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 6장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은 옛일을 쉽게 잊어버린다· (3)
부현 지부를 나온 곽문정은 원래 목적지인 망혼로 북쪽에 있는 빈민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삼 년의 흑암대전 기간 동안 수많은 이가 삶의 터전과 부모 형제를 잃었다· 부현의 빈민가는 그런 이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형성된 곳이었다·
여느 빈민가가 그렇듯 이곳에도 암울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거리엔 파리가 날아다니고 오물이 썩으면서 나는 지독한 악취가 후각을 자극했다·
거리 곳곳엔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힘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마치 영혼을 잃은 것 같은 그들의 눈빛에 곽문정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 부현까지 오는 동안 내내 보아오던 모습이다· 중원 전역에 저런 아이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결국 밀야와의 전쟁이 길어질수록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이는 저렇게 힘없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언제 끝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곽문정은 빈민가에서 가장 커 보이는 모옥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옥의 창문에는 다 뜯어진 붉은 이불이 걸려 있었다·
‘분명 붉은 이불을 창가에 걸고 기다린다고 했지·’
곽문정이 모옥의 문을 두들기자 안에서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시오?”
“백룡상단에서 왔습니다·”
“백룡상단?”
그제야 문이 열리고 육십 대 초반의 노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노인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들어오시구려·”
“감사합니다·”
곽문정은 노인에게 고개를 숙이며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모옥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커 보였다·
노인이 곽문정의 위아래를 살피며 말했다·
“생각보다 어린 분이 오셨군요·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곽문정이라고 합니다·”
“곽 소협이시구려· 어쨌거나 잘 오셨습니다·”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빈민가에 사는 사람답지 않게 현기 어린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비쩍 마른데다 얼굴엔 혈색이 하나 없어 병색이 완연해 보였다·
잠시 곽문정을 바라보던 노인이 갑자기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노인은 마치 폐가 찢어진 것처럼 그렇게 한참이나 기침을 했다·
곽문정은 그런 노인의 등에 손을 대고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밀려든 진기는 노인의 폐를 진정시켰다· 그제야 노인의 얼굴에 잠시 혈색이 돌아왔다·
“고 고맙습니다·”
노인이 입을 막고 있던 손수건을 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하지만 곽문정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노인의 손수건에 묻은 검붉은 핏자국을 보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토혈한 것이 아니었다· 핏속에 부스러진 살점이 보였다· 노인이 입은 내상은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가 없었다·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보다시피 제 수명은 다하였습니다· 내장이 모두 상해 며칠을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곽문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무나 태연하게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노인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두려운 법이다· 하지만 노인은 그런 두려움마저 초월한 듯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게 제가 그분에게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 달란 이유입니다·”
“어르신·”
노인이 안쪽에 있는 방문을 향해 말했다·
“선우야 들어오너라·”
“예 할아버지·”
대답과 함께 이제 겨우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동이 문을 열고 나왔다·
“내 손자인 한선우라네· 선우야 인사하거라· 곽문정 소협이시다· 곽 소협이 너를 그분께 데려갈 것이다·”
소동 한선우가 곽문정을 바라봤다· 한선우는 할아버지만큼이나 혜지가 넘치는 검은 눈동자의 소유자였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빛 속에는 세상의 모든 지혜가 담겨 있는 듯했다·
