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 6장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은 옛일을 쉽게 잊어버린다· (1)
어떤 이들은 삼년전쟁이라 불렀고 어떤 이들은 흑암대전(黑暗大戰)이라고도 불렀다· 중요한 것은 무려 삼 년 동안이나 운중천과 밀야의 전쟁이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운중천과 밀야는 중원 곳곳에서 그야말로 치열하게 싸웠다· 전쟁이 삼 년이나 이어지는 동안 수많은 군웅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 개의 문파가 멸문했다·
거리엔 죽음이 넘쳤고 사람들의 얼굴에선 생기가 사라졌다· 평범한 백성들에겐 악몽과도 같은 시대였다· 백성들은 하루라도 빨리 전쟁이 끝나길 바랐지만 그들의 바람은 요원하기만 해서 언제 이뤄질지 몰랐다·
중원 전역에서 벌어지던 전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몇 군데 전선으로 압축되기 시작했다· 감숙성과 섬서성 산서성이 바로 그곳이었다·
밀야와 운중천은 세 지역의 전선에 모든 전력을 투입했고 연일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때문에 강호 곳곳에서 치안 공백이 발생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난세(亂世)는 공포와 좌절을 가져왔지만 반대로 한줄기 희망도 던져줬다· 중원 곳곳에서 영웅이라 불릴 만한 자들이 활약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자는 단연 척마대라고 할 수 있었다· 삼 년 전 만들어진 척마대는 최전선에서 활약하며 믿지 못할 만큼의 업적을 쌓았다·
사람들은 그런 척마대의 활약에 열광했다· 척마대는 어느새 운중천의 정의를 상징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특히 척마대를 이끄는 대주 심원의는 젊은 층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척마대도 많은 손실을 입었다· 그때마다 척마대는 젊은 무인 중 가장 뛰어난 자들을 영입해 인원을 채웠다· 그들의 인원은 모두 쉰여섯 명이었고 그 숫자는 절대 변하지 않았다·
삼년전쟁을 통해 떠오른 영웅은 또 있었다·
창천무제(蒼天武帝) 담수천·
한때 창천의 고성이라 불리던 젊은 무인은 삼년전쟁을 통해 가장 찬란히 빛나는 별이 되었다·
삼년전쟁 기간 내 운중천의 무인들에게 가장 큰 공포를 안겨준 이는 밀야의 야주나 사대마장이 아니었다· 바로 천공음마라 불리던 마인이었다·
제자를 잃은 천공음마의 분노는 실로 무서웠다· 그의 탄주 한 번에 수백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가 투입된 전선에는 공포와 죽음이 난무했다·
그의 가공할 음공에는 운중천도 속수무책이었다· 젊은 무인은 물론이고 한 지방의 패주로 자처하던 이들까지도 천공음마에 대항하길 꺼렸다· 일단 천공음마가 나타났다 하면 그 지역에서는 운중천이 속절없이 밀렸다·
모두가 절망하던 그때 나선 이가 바로 담수천이었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밀야의 영역으로 쳐들어갔고 천공음마와 치열한 혈투를 벌였다·
무려 반나절을 싸운 끝에 그는 천공음마를 제압했다· 이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중원의 무인들은 열광했고 그에게 기꺼이 무제(武帝)라는 칭호를 바쳤다·
창천의 무제 담수천·
사람들은 그를 아홉 하늘과 동일 선상에 놓았다· 아니 어떤 이들은 그를 아홉 하늘보다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아홉 하늘이 전선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데 반해 그는 전선을 동분서주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위명을 쌓은 자· 그래서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자가 바로 담수천이었다·
그 밖에도 많은 이가 밀야와의 전쟁을 통해서 부각되었다· 전쟁을 통해 영웅이 된 자들과 그들을 배출한 문파들은 자연스럽게 강호의 새로운 패자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강호가 펼쳐질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다르게 전쟁은 아직도 지루하게 이어졌고 전선에는 연일 많은 젊은 무인이 투입되었다·
섬서성 감천(甘泉)은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 중 하나였다· 섬서성의 성도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감천이 함락되면 근처에 있는 구대문파 중 두 곳인 화산파와 종남파까지 위험하게 된다·
