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 5장 붉은 구름이 끼면 피비가 내린다 (3)
아소는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유건엽의 보살핌이 있었다·
유건엽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아소를 보살피는 일에는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다· 젖은 수건으로 열을 식혀주고 죽을 끓여와 먹였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유건엽은 마차에 타고 있는 아이들과 친해졌다·
유건엽과 아소 그리고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아이들은 모두 끔찍한 전장을 경험했다·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깊은 공감대가 있었다·
비록 몇 마디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동정했다· 눈빛만으로도 정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유건엽이 그렇게 아이들과 친해지고 있을 때 진무원은 마차를 몰면서 무공을 구상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검 이외의 무공에 관심을 둔 적이 없는 진무원이다· 계류보는 만영벽에 있던 무공이고 쇄병지는 검을 익히는 과정에서 파생되어 나온 무공이다· 자연스럽게 익히고 펼쳤지만 딱히 그 이상의 것을 노리지는 않았다·
그에겐 멸천마영검이라는 궁극의 검공과 만영결이라는 희대의 심공이 있었다· 두 가지 무공을 참오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유건엽에게 권공을 가르치기로 결정한 이상 권(拳)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그렇다고 한가하게 무공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언제 군마대가 들이닥칠지 몰랐기에 대비를 해야 했다·
종리무환과 철기문의 무인들 역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무언가 나름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때 진무원이 모는 마차로 누군가 다가왔다· 고천후가 타고 있는 말을 마차 옆으로 바싹 붙이며 입을 열었다·
“공작문의 단 소협이라고 했는가?”
“그렇습니다 고 대협·”
“일전에 보니 무공이 상당한 것 같더군·”
“감사합니다·”
홍악산을 상대하느라 진무원의 무공을 제대로 살펴볼 겨를이 없던 고천후이다· 하지만 종리무환이 워낙 칭찬하는지라 나름 관심을 가지고 진무원을 살펴봤다·
‘느껴지는 내력은 그다지 특출한 것이 없는데 벌써 내공을 갈무리할 수준에 이른 것인가?’
정말 그렇다면 나이에 비해 놀라운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천후는 진무원의 무위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진무원이 젊은 축에서 강하다고 하지만 자신을 당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의 관심사는 진무원이 아니었다· 그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아이의 이름이····”
“유건엽입니다·”
“좋은 이름이군· 그래 자네의 제자인가?”
“아직은 제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가?”
고천후가 반색했다·
“왜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자네가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나에게 넘기는 것이 어떻겠는가? 내가 그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싶네·”
“하지만 고 대협에겐 이미 제자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제자? 산하 말인가? 물론일세· 그 아이가 내 의발을 이어받을 걸세· 하나 제자가 꼭 한 명만 있어야 하는 법은 없잖은가? 건엽이를 내게 보내게· 내가 잘 가르치겠네· 건엽이도 제대로 된 스승에게서 무공을 배우는 것이 미래를 위해 좋지 않겠는가?”
“미래?”
“그렇다네· 강호라는 게 단순히 무공만 강하다고 해서 제자를 잘 가르치는 것은 아니잖은가? 괜찮은 사문이 있어야 무시를 받지 않고 제대로 된 스승 밑에서 배워야 강호의 배분도 뒤처지지 않지·”
고천후의 얼굴엔 자신만만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실제로 그는 무시 못할 배분을 갖고 있었다· 큰 명성을 갖고 있는 전대의 고수· 그의 제자라면 구대문파의 일대제자 정도의 배분을 갖게 된다· 강호에서 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는 뜻이다·
고천후는 진무원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 자신했다· 그만큼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컸고 진무원이라는 존재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온 진무원의 대답은 매우 뜻밖의 것이었다·
“고 대협께는 죄송하지만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 제안을 거절하는 건가?”
