九流功)과는 최악의 상성을 보이고 있었다· 만일 현천구류공을 펼쳤다면 초한경에 의해 철저하게 파훼되고 분쇄되었을 것이다·
그간 밀야가 겪었을 고난의 길이 환히 보이는 듯했다· 금제를 풀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실로 눈물겨울 정도였다·
초한경은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고 있었다· 그는 수라진염도를 극성으로 펼치며 모용율천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모용율천의 옷깃 하나도 스치지 못했다·
모용율천은 마치 유령 같았다· 마치 실체가 없는 유령처럼 모든 공격이 그의 몸을 통과해 지나갔다· 실제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최소한 초한경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초한경은 공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렸다· 그의 공격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파괴력은 배가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한 번도 모용율천의 몸에 손조차 대지 못했다·
초한경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단순히 모용율천에게 타격을 못 입혀서가 아니었다·
지금 그는 극성으로 수라진염도를 펼치고 있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천무전 따윈 단숨에 부숴 버릴 정도의 위력을 가진 극강의 도법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모용율천의 몸에 상처를 내지는 못하더라도 전각 안의 기물이나 벽체 정도는 파괴되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실내의 모든 것이 너무도 멀쩡했다·
탁자도 화병도 벽에 걸린 그림도·
“이게 무슨?”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초한경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모용율천이 웃었다·
“꽤나 오랫동안 비워놓긴 했지만 그래도 내 손때가 묻은 곳이라서 그냥 부서지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말이야·”
모용율천은 수라진염도를 펼친 초한경조차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게 그의 공력을 분쇄시킨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 공격을 흩뜨려 놓았다고?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의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올라왔다·
모용율천이 그를 보며 웃고 있는 모습이 마치 손자의 재롱을 보는 할아버지 같기도 했다· 그 어떤 행동을 하든 극강의 초식을 펼치든 상관없다는 모습이다·
“이야아아!”
초한경은 모든 공력을 기형도에 집중했다· 순간 기형도에서 뻗쳐 나온 도강이 응축되더니 어린아이 주먹만 한 환(丸)이 되었다·
도환(刀丸)이었다·
슈슈슈슈!
초한경은 연거푸 열여덟 번의 도환을 날렸다· 모든 공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초한경은 억지로 버티고 서서 모용율천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반드시····’
그의 마지막 희망이다· 그만큼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이었다·
그런 초한경의 염원이 통한 것일까?
모용율천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이건 좀 위험하군·”
그가 양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가슴 앞에 검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빛도 새어 나가지 않는 완벽한 칠흑의 공간으로 열여덟 개의 도환이 사라졌다· 마치 짐승의 아가리가 먹이를 집어삼킨 듯했다·
초한경이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만큼 그의 상식을 벗어난 광경이었다·
그 순간 모용율천이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초한경의 바로 코앞에 나타났다· 그 모습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초한경은 미처 인지를 못했다·
모용율천이 손바닥을 초한경의 가슴에 살짝 갖다 댔다· 순간 열여덟 번의 폭음이 초한경의 가슴에서 울려 퍼졌다·
콰앙!
“크악!”
초한경이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마치 야수가 난도질한 듯 그의 가슴 어림은 처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초한경이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심맥이 모조리 터져 나가고 장기가 모두 짓이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 없는 상처였다·
“어 어떻게?”
“흠! 공간격참수(空間隔斬手)라는 공부지· 이화접목을 오랫동안 연구하다 보니 이런 놈이 나오더군·”
모용율천이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공간격참수는 상대의 공력을 흡수한 후 거기에 자신의 공력을 더해 돌려주는 수법이다·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엄청난 공력과 세밀한 공력의 운용이 조화를 이뤘을 때만 펼칠 수 있는 수법이었다·
‘이자는 괴물···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죽음을 앞둔 초한경의 눈에 공포의 빛이 가득했다· 그런 초한경을 무심히 내려다보며 모용율천이 중얼거렸다·
“새 판을 어떻게 짠다?”
초한경의 뺨으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야주시여 우리는 너무 무서운 적을··· 부디····’
초한경의 고개가 덜컥 꺾였다· 숨이 끊어진 것이다·
모용율천은 뒷짐을 진 채 창가로 다가갔다· 어느새 밖의 소란은 잦아들고 있었다·
“틀렸는가?”
