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 3장 불꽃은 찬란함으로 부나방을 유혹한다 (3)
“부현이다·”
곽문정이 탄식 어린 음성을 내뱉었다·
저 멀리 부현이 보였다· 얼마 전에 왔던 부현은 무척이나 부유한 곳으로 화려하진 않아도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부현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전각은 부서지고 무너져 초연을 토해내고 있었고 거리 곳곳에는 집을 잃은 부랑자들이 보였다· 완전히 초토화된 부현의 모습에 세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
“으음!”
진무원의 입술을 비집고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무림 문파 간의 싸움에 한 도시가 완전히 초토화가 되고 수많은 이가 피난을 갔다· 부현은 도시로서의 기능을 잃은 채 밀야와 운중천의 힘겨루기의 장이 되었다·
현재 부현을 장악하고 있는 이는 운중천이었다· 근 보름간의 전투 끝에 밀야를 잠시 밀어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았다· 조만간 밀야가 다시 전열을 재정비한 후 다시 쳐들어올 것임을· 그때도 운중천이 이곳을 장악하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멈추시오·”
그들이 부현에 들어서자마자 운중천의 무인들이 길을 막았다· 그들의 얼굴엔 살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생사를 오가는 싸움을 치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살기가 발산되는 것이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오?”
말을 하면서도 운중천의 무인들은 무기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여차하면 출수하겠다는 의지였다·
곽문정이 앞으로 나섰다·
“저는 곽문정이라고 합니다· 백룡상단에 소속된 보표입니다·”
“백룡상단의 보표?”
“그렇습니다·”
곽문정이 백룡상단의 보표임을 증명하는 신분패를 내밀었다· 진무원과 표승우도 신분패를 건네주었다·
“단천운 표승우라·”
그들은 신분패를 한참이나 살핀 뒤에야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돌려주었다· 백룡상단이 운중천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상단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들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알다시피 이곳에선 전쟁이 한창이오· 각자의 안전은 스스로 챙기는 것이 좋을 것이오·”
“충고 감사합니다·”
곽문정이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했다· 운중천의 무인들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멀어졌다·
부현 곳곳에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만큼 이곳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세 사람은 말을 몰았다·
비록 폐허가 되다시피 했지만 놀랍게도 객잔은 영업을 하고 있었다· 밀야가 부현을 장악하면 그들을 위해 방을 내줬고 반대로 운중천이 장악하면 또 그들을 위해 방을 내주며 객잔의 주인들은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름 모를 객잔 안에는 많은 무인이 있었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무인들은 술을 마시며 긴장을 풀고 있었다·
세 사람이 들어오자 잠시 그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하지만 이내 관심 없다는 듯이 자신들끼리의 대화에 열중했다·
곽문정이 객잔 주인에게 다가갔다·
“방 있나요?”
“며칠이나 머무실 겁니까?”
“한 닷새 정도·”
“일반실은 이미 동이 났고 특실밖에 없는데 괜찮겠습니까?”
“그거라도 주세요·”
곽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이들에겐 전쟁이 재앙이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되고 있었다· 객잔의 주인들도 그중 하나였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밀야와 운중천 양측의 무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부르는 게 값이었다· 특실의 방값이 은자 네 냥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폭리를 취하는 셈이다· 그래도 방이 모자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곽문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진무원과 표승우에게 다가왔다·
“이건 칼만 안 들었지 완전 날강도가 따로 없네요· 열 냥이나 선불로 달라니·”
“어디 여기만 그런 줄 아느냐? 다른 곳은 더해· 그나마 방이 있다니 다행이다·”
표승우가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제대로 된 숙소에서 잠을 잔 적이 없어 온몸이 근질근질거렸다· 따끈따끈한 물에 몸을 씻고 싶었다·
“단 형 난 먼저 들어가서 씻겠습니다· 식사는 나중에 따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표승우가 서둘러 특실로 향했다·
진무원과 곽문정은 빈 탁자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그들은 씻는 것보다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었다·
“이야 분위기 진짜 살벌하네요· 다들 장난 아니게 날이 서 있어요·”
“그럴 수밖에· 저들에겐 잠시의 방심이 목숨을 좌우하니까·”
“그나마 운중천이 부현을 장악하고 있어서 다행이네요· 만약 밀야가 장악을 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마음 편히 식사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겠지·”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객잔 안에 있는 무인들 대부분은 운중천이나 그와 연관된 문파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가 자파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는 무인이었다·
항렬이 높지 않은 자들이나 중소문파의 무인들은 대부분 운중천이 마련한 거처에서 단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객잔에서 머무는 자들 대부분은 그래도 항렬이 높거나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 자들이란 뜻이었다·
실제로 진무원의 전방위 감각에 포착된 몇몇 이의 내공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강호의 절정고수로 분류되어도 충분한 그런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식사를 하면서도 새로이 등장한 진무원 곽문정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진무원과 곽문정의 대화가 평이하게 흘러가자 이내 신경을 끄고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휴!”
음식의 상태를 보자 대번에 한숨이 나왔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하지만 전쟁이 한참인 지역에서 이 정도의 음식도 감지덕지인지라 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그래도 술 한잔을 곁들이니 먹을 만했다· 진무원은 곽문정에게도 술을 건넸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곽문정 또한 한사람의 어엿한 무인이었다· 술을 마실 자격이 충분했다·
“헤헤!”
곽문정은 진무원과 술잔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우상과 같은 자리에서 술잔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른 대접을 받는 것 같았다· 실제로 진무원은 곽문정을 어엿한 어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술잔을 교환할 때였다· 갑자기 객잔의 문이 왈칵 열리며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 열 명이 넘는 무인들이 한꺼번에 들어오자 객잔 안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그들의 등장에 객잔의 주인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어 어서 오십시오·”
“주인장 우리 자리 있지?”