“거절하는 게 아니라 제가 결정할 사안이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고천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건엽이의 미래가 걸린 일입니다· 건엽이가 결정하는 게 옳은 일 같습니다·”
“아니 그 어린것이 무슨 결정을 한단 말인가? 보내기 싫다면 싫다고 솔직히 말하게·”
고천후의 음성이 높아졌다· 얼굴엔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진무원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고 대협은 분명 건엽이의 가능성을 크게 봤기 때문에 그런 제안을 했을 겁니다·”
“맞네· 그 아이의 골격은 내가 처음 보는 극상승의 것이네·”
고천후의 음성에 탐욕이 가득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고 대협이 그렇게 극찬할 정도의 아이라면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할 머리도 있을 겁니다·”
“으음!”
“그렇다면 건엽가 결정하게 하시지요· 그 아이가 고 대협을 선택하면 고이 보내드리겠습니다·”
“좋네! 그렇게 하세!”
결국 고천후는 진무원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내심 유건엽이 반드시 자신을 따를 거라는 자신감이 내포되어 있었다·
‘세 살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
귀영창(鬼影槍)이라는 별호를 괜히 얻은 것이 아니다· 자신의 창법을 가르쳐 준다면 유건엽도 반드시 따를 거라고 자신했다·
“건엽아 잠시 나오거라·”
진무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차 안에서 유건엽이 나왔다· 유건엽은 진무원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이분 고 대협이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싶다는구나·”
유건엽의 시선이 고천후를 향했다·
고천후는 한껏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져야 했다· 유건엽이 잠시의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느냐?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러느냐? 나 귀영창 고천후다· 강호에서 노부의 이름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나한테 창법을 배우려고 하는 자들을 줄을 세우면 족히 수백여 리는 늘어설 것이다·”
“····”
“나한테 무공을 배우면 강호에서 감히 너를 무시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전 아저씨에게 무공을 배울 거예요·”
고천후의 수염이 푸들푸들 떨렸다·
“왜이냐?”
“그냥··· 아저씨에게 무공을 배우고 싶어요·”
유건엽의 단호한 말에 고천후의 얼굴에 수치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설마 어린아이가 이렇듯 단호하게 자신을 거부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이자가 나보다 낫다는 이야기냐? 이 귀영창 고천후보다?”
“그런 건 몰라요· 그냥 아저씨에게 무공을 배우고 싶을 뿐이에요·”
“크윽!”
고천후는 할 말을 잃었다·
그냥 진무원에게 배우고 싶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어린아이를 상대로 드잡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였다· 아직은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가 건방지구나· 감히 사부님의 제안을 그렇게 거절하다니·”
고천후의 곁에 어느새 제자 기산하가 다가와 유건엽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어디서 사부님과 같은 고인을 만날 수 있다고 그런 건방을 떠는 것이냐?”
“····”
“어디서 그렇게 눈깔을 부라리는 것이냐? 네가 정말 혼구멍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기산하에겐 하늘 같은 사부 고천후였다· 그는 사부 고천후가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화를 내고 있었다·
유건엽이 진무원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입은 굳게 다물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승을 선택하고 따르는 것은 그의 몫이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진무원에게 무공을 배우고 싶었지 고천후를 따르고 싶지 않았다·
진무원이 유건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기산하의 시선이 진무원을 향했다·
“당신도 주제를 모르고····”
“말은 일단 한 번 뱉으면 절대 주워 담을 수 없지· 그래서 말을 할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진무원의 말은 매우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기산하와 고천후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특히 기산하의 표정은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었다·
“지금 감히 나를 훈계하는 겁니까?”
“감히라는 단어는 네가 쓸 만한 것이 아니다·”
“이익!”
기산하가 등 뒤에 메고 있던 창을 꺼내 들어 진무원을 겨눴다· 그런 제자의 모습에도 고천후는 말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제자를 통해 진무원의 정확한 무위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산하가 외쳤다·
“덤벼라! 내 당신의 그 오만한 콧대를 꺾어주마!”
기산하의 큰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멀리서 철기문도들과 앞으로의 계획을 짜고 있던 종리무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안····”
그 순간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기산하의 몸이 뒤로 날려갔다· 족히 오 장여는 날려간 기산하의 몸뚱이는 바닥을 십여 바퀴나 나뒹굴었다·
“산하야!”
