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 1장 운명은 낮은 곳으로 흘러 고이게 마련이다 (2)
진무원의 눈빛은 더할 수 없이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유심히 살폈다·
“인원은 대충 이백여 명 정도인가?”
바닥에 난 발자국을 헤아려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적들은 무척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최소한의 짐만 소유한 채 오직 경공술만 써서 이동하는 것이다· 자연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분명 당문에서 입은 피해가 적잖을 텐데도 그들은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상식을 벗어난 기동력이었다·
진무원과 무인들은 적들의 흔적을 추적했다· 적의 흔적은 남쪽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이쯤 되면 제아무리 바보라 해도 알 수 있었다· 적들의 목표가 아미파라는 것을·
사천무림을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
그중 청성과 당문이 당했고 나머지 하나인 아미파가 그들의 목표가 되었다· 만일 아미파까지 무너지게 되면 한동안 사천무림은 힘을 잃게 된다· 그야말로 천하 대란의 시기에 사천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게 되는 셈이다·
“저들이 원하는 것은 사천무림의 구심점을 제거해 자중지란에 빠지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운중천과 밀야의 전쟁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
운중천과의 전쟁이 극에 달한 지금 가장 확실한 전력인 사대마장 중 하나를 빼돌려 사천성을 정벌하는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었다·
진무원의 눈에도 저들의 의도가 보였다·
“놈들이 아미파에 도착하기 전에 따라잡아야 합니다·”
“놈들에게 반드시 내가 새로 만들어낸 일천광주(一千狂酒)를 퍼부어주고 말 것이다·”
당기문이 상처 입은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렸다·
일천광주는 그가 근래에 새로 만들어낸 극독으로 한 방울만으로도 수백 명의 목숨을 빼앗을 만큼 위력이 엄청났다·
당문이 혈겁을 당한 이후 그는 수시로 노기를 분출하고 있었다· 가장 존경하는 가주와 사랑하는 혈족들의 죽음은 그의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분명 그렇게 될 겁니다·”
“놈들이 누구든 간에 살아서 사천 땅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뒤를 따르던 활독당과 검혈대의 무인들이 흠칫 몸을 떨 정도로 당기문의 살기는 처절했다·
그 모습을 보며 진무원이 나직이 한숨을 토해냈다·
전쟁은 사람을 송두리째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그 대상이 설마 당기문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당기문의 모습과 그가 처음 만났을 때의 당기문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명류산의 죽음으로 피폐해졌던 심신이 거의 회복되어 갈 때 즈음 당문이 혈겁을 당했고 그로 인해 당기문의 정신은 다시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당기문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이가 당기문과 같은 전쟁의 후유증을 겪고 있었다· 이런 비극을 끝내는 가장 빠른 길은 바로 운중천과 밀야의 전쟁을 끝내는 것뿐이었다·
진무원과 검혈대 등은 경공술을 펼쳐 남천명과 염마대를 추적했다· 당기문은 활독당의 무인들이 번갈아 가며 등에 업었다· 그렇게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렸다·
그들에게 휴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잠도 자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아껴 사흘을 달린 끝에 아미파가 있는 아미산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 멀리 아미산이 보였다·
아미산에는 복호사 보국사 만년사 금정사 우심사 등 수많은 사찰이 존재한다·
언제부턴가 아미산에 들어서기 시작한 사찰들· 처음엔 별다른 교류도 없이 각자 수행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찰들은 차츰 교류를 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금정사와 복호사가 주축이 되어 본격적으로 무파(武派)로 거듭났다·
금정사와 복호사가 주축이 된 수많은 사찰의 연합체 그것이 바로 명문 아미파의 실체였다· 평소 각 사찰은 본래의 취지에 맞게 운영한다·
불도에 정진하는 승려들은 목적에 부합하는 사찰로 들어가고 무공을 익히고 싶은 승려들은 복호사와 금정사로 들어간다· 금정사에는 여승이 많고 복호사에는 남승이 많았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금정사의 활동이 많다 보니 아미파는 여승들의 문파로 인식되고 있었다·
구대문파의 하나였지만 평소 아미파의 대외 활동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문주 무영사태와 아미파의 분위기 자체가 은둔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청성파나 당문과도 최소한의 교류만을 해왔을 뿐 아미파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당기문은 달랐다·
“겉보기엔 무방비 상태로 보이지만 기실 사천성에 있는 문파들 중 가장 공략하기 어려운 곳이 바로 아미파다· 사찰 전체가 아미산 곳곳에 퍼져 있어 어느 곳에서 접근을 해도 절대 그들의 이목을 피할 수 없고 유사시에는 그 모든 전력이 순식간에 금정사에 모인다· 문주인 무영사태는 평소 온건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외유내강의 성향을 가지고 있어 불의에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다·”
당기문은 독초를 구하기 위해 아미산에도 수시로 올랐고 그때 무영사태 등과도 교분을 나눴다· 아미파와 무영사태는 당기문에게 사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얼마든지 아미산을 뒤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때 당기문은 무영사태가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보다 더 강단 있고 단호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영사태라면 지금쯤 당문과 청성파에 변고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대비하고 있을게야·”