“물론입지요· 이미 비워놓고 있습니다·”
객잔의 주인은 무인들을 한쪽에 비워놓은 자리로 안내했다· 무인들을 바라보는 객잔 주인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눈앞에 있는 무인들은 다른 무인들과 격이 다른 존재들이었다· 객잔의 주인은 그런 그들의 위명과 잔혹함을 익히 알고 있었다·
‘척마대· 전장의 악마들·’
그들은 바로 척마대였다·
부현을 탈환하는 데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존재들· 밀야에게는 마군(魔軍)이라 불리고 운중천의 무인들에게는 구세주라고 불리는 존재들·
척마대의 가장 뒤쪽에는 부대주인 좌문호가 거만한 표정으로 객잔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능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무인이었다· 적에겐 악귀처럼 잔인하지만 그 덕에 많은 이가 목숨을 구함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좌문호와 척마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두려움과 동경의 빛이 공존했다·
좌문호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당연하다는 듯이 즐기고 있었다·
그에겐 무소불위의 힘이 있었다· 척마대의 대주인 심원의 외에는 그를 통제할 만한 존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오만함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좌문호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상석에 앉았다· 그런 그의 전신에서는 좌중을 압도하는 살기와 존재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많은 이를 죽인자만이 가질 수 있는 거친 살기에 객잔 안의 모든 사람이 숨을 죽였다·
좌문호가 객잔의 주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술을 가져오게·”
“얼마나 가져올까요?”
“오늘 우리가 죽인 자들의 피만큼 많이· 흐흐흐!”
“아 알겠습니다·”
객잔 주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만큼 좌문호에게서 느껴지는 혈향은 강렬했다· 후각을 송두리째 마비시킬 만큼·
진무원이 좌문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삼 년 전과는 너무나 달라진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 좌문호의 모습은 정파의 무인이라기보다는 사파에 가까웠다·
곽문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요즘은 척마대를 전장의 귀신들이라 부른다는군요· 특히 좌문호는 잔인하기로 유명해서 같은 운중천의 무인들조차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꺼린다고 해요·”
“그럴 것 같구나·”
진무원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같은 편에게조차 두려움을 주는 존재· 전장의 광기에 침습 당한 좌문호는 그런 괴물이 되어 있었다·
‘운중천은 저런 괴물들을 얼마나 더 만들었을까?’
객잔 안에 있던 자들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괜히 척마대와 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좌문호와 척마대는 그런 모습을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웃었다·
장내에 남은 자들은 진무원을 비롯해 몇 명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조차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장내에는 오직 척마대가 웃고 떠드는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이제 놈들도 쉽게 도발하지 못하겠지? 놈들의 척후대를 그렇게 박살 내놨으니까·”
“흐흐! 물론이지· 우리 척마대에게 걸리면 뼈도 추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당분간 조심하겠지·”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는군· 갈증이 나서 죽겠어·”
“나도 그래· 이봐 주인장· 어서 술부터 가져와·”
“예 예! 지금 갑니다·”
객잔의 주인이 급히 커다란 술동이를 들고 왔다·
술동이를 내려놓자마자 척마대 무인들이 커다란 술잔에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먹이를 탐하는 짐승처럼 게걸스럽게 술을 마셨다· 그들의 입가와 가슴을 따라 술이 흘러내렸다·
좌문호는 그런 척마대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잔혹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척마대가 된 이후 그들의 행보는 항상 위태위태했다· 항상 최전선에 투입되었고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었다· 평범한 사람은 견딜 수 없을 위기 상황을 수도 없이 타개했고 그때마다 극적인 보상이 주어졌다·
그렇게 신경은 무뎌져만 갔고 이제는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라면 흥분도 하지 않게 됐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되었다·
이젠 자신들이 인간인지 아니면 살육에 미친 짐승인지 구별조차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누구 한 명 그들에게 감히 반발을 하지 못했으니까·
좌문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객잔 안을 둘러봤다· 그의 시선과 부딪칠까 봐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단 한 명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진무원이었다·
순간 좌문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어디선가 한 번쯤 본 듯한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진무원은 역용을 하고 있었다· 지금 그는 진무원이 아닌 단천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봤을 때 진무원은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고 있었다·
“흐음!”
“왜 그러십니까?”
척마대의 무인 중 한 명이 그런 좌문호를 보고 물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좌문호가 보고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가 심기를 상하게 했습니까?”
좌문호의 대답 여하에 따라 살수를 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좌문호가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진무원과 곽문정에게 다가갔다·
척마대의 다른 무인들이 그런 무인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그들은 잠시 후에 벌어질 광경을 상상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무언가 문제가 일어날 것을 직감한 다른 무인들이 서둘러 자리를 떴고 객잔 안에는 진무원과 척마대만이 남았다·
진무원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척마대의 무인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시비를 걸기 위해 다가오는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살기를 흘리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에게 시비를 걸고 박살 냄으로써 우월감을 느끼는 것· 일종의 여흥이었고 그들만의 놀이 문화였다·
곽문정이 그들의 적의를 느끼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가 곁눈질로 진무원을 바라봤다· 하지만 진무원은 그리 경계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진무원의 전방위 감각은 그들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암습자들·’
순간 객잔의 지붕이 와장창 부서지며 검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떨어져 내렸다·
“척마대 그 목을 취하러 왔다·”
검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의 목표는 바로 척마대였다·
“흐흐! 부나방들이 불을 보고 달려드는구나·”
좌문호가 술잔을 와그작 우그러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껏 수없이 싸운 존재· 상대는 밀야였다·
객잔 안에 혈풍이 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