고천후가 놀라 소리쳤다·
진무원이 어떻게 손을 쓰는지 보지도 못했다· 기산하가 진무원에게 창을 겨누는 순간 무언가 번쩍였고 정신을 차려보니 기산하의 몸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감히 내 제자를 상하게 하다니!”
그가 이빨을 뿌득 갈며 창을 꼬나 쥐었다· 당장에라도 진무원과 생사를 겨룰 기세였다· 하지만 그는 쉽게 진무원을 공격하지 못했다·
진무원은 고요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엔 한 치의 흥분도 격동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차분히 그를 바라볼 뿐이다· 그런데 그 눈빛에 전신이 얼음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서늘해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 종리무환은 그가 가늠할 수 없는 고수라고 했다· 고천후는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평소 그의 성정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진무원에게 달려들어야 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이놈!’
분명 무방비 상태로 보이는 진무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올라왔다· 그의 육감이 미친 듯이 위기를 경고하고 있었다· 은거를 깨고 세상을 나온 이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진무원이 입을 열었다·
“나는 분명히 너의 사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나를 공격한다는 것은 네 사부의 인격마저 짓밟는 짓· 어디서 그런 못된 버릇을 배운 것이냐?”
진무원의 음성은 추상같았다· 하지만 기산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순간 이미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진무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은 기산하가 아닌 고천후에게 하는 말이었다· 제자를 잘못 가르치고 타인에게 무례한 고천후를 간접적으로 꾸짖는 것이다·
“놈!”
고천후가 그 사실을 깨닫고 이빨을 뿌득 갈았다· 하지만 섣불리 진무원을 공격하지는 못했다·
많은 이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채약란과 싸울 때와는 다른 상황이었다· 그때는 명분이 있었고 졌어도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명분도 없었고 자칫 졌다가는 그런 개망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진무원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었다· 채약란과 싸울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계산이 나왔는데 진무원을 상대로는 그 어떤 것도 가늠할 수 없었다·
‘어디서 이런 놈이····’
잃을 것만 잔뜩 있고 얻을 것은 하나도 없다·
이대로 물러설 수도 그렇다고 싸울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때 종리무환이 나섰다·
“두 분이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싸워봤자 양쪽이 모두 손해이니 이쯤에서 그만하시지요·”
“그럴 수는 없네! 내 제자가 저자에게 당했다네! 제자를 공격한 것은 나를 공격한 것이나 마찬가지! 내 저자와 생사결을 겨루겠네!”
고천후가 짐짓 큰소리를 쳤다· 그래도 최후까지 자존심을 굽히진 않겠다는 뜻이다·
종리무환은 그런 고천후의 의도를 짐작하고 허리를 숙였다·
“고 대협이 노여워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잠시만 노여움을 거둬주십시오· 두 분이 은원을 해결하는 것은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지금은 탕마군과 낭인들을 살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크흠!”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알겠네· 이번에는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지· 하나 내 반드시 다음번에는 저자와 결판을 내겠네· 그때는 말리지 말게·”
“알겠습니다·”
종리무환이 고개를 숙이자 고천후가 기절한 기산하를 어깨에 짊어지고 자리를 떴다·
“쯧쯧! 못난 놈 같으니라구· 내가 부끄럽구나·”
고천후가 사라지자 종리무환이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손속에 사정을 두셔서 감사합니다 단 소협·”
종리무환의 입가엔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진무원은 상상 이상의 고수였다· 비록 철기문에 영입한 고천후가 망신살이 뻗쳤지만 대신 그들이 생존할 확률이 높아졌다·
‘이번 위기만 넘기면 분명 그를 영입할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 진무원이 고개를 들어 동쪽 하늘을 바라봤다·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살기가 담긴 광포한 바람이·
종리무환의 시선이 진무원이 바라보는 곳을 향했다· 잠시 후 그의 표정이 변했다·
“벌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