광원의 검문소에서 몰살당한 무인들 중에는 아미파에서 파견한 무승도 있었다· 그들에게서 연락이 끊어진 이상 무영사태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을 것이 분명했다·
진무원도 진심으로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청성과 당문이 힘을 잃은 지금 아미파마저 무너지게 되면 사천성은 무주공산이 되게 된다· 운중천이나 밀야 중 어느 한 곳만 들어와도 그들 손에 넘어가게 된다·
그런 최악의 상황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자연 경공술을 펼치는 진무원의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어둠에 잠긴 아미산 정상 부근에서 강렬한 불길이 치솟아올랐다· 당기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벌써 놈들이 아미파를 습격한 것인가?”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급히 진무원에게 말했다·
“먼저 가거라· 나는 금방 뒤따라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진무원이 대답과 함께 앞으로 내달렸다· 검혈대와 활독당이 뒤를 따랐지만 그들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무영사태가 아마파의 문주가 된 지 벌써 이십 년이 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별문제 없이 아미파를 이끌어온 것 자체가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 설명해 주고 있었다·
무영사태의 나이 올해로 쉰다섯이었지만 외모는 겨우 서른 살 초중반 정도로 보였다· 얼굴엔 주름살 하나 없었고 검고 큰 눈동자는 세상의 모든 지혜를 모아놓은 듯 깊고 유현한 빛을 하고 있었다·
무영사태의 손에는 아미파의 보검인 상월검(上月劍)이 들려 있었다· 상월검엔 멸사(滅邪)의 기운이 깃들어 있는데다가 날카롭기가 천하제일이라 신검(神劍)이라 불렸다·
무영사태는 상월검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날카로워서 사람을 쉬이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상월검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간밤에 아미파를 침습한 적들에 대한 분노로 그녀의 얼굴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 분노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시주들은 누구시기에 이 야밤에 방문하셨소? 이곳은 부처님의 도량· 향화를 피우려면 낮에 오셔도 충분하셨을 텐데·”
“부처가 꼭 낮에만 향화객을 받는 것은 아닐 진데 어찌하여 그대는 낮과 밤을 가리는가?”
대답을 하는 이는 바로 남천명이었다· 그가 이백여 명의 염마대와 함께 아미산을 방문한 것이다·
염마대의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수많은 무승이 목숨을 잃고 전각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대비를 한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이다·
“아미타불! 청성파와 당문의 혈겁도 시주들의 행사겠구려?”
“그대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 다시 물어보는 고약한 취미가 있는 모양이군·”
남천명의 대답에 무영사태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청성파와 당문이 혈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게 불과 하루 전이다· 그사이 대비를 한다고 했는데 그녀의 예상보다 적들의 행사가 더 빨랐다· 설마 이렇게 빨리 아미파를 급습할 줄은 무영사태도 예상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묻겠소· 시주 혹시 밀야에서 나오셨소?”
“밀야의 사대마장 중 한 명이 바로 나라네·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청풍마영이라고 부르더군·”
순간 무영사태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아미타불! 밀야가 사천성에까지 들어오다니· 이제 천하에 안전한 곳은 존재하지 않는구나·’
밀야의 피바람은 이미 사천성의 패자인 청성파와 당문을 휩쓸었다· 아미파가 막지 못하면 사천성 전역이 피바람에 불 것이다·
무영사태가 크게 외쳤다·
“아미타불! 살계를 열겠다· 전 제자들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마음가짐으로 적들을 상대하라·”
그녀의 웅혼한 외침에 아미파 제자들이 전의를 북돋으며 침습한 적들을 노려봤다· 그녀들의 얼굴엔 결사항전의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남천명은 오늘 일이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보다 아미파의 반응은 훨씬 더 빠르고 즉각적이었다· 원래는 아미파에 최대한 은밀하게 타격을 줄 생각이었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들통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전면전을 치를 수밖에 없게 됐다·
이전까지는 기습의 묘와 상성의 우위를 이용해 피해를 최소화했지만 아미파가 단단히 대비를 한 채 기다리고 있는 이상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염마대의 많은 이가 죽거나 다칠 것이다· 어쩌면 몰살을 당할 수도 있다· 그래도 남천명은 걱정하지 않았다· 염마대는 본래 그런 목적으로 키워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아미파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중심인 무영사태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천무림의 세 축이 통째로 무너지는 결과를 얻는다·
남천명이 무영사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애초부터 그의 목표는 무영사태 단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 아미파 무인들을 상대하는 것은 염마대의 몫이었다·
무영사태가 상월검을 곧추세웠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서릿발처럼 차가운 기도가 일대를 잠식해 나갔다·
일파의 종사로서 부족함이 없는 위압감과 기도였다· 거기에 신검이라 할 수 있는 상월검이 더해지자 천하의 남천명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단숨에 무영사태의 무공을 알아보았다·
“일자수미검(一字須彌劍)인가?”