운중천은 물론이고 화산파와 종남파도 이곳에 전력을 집중했다· 수많은 이가 전선에 투입되고 죽어갔다· 그 때문에 감천의 분위기는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런 흉흉한 분위기와 반대로 기루나 상인들은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많은 물자와 재화를 소모한다· 상인들은 수많은 물자를 가지고 감천 인근 부현(富縣) 지역을 찾았고 그 때문에 오히려 경제가 활성화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부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수많은 상단이 드나들었다· 중원 각지에서 온 상단의 마차에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무기와 식량이 가득 실려 있었다·
부현의 초입엔 운중천의 검문소가 있었다· 밀야의 밀정이 부현에 침투할 것을 우려해 철저한 검문검색이 이뤄졌다·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하면 부현에는 아예 들어갈 수도 없었고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이른 아침 검문소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부현을 통과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무림과 상관없는 백성이었다·
검문소의 무인들은 철저하게 그들의 신분을 검사했다· 백성들은 신분을 증명한 뒤 속옷까지 뒤집고 나서야 겨우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자꾸만 늦어지고 있었다·
백성들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었다· 상대는 무기를 들고 있는 무림인들이었다· 자칫하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검문소 쪽으로 일단의 행렬이 나타났다·
“상단이다·”
“백룡 깃발? 백룡상단이구나·”
백성들은 한눈에 행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천하의 수많은 상단 중 규모와 거래 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단이 바로 백룡상단이었다· 예전에도 천하 십대상단에 속했지만 흑암대전을 통해 더욱 덩치를 불리며 이젠 삼대상단 중 하나로 불리고 있었다·
검문소를 지키는 무인들이 백룡상단의 등장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검문소의 조장 임상운이 앞으로 나섰다·
“흐흐! 봉이 오는군·”
무인들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짐짓 모르는 척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백룡상단이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마침내 검문소에 도착한 백룡상단의 규모는 예상보다 컸다· 커다란 마차가 스무 대에 동행하는 인원의 수만 백여 명이 넘었다· 근래에 들어온 상단 중 가장 큰 규모였다·
행렬의 선두에는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무인이 말을 몰고 있었다· 임상운이 그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멈추시오·”
선두의 무인이 손을 들자 백룡상단 전체가 멈춰 섰다· 그에 임상운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곳은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 신분을 밝히시오·”
“우리는 이곳에 장사를 하러 온 백룡상단입니다· 그리고 나는 백룡상단의 호상단주인 공진성이라 합니다·”
“백룡상단의 공 단주님이셨군요· 이곳에 장사를 하러 오셨다구요?”
“그렇소이다·”
“그런데 이걸 어쩝니까? 지금은 백룡상단을 들여보내기가 힘든데····”
“무슨 일 있습니까?”
“근래 감천에서의 전투가 치열해지는 바람에 일반 백성 외에 상단의 출입이 원천 차단되었습니다·”
“그런?”
공진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혀 듣지 못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상운의 입가에 어린 미소를 보는 순간 그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공진성이 마차에서 내려 임상운에게 다가갔다·
“저희는 전혀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전황이 악화되었습니다· 때문에 당분간 일반 상단은 출입을 하지 못합니다·”
“오늘 아침에 악화되었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저희도 방금 전 그 사실을 통보받아서····”
임상운이 말끝을 흐렸다· 공진성이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저희가 통보받기 전에 통과한 걸로 하면 되겠군요·”
공진성이 그의 손에 묵직한 무언가를 쥐어줬다· 그러자 임상운의 입꼬리가 슬며시 치켜 올라갔다·
“어흠 어흠!”