척천경의 시선이 천무전이 있는 방향을 향했다·
그와 군마대가 난동을 피우는 사이 초한경이 모용율천을 암습하기로 했다· 암습에 성공했다면 지금쯤 변고가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천무전은 여전히 고요하고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그는 실패를 직감했다·
“큭! 그자한테 당하지만 않았어도·”
진무원에게 당한 상처를 치유하느라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 밀야로서는 예상치 못한 피해였다·
‘모용율천을 제거하지 못했다면 이곳에서의 싸움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결심을 굳힌 척천경은 살아남은 군마대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모두 물러난다·”
살아남은 군마대가 정문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 순간 정문 앞을 서른여섯 명의 무인이 가로막았다· 순간 척천경은 전신의 털이란 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잘 벼려진 서른여섯 자루의 검을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의 선두에 이십 대 후반의 젊은 청년이 서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모용율천을 닮은 청년이었다·
“너는?”
“난 무적세가의 모용현이다·”
“그럼?”
“무적수사 모용율천 대협이 나의 조부님이지·”
스스로를 모용현이라고 밝힌 청년의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갔다·
모용현은 모용율천의 손자였다· 오늘은 그가 처음으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었다·
척천경이 노성을 터뜨렸다·
“건방진! 모용율천을 죽이지 못한다면 네놈이라도 죽여 한을 풀어야겠구나!”
“과연 당신에게 그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른여섯 명의 검객이 그의 앞을 막았다·
“무적삼십육검수(無敵三十六劍秀)· 본가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검귀들이지· 우선 이들을 통과해야 할 거야·”
“놈들을 죽여랏!”
군마대가 무적삼십육검수를 향해 말을 달렸다·
이제껏 난전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던 군마대 특유의 돌격술이었다·
순간 이제껏 조용히 있던 무적삼십육검수가 움직였다·
피핏!
그들은 순식간에 군마대 사이로 흩어졌다·
“뭐야?”
군마대가 경호성을 터뜨릴 사이도 없이 무적삼십육검수가 검을 휘둘렀다·
쉬각!
그들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허초나 변초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공간과 공간을 가르는 최단 거리의 검로·
대신 엄청나게 빨랐다· 군마대의 안력으로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컥!”
군마대가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반대로 그들을 도살하는 무적삼십육검은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침묵의 살인자·
무적세가 내에서 그들을 부르는 칭호였다·
“이럴 수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척천경의 볼살이 푸들푸들 떨렸다·
모용현이 조소를 지었다·
“주제도 모르고 무적세가를 끌어낸 죄 죽어 마땅하지· 모두 죽여라!”
무적삼십육검수는 검으로 대답했다·
그들의 몸놀림이 더욱 단순해지고 빨라졌다· 그에 비례해 죽어나가는 군마대의 숫자는 더욱 많아졌다·
순식간에 대부분의 군마대가 죽거나 말에서 떨어졌다· 그중에는 군마대의 이대주인 포영휘도 포함되어 있었다·
“감히!”
포영휘가 이를 악물고 무공을 펼치려 할 때 순식간에 네 명의 무적삼십육검수가 그를 에워쌌다·
푸푹!
그들이 아무런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포영휘의 몸에 검을 찔러 넣었다·
“컥!”
극통에 포영휘가 입을 떡 벌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다섯 번째 무적삼십육검수가 자신의 미간에 검을 찔러 넣는 모습이었다·
“영휘!”
척천경이 급히 포영휘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그의 앞을 가로막는 젊은 무인이 있었다· 바로 모용현이었다·
“당신은 내 몫이다·”
“비켜랏! 놈!”
척천경이 모용현을 향해 거대한 중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중도는 헛되이 지나가고 모용현의 반격이 시작됐다·
녹색 전포를 흩날리며 모용현은 유령처럼 움직였다· 척천경은 그런 모용현의 움직임을 전혀 따라잡지 못했다·
순간 모용현의 양손에서 황금빛 광망이 터져 나왔다·
“챠핫!”
황금신수(黃金神手)·
무적세가 비전의 수공(手功)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척천경은 모용현을 향해 중도를 휘둘렀다·
쩌엉!
“컥!”
순간 황금빛 광망에 휩싸인 척천경이 피를 토하며 말 등에서 나가떨어졌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중도는 손잡이만 남긴 채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척천경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모용현이 그런 척천경을 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본가가 왜 무적세가라고 불리는지 알겠지?”
“끄으으!”
모용현이 발을 들어 척천경의 목줄기를 지그시 눌렀다· 척천경은 한참이나 버둥거리다가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군마대의 대주답지 않은 처참한 최후였다·
모용현이 척천경의 목에서 발을 서서히 뗐다·
그때 운중천 안쪽에서 누군가 급히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쪽 팔이 없는 남자 바로 운중천의 총관인 관대승이었다·
그가 모용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소공자님·”
“흠! 관 총관·”
“어찌 소공자님께서 이런 진흙탕에 발을 디디십니까? 저한테 맡겨주셔도 충분한 일인데·”
“조부님의 명이다·”
“그럼?”
“이제부터는 내가 직접 운중천을 관리하겠다·”
모용현이 웃었다· 그의 웃음은 모용율천과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