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 4장 산 자는 선인(善人)이고, 죽은 자는 악인(惡人)이다· (2)
“끄으으!”
수많은 사람이 널브러져 신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몇 배나 많은 사람이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었다·
대지를 적시는 붉은 핏물과 아직도 피어오르는 초연이 그렇지 않아도 살벌한 풍경에 잔혹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우리 측 피해는?”
“탕마군 백오십에 외당 무인 칠십 명 그리고 정의대(正義隊) 쉰다섯 명이 사망했습니다·”
이제 사십 대 후반의 중년인은 대답을 하면서 상관을 바라봤다·
그는 아수라가 그려진 도를 차고 있었다· 나이는 이제 일흔을 바라보지만 겉보기엔 오십을 넘어 보이지 않았다· 허리는 꼿꼿했으며 어깨는 떡 벌어졌다· 전신에서는 만인을 압도하는 기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라유성도(修羅流星刀) 홍천학·
운중천의 십대장로이자 부현의 무인들을 총지휘하는 책임자였다· 도 한 자루면 천하에 적수가 없다는 철혈의 도객이 바로 홍천학이었다·
홍천학뿐만이 아니다· 지금 이곳에는 십대장로 중 네 명이나 파견 나와 있었다· 그만큼 전황은 좋지 않았다·
문득 홍천학의 시선이 전장 한쪽을 향했다· 그곳에 예순 명 정도의 젊은 무인이 모여 앉아 웃고 떠들고 있었다·
홍천학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저 악귀들·’
척마대라고 이름 붙은 괴물들·
운중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자들이었다· 젊은 무인들의 의기를 한데 모으고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소모품· 분명 초기의 의도는 그랬다·
그래서 정도 이상의 권한을 주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철저하게 틀어졌다·
분명 많은 이가 죽었다· 하지만 척마대는 그들의 권한을 이용해 인원을 보충해 가며 병력을 유지했다· 전장을 겪을수록 강해졌고 살기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운중천은 척마대를 이용해 예상 이상의 성과를 얻었지만 지금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사냥개로 키웠는데 알고 보니 통제가 되지 않는 늑대 그것이 바로 척마대였다·
‘그래도 언젠가 저들도 폐기되겠지·’
홍학천은 저들의 운명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그들 역시 다른 이들과 같은 운명을 걷게 될 것이다· 아홉 하늘의 아성에 도전했던 다른 도전자들과 같이 폐기된 운명을·
하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부담스럽다고 폐기하기에는 저들의 무력이 너무 달콤하고 필요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강해지고 있었고 운중천의 든든한 힘이 됐다·
당장만 하더라도 밀야의 총공세를 막아내는 데 그들의 공이 가장 컸다· 그렇기에 부담스럽더라도 계속 쓸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체하겠군·”
“예?”
중년인이 고개를 들어 홍학천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홍학천은 무심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예? 예!”
“것보다 준비해 두도록·”
“무엇을?”
“곧 거물이 올 거야·”
“거물?”
중년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이름은 왕상명· 홍학산의 부관이자 두뇌라 할 수 있었다·
왕상명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자신의 주군이 거물이라 할 수 있는 자는 몇 명 되지 않았다· 그중 가장 확실한 이들을 왕상명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홉 하늘이 움직인단 말인가?’
오직 그들만이 홍학산에게 거물이란 소리를 들을 만했다·
‘아홉 하늘 중 누가 올까? 풍운번주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으니 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고·’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지만 결론을 내리지는 못 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들 중 몇 명 혹은 한 명이라도 온다면 이곳 전장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지리라는 것을·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그들이 와야 할 만큼 이곳의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간다고도 볼 수 있었다·
‘아니면 밀야 측에서도 그만한 고수가 움직이는 전황이 포착된 것일 수도·’
이유가 어느 쪽이든 그리 희소식은 아니었다·
“머리는 그만 굴리고 일단 이곳이나 수습하지·”
그의 상념은 홍학산에 의해 깨졌다· 실태를 깨달은 왕상명이 얼굴을 붉히며 급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왕상명이 급히 전장으로 뛰어갔다·
그는 살아남은 무인들에게 시신을 수습할 것을 명했다· 물론 척마대는 예외였다· 다른 무인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시신을 수습할 동안 척마대는 여전히 웃고 떠들고 있었다·
진무원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밤부터 새벽까지 이어진 싸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야말로 인세의 지옥도가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장의 광기는 처절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고 인간성은 바닥을 드러냈다·
그곳에 인간은 없었다· 오직 살육에 미친 악귀들만 존재했을 뿐·
지독한 광기의 회오리 속에서 진무원은 매우 차분한 기운을 몇 개 느꼈다· 밀야의 무인들이 발산하는 광기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던 오롯한 존재감·
그들은 직접적으로 전장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저 지켜봤을 뿐이다·
‘탐색인가?’
운중천 무인들의 허실을 계산하는 듯 전장 전체를 훑는 넓은 시야에서 집요함이 느껴졌다· 그들은 운중천의 전술과 역량을 가늠하는 듯했다·
그런 자가 최소 세 명이 넘었다·
바꿔 말하면 전장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자가 세 명이나 동원되었다는 뜻이다·
‘밀야도 승부를 걸 셈인가?’