“별거 아니지만 수하들과 함께 조촐한 술자리를 할 정도는 될 겁니다·”
임상운이 손안에 느껴지는 묵직한 감촉을 즐겼다· 술자리 한번 할 정도?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그와 부하들이 몇 달은 족히 주지육림에서 살 수 있었다·
“확실히 천하 삼대상단은 무언가 달라도 다르군요·”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원래는 안 되는 일이지만 내 공 단주님의 사정을 봐서 특별히 안으로 들여보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임상운이 부하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길을 막고 있던 무인들이 옆으로 비켜났다·
공진성은 말에 올라탄 후 일행과 함께 검문소를 통과했다· 워낙 대규모이다 보니 검문소를 통과하는 데만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일단 검문소를 통과하자 더 이상 백룡상단을 막아서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인 중 한 명이 탄식했다·
“시절이 어지러우니 곳곳에 도적들이 판을 치는구나·”
“그래도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거 아니겠는가? 다른 곳에서는 몇 배를 요구하기도 한다네·”
공진성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곳곳에서 이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요 자리를 꿰찬 무인들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상단을 이끌고 천하를 돌아다니다 보면 가장 자주 보는 것이 그런 부조리한 면이었다· 워낙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일이기에 백룡상단에서는 아예 그들을 위한 돈주머니를 따로 준비해서 상행에 나서고 있었다·
공진성이 문득 뒤를 돌아봤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이제 십칠팔 세로 보이는 소년이 말을 타고 따라오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약간은 우직해 보이는 얼굴이다· 하지만 칼날처럼 뻗은 검미와 그 아래 자리 잡은 반짝이는 눈동자가 소년의 인상을 무척이나 강렬하게 보이게 했다·
소년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부현을 둘러보고 있었다· 부현의 분위기는 이제까지 그가 경험한 곳과는 달랐다·
공진성이 물었다·
“문정아 신기하냐?”
“예 조금은요·”
“그럴 만도 하지· 안전한 듯 보이지만 이곳 역시 밀야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최전선이다· 이곳에도 전장의 광기는 존재하고 대다수의 사람은 그런 광기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그렇군요·”
공진성의 말에 소년이 이해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진성은 그런 소년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소년의 이름은 곽문정이었다· 어리기만 하던 소년은 이제 훤칠하게 자라 한 사람의 무인이 되었다· 곽문정의 성장 과정을 지켜봐 온 공진성으로서는 그가 마치 자식처럼 느껴졌다·
곽문정의 눈에 문득 이채가 떠올랐다· 그들의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일단의 무리 때문이었다· 거의 백여 명에 달하는 소년이 십여 명의 무인들 인솔 아래 걸어오고 있었다· 곽문정과 또래로 보이는 소년들은 잔뜩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인들 중 한 명이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탕마군(蕩魔軍)이다!”
“탕마군?”
곽문정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공진성이 따로 설명해 주었다·
“밀야와의 전쟁에 자원한 소년들로 이뤄진 무력 조직이다· 대부분이 고아 출신이라고 하는데 속성이 가능한 무공을 익히고 최전선에 투입되고 있지· 보아하니 저들도 간단히 무공을 익히고 최전선인 감천으로 투입되는 모양이구나·”
공진성의 설명에 곽문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소년들의 얼굴에는 의기가 넘쳐흘렀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들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형편없었다·
무공이란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제대로 된 단계를 밟아 올라가야 탈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저들은 무공을 너무나 속성으로 익힌 나머지 모든 것이 불안해 보였다· 저래서는 전장에 투입되어도 오래 살아남기 힘들었다·
‘결국 저들은 소모품인가?’
곽문정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제 그는 세상물정 모르던 철없는 소년이 아니었다· 지난 삼 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비록 타고난 번뜩이는 재치는 없었지만 상황을 보는 눈만큼은 또래의 소년들보다 월등했다·
그의 곁으로 탕마군이 지나가고 있다· 선두에 선 소년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탕마군을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있었다· 문득 소년과 곽문정의 눈빛이 마주쳤다·
소년의 눈빛을 통해 곽문정은 그가 자신의 결정에 한 치의 의심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밀야와의 전쟁에 투입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었다·
깃발을 든 소년뿐만이 아니었다· 그 뒤를 따르는 소년들의 얼굴에도 자부심이 가득했다·
‘저들 중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을까?’
곽문정은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탕마군은 곧 사라졌고 백룡상단은 목적지인 성화객잔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수십 대의 마차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객잔은 오직 성화객잔뿐이었다·
공진성이 외쳤다·
“이곳까지 오느라 모두 고생했네! 짐을 지킬 사람들을 빼고는 모두 푹 쉬게!”
“와아!”
상인과 보표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곽문정이 공진성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공단주님 저는 잠시 밖에 나갔다 오겠습니다·”
“쉬지 않고?”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늦지 않게 돌아오겠습니다·”
“알겠다· 조심히 다녀오너라·”
공진성은 흔쾌히 허락했다· 곽문정은 백룡상단에서도 매우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비록 일개 보표 자격으로 이번 상행에 참여했지만 공진성의 영향력 밖에 있었다·
곽문정은 공진성에게 포권을 취한 후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