한선우가 곽문정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한선우예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형·”
“어 나야말로 잘 부탁하마·”
곽문정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선우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제 모든 것을 이어받았습니다· 제 얕은 지식으로는 저 아이의 깊고 넓은 그릇을 다 채워줄 수 없었습니다· 자칫 저 아이가 교만해져 그릇된 길로 나아갈 수도 있으니 부디 그분께 말씀드려 옳은 길로 인도해 주길 바랍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르신·”
“고맙습니다·”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비록 이곳 빈민가로 흘러들어 왔지만 예전의 노인은 무척 유명하던 학사였다· 하지만 흑암대전 중에 아들 내외와 삶의 터전을 잃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비록 빈민가에서 힘겹게 살았지만 노인은 한선우에 대한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다행히 한선우는 총명해서 노인의 가르침을 단기간에 흡수했다· 한선우는 세인들이 말하는 천재였다· 그것도 쉽게 보기 힘든 대단한 천재였다·
그래서 걱정이었다· 총명이 과해 오만하지 않을지 세상을 우습게 보지 않을지 그러다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지 말이다·
노인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었다· 전란 중에 입은 상처는 나날이 악화되고 있었고 이제 한계에 달했다· 그래서 손자를 맡길 사람을 찾아야 했다·
손자의 그릇을 채워줄 만한 학식을 가진 이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다행히 노인은 그런 사람을 알고 있었다· 때마침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한선우의 존재를 알고 먼저 연락해 왔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
하늘의 인연은 그렇게 닿았고 그는 백룡상단을 통해 소년을 데려갈 사람을 보내주었다·
노인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야 안심할 수 있겠구나· 그는 내 손자를 분명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인과 한선우 곽문정의 이야기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다음 날 아침 노인은 숨을 거뒀다·
마치 이 세상에서 자신의 할 일은 다했다는 듯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곽문정은 노인의 장례식을 간단히 치른 후 한선우와 함께 백룡상단의 거처로 돌아왔다·
☆ ☆ ☆
객잔에 들어온 한선우는 밤새 펑펑 울었다· 머리에 아무리 많은 지식을 담고 있다 할지라도 그의 나이는 겨우 열 살이었다· 조부와의 사별이 슬플 수밖에 없었다·
곽문정은 그런 한선우를 밤새 지켜보았다· 이런 때는 모든 슬픔을 토해낼 수 있게 그냥 지켜보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한선우는 다음 날 기력을 찾았다· 백룡상단의 사람들은 곽문정이 데려온 한선우를 살갑게 맞아줬다· 곽문정이 왜 한선우를 데려온 것인지 이유는 묻지도 않았다· 그냥 곽문정이 데려왔기에 잘해줄 뿐이었다· 곽문정은 상단 사람들에게 그만큼 큰 신뢰를 얻고 있었다·
곽문정은 한선우와 함께 객잔의 식당으로 내려왔다· 식당 안은 한산했다· 곽문정이 근처에 있던 보표에게 물었다·
“다른 분들은요?”
“거래를 하러 갔다·”
“아 오늘이군요· 저도 따라가야 했는데·”
“하하! 별일이야 있겠느냐? 공 단주님께서 너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
“그래도····”
“그냥 편히 쉬거라· 이젠 책임져야 할 사람도 있지 않느냐?”
보표가 한선우를 가리키며 말하자 곽문정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나는 나가볼 테니 편히 식사하거라·”
“예·”
보표가 밖으로 나가고 곽문정과 한선우는 식탁에 마주 앉았다·
한선우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곽문정을 바라봤다·
“형은 신뢰를 많이 받는군요·”
“내가?”
“형을 바라보는 시선에 굳은 믿음이 담겨 있어요·”
“그래? 그게 보이니?”
“네!”
곽문정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밤새 이야기를 해본 한선우는 모르는 것이 거의 없었다· 어떻게 저 어린 나이에 그렇게 많은 지식을 담고 있는지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한선우가 물었다·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우리는 사천으로 갈 거야·”
“사천성 말인가요?”
“그래·”
“그럼 사천성에 제 스승이 되실 분이 계신 거군요?”
“맞아· 역시 똑똑하구나·”
한선우의 얼굴에 기대감이 떠올랐다· 아직 조부를 제외하면 누구도 그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새로운 배움에 목말라 있었다·
“그분이라면 분명 너에게 큰 가르침을 줄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는 내가 너를 보호해 줄게·”
“믿겠어요 형·”
“이제 식사나 할까?”
“예!”