전장의 분위기가 더욱 거칠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눈치챈 자는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더 포악한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진무원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
시대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사람들은 짐승과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포악해져 갔다· 힘과 권력이 있는 자는 의도적으로 난세를 조장하고 수많은 이가 전쟁을 기회의 장으로 보고 달려들었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이가 죽어나갈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이곳은 이미 거대한 무덤이었다·
진무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 ☆ ☆
부현이 내려다보이는 북쪽 산기슭에 삼남 일녀가 서 있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와 분위기를 풍기는 삼남 일녀는 팔짱을 낀 채 부현을 내려보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기도를 발산하는 이는 바로 화의를 입은 중년의 무인이었다·
화의사신(花衣死神) 사우명·
밀야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초절정의 무인이자 현재 부현을 공격하는 밀야의 대외무력 조직인 광무군(狂武軍)의 수장이었다·
사우명은 곁에 있는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이제 겨우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의 몸에서는 사우명 못지않은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우명은 그런 세 명의 남녀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푸른 전포를 입은 평범한 체구의 남자와 보통 사람들보다 족히 머리는 두개는 더 커 보이는 엄청난 체구의 남자 마지막으로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홍의를 입은 여인·
밀야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천무대(天武隊)라고 불렀다·
푸른 전포를 입은 남자는 천무대의 수장인 궁상화였다· 세상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탁월한 전략가였다·
천무대라는 특수 조직을 이끌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한 임무를 몇 번이나 완수한 문무겸전의 무인이 바로 궁상화였다·
궁상화의 곁에 있는 거한은 천무대의 부대주인 묵원광이었다·
묵원광의 별호는 백인력한(百人力漢) 그 한 명의 힘이 능히 백 명에 당적한다 해서 붙여진 별호였다·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됐지만 밀야의 그 누구도 그의 힘을 의심하는 자는 없었다·
궁상화가 천무대의 두뇌라면 묵원광은 거대한 쇠망치였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수는·
마지막 여인의 이름은 율사희·
천무대의 홍일점이자 역용술과 은신술 배후 공작의 달인이었다· 그녀의 별호는 천변화(千變花)였다· 천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독화(毒花)· 오직 궁상화만이 율사희의 진면목을 알고 있을 뿐 누구도 그녀의 진실된 모습을 알지 못했다·
세 사람이 이끄는 천무대는 밀야 내에서도 아는 자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오직 극소수의 수뇌부만이 그 존재를 알고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이 비밀인 조직이었다·
천무대가 몇 명으로 되어 있는지 나머지 구성원이 어떻게 되는지는 오직 세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현재 밀야의 진영에는 천무대가 은밀히 합류해 있었다· 광무군들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부현을 사이에 두고 전황이 지지부진하자 밀야의 수뇌부에서는 천무대를 투입하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천무대의 투입은 사우명에게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가 정해진 시간 내 부현을 공략했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사우명이 입을 열었다·
“자네 말대로 했네· 어떻게 보았는가?”
“역시 척마대가 문제군요· 그들 때문에 우리 측의 사기는 떨어지고 저쪽의 사기는 배가 되고 있습니다·”
“역시 그렇군·”
궁상화의 대답에 사우명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궁상화라면 그래도 조금은 다른 대답을 내놓을 줄 알았는데 남들과 똑같은 대답을 내놓자 실망을 한 것이 사실이었다·
궁상화의 요청 때문에 기습 공격했고 수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죽지 않았어도 될 목숨들이 수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고 알아낸 것이 겨우 이 정도라면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우명의 생각을 읽었는지 궁상화가 히죽 웃었다·
“하지만 척마대의 허와 실은 분명 알겠군요·”
“정말인가?”
“저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으음!”
궁상화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입술과 달리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섬뜩하게 느껴졌다·
궁상화의 별호는 소면광살(笑面狂殺)이었다·
저 웃는 얼굴에 속으면 안 된다· 웃는 얼굴로 광기 어린 살육을 할 수 있는 차갑게 미친놈이 바로 궁상화였으니까·
궁상화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위에서는 이 끝도 없는 소모전을 이제 끝내고 싶어 합니다·”
“음!”
“부현을 점령한 후에는 기세를 몰아 화산파와 종남파를 칠 겁니다· 척마대는 저희 천무대가 알아서 할 테니까 광무군은 화산파와 종남파를 공략할 방법을 연구해 보십시오·”
“알겠네· 척마대만 없다면야·”
사우명이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의 손등 위로 굵은 힘줄이 지렁이처럼 툭툭 불거져 나왔다· 그런 사우명의 모습에 궁상화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작전은 언제 실행할 텐가?”
“이미 실행하고 있습니다·”
“벌써?”
궁상화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곁에 있던 묵원광이 대신 입을 열었다·
“대주가 움직일 때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후입니다· 흐흐! 고로 이미 척마대를 상대할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뜻입니다·”
“음!”
세 사람이 사우명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사우명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을 무렵 궁상화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얼음이 풀풀 날리는 듯한 냉기 어린 표정에 무저갱처럼 착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 방금 전까지 싱글싱글 웃던 남자와 동일 인물인지 의심이 갈 만큼 극적인 변화였다·
“아이들은?”
“이미 작업에 들어갔어·”
“이번엔 너희의 역할이 중요해· 알지?”
“물론이지·”
“음!”
묵원광과 율사희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는 강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다· 눈빛만 봐도 서로의 의중을 알 수 있었고 상대에게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맡길 수 있을 정도로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강했다·
궁상화가 부현을 바라보았다·
“열흘 안에 접수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