명문 아미파의 장문인만 익힐 수 있는 비전 검공이 바로 일자수미검이었다· 겨자씨만 한 점과 점을 연결하는 최단의 검로가 특징이다· 그만큼 검로도 단순했다· 하지만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가히 파천(破天)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세상의 중론이었다·
“일자수미검 꼭 한번 견식해 보고 싶었지·”
남천명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강자존의 대지에서 살아남아 사대마장의 자리에 오른 남천명이었다· 자연 그의 핏속에는 승부사의 기질이 흐르고 있었다·
풍렬일기공(風烈一氣功)·
남천명을 청풍마영으로 존재하게 한 성명절기가 발동됐다·
그의 몸이 바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파앙!
소리를 넘어서는 속도에 공기가 터져 나갔다· 강력한 충격파에 무영사태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무영사태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상월검을 휘둘렀다·
일자수미검의 절초인 수미생령(須彌生靈) 수미검향(須彌劍香) 등이 연이어 펼쳐졌다·
순식간에 은빛의 검막이 무영사태의 몸을 휘감고 남천명의 몸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튕겨 나가는 속도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다시 남천명이 달려들었다·
풍렬일기공의 탄형시(彈形矢)의 초식이 발동됐다·
쿠콰콰각!
푸른 잔영과 은빛 검영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고 사방으로 후폭풍이 퍼져 나갔다·
두 사람의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인간의 안력으로 포착할 수 있는 속도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다·
쿠와앙!
격돌의 여파에 굉음과 함께 인근에 있던 전각의 지붕이 터져 나갔다· 뒤이어 기둥이 두 동강이 나고 벽체가 부서지면서 거대한 전각이 송두리째 폭삭 무너졌다·
고요하기만 하던 불문의 성지에 파괴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무영사태는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하지만 전력을 다하고서도 남천명을 상대로 완전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무영사태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상월검을 잡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연이은 격돌에 제일 먼저 검을 잡고 있는 손이 타격을 입은 것이다·
마치 거대한 철판을 맨손으로 후려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손바닥 안의 뼈가 모조리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상월검이었지만 상대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만들지 못했다· 상대의 몸을 휘감은 정체불명의 푸른 기류가 상월검을 튕겨 내는 것이다·
‘호신강기로 신검인 상월검을 튕겨 내는 것인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미파의 장문인인 무영사태가 혼신의 힘을 다해 펼치는 일자수미검이었다· 이 정도라면 다른 구대문파의 장문인이라 할지라도 큰 곤경에 처했어야 한다· 하지만 남천명은 그 어떤 타격도 받지 않은 듯 무영사태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절망감이 무영사태를 엄습했다· 난생처음 자신이 무기력하다고 느껴졌다·
쉬앙!
칼날 같은 바람이 그녀를 휘감았다·
무영사태가 이를 악물며 일자수미검의 마지막 초식인 수미내우주(須彌內宇宙)의 초식을 펼쳤다·
“챠앗!”
그녀의 몸에서 강력한 빛 무리가 터져 나왔다·
무영사태와 남천명을 연결하는 최단 거리의 은색 선의 질주·
순간 남천명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몸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이다·
티티팅!
상월검이 튕겨 나가며 궤도가 바뀌었다·
무영사태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남천명의 미소가 그녀의 망막을 가득 채웠다·
남천명의 활짝 펴진 손바닥이 그녀의 가슴을 직격했다·
퍼엉!
“커헉!”
무영사태가 피를 토하며 뒤로 훨훨 날아갔다· 중상을 입고 만 것이다·
남천명이 다시 무영사태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의 몸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확실하게 숨통을 끊으려는 것이다·
그의 손바닥이 다시 활짝 펼쳐졌다·
천인역신수(千人力神手)·
성인 남성 천 명이 한꺼번에 주먹을 내지르는 힘이 담겨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히 파천황의 위력이 그의 일수에 내재되어 있었다·
죽음을 예감한 무영사태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미타불! 세존이시여 아미파를 부디 굽어 살피소서·’
콰아앙!
순간 일진광풍과 충격파가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무영사태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그녀를 안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