잠시 후 점소이가 음식을 내왔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한선우는 무척이나 질문이 많았다· 그의 질문 공세에 곽문정은 진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그것 빼고는 무척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쾅!
갑자기 누군가 거칠게 문을 열며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곽문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익히 아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남명이라고 했나?’
문을 열고 들어온 자들은 다름 아닌 남명과 공동파의 이대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곽문정이 앉아 있는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남명이 아는 척을 했다·
“오 이게 누구야? 그 보표 아니신가?”
“남 소협·”
곽문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우리도 밥 먹으러 왔는데 이곳에 머무나 보지?”
“그렇습니다·”
“어때? 음식은 괜찮은가? 부현 지부의 음식에 질려서 별식이 먹고 싶거든·”
“예 괜찮습니다·”
“흠! 그래?”
남명이 곽문정의 탁자에 있는 음식을 손가락으로 휘젓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잠시 우물거리던 그는 갑자기 인상을 쓰며 입안에 든 음식을 내뱉었다·
“퉤! 뭐야? 형편없잖아!”
남명이 속았다는 표정으로 곽문정을 노려봤다· 그런 남명의 행태에 곽문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그의 속내를 환히 알 수 있었다·
“소령은 당신들이 이곳에 온 것을 알고 있나요?”
“네놈···?”
“역시 소령은 모르는군요·”
“내 두말하지 않겠다· 괜히 소령 사매 주위를 맴돌지 말거라· 그녀는 너 같은 보표 따위와 어울릴 인물이 아니다· 그녀에겐 훨씬 더 고결한 인물이 어울린다·”
“그 고결한 사람이 당신이겠군요?”
“흥!”
남명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그의 모습에 곽문정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될 수 있으면 충돌하고 싶지 않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남명의 기세를 보니 절대 이대로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여기서 택일하거라· 이대로 이곳을 떠나겠다면 내 조용히 물러나겠다· 그렇지 않으면····”
남명이 허리에 찬 검을 슬쩍 어루만졌다· 그의 곁에 있던 공동파의 제자들이 이죽거렸다·
“이대로 물러나는 것이 좋을걸·”
“보표면 그냥 짐이나 운송해 주고 돈 받는 걸로 만족해야지· 뭐 말만 잘 들으면 우리 고향 집에 말해서 돈벌이는 좀 시켜줄 수도 있어·”
“하하하!”
순간 곽문정의 안색이 싹 변했다·
자신을 놀리는 것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들은 보표라는 직군 전체를 싸잡아 비하하고 있었다·
곽문정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말없이 지켜보던 한선우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형?”
“괜찮아· 내가 제일 존경하는 형님이 언젠가 이런 말을 해주셨어· 자신의 역량도 가늠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굴욕 따윈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어야 하고 자존심 따윈 개에게 줘버려도 된다고·”
“하하하! 그 형이란 사람이 옳은 말을 했군· 그렇지· 그게 정답이지·”
남명이 박장대소를 했다· 하지만 곽문정은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도 하셨어· 절대 굽히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고· 그게 뭔지 알아?”
한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바로 신념이야· 자신이 믿는 바를 이루려고 하는 근원적인 힘· 어떠한 경우에도 신념이 꺾여서는 안 된다고· 보표는····”
곽문정이 잠시 말을 멈추고 남명과 공동파의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곽문정의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보표는··· 나의 신념이야· 나는 보표가 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저들은 그런 나의 신념을 부정하고 있어·”
한선우는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곽문정의 몸에서는 공동파의 도사들을 압도하는 강렬한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어수룩한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남명이 그를 죽일 듯 노려봤다·
“감히 어디서 그따위 눈빛이냐? 감히 나에게 공동파에게 대항하겠다는 것이냐? 그 후환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곽문정이 빙긋 웃었다·
“후환이랄 것까지 있을까요? 당신들이 그렇게 무시한 보표에게 얻어맞은 것을 떠들 수는 없을 테니까·”
“놈!”
남명과 무인들이 화를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