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 5장 그래도 괜찮다 (1)
하진월은 피곤에 절은 얼굴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지만 청량함을 느끼기보다는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현재 그는 조그만 배에 올라타 있었다· 배 한쪽에는 소무상이 운기요상을 하고 있고 반대편에는 당기문이 당미려를 안은 채 앉아 있었다· 당미려는 심마에서 빠져나왔지만 아직도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의 사고 밑바닥에 가라앉은 찌꺼기를 마주하는 것은 그녀에게 심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다· 그녀가 그 충격에서 벗어나오려면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당기문은 그런 그녀를 알뜰하게 보살폈다· 그는 당미려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하진월에게 다가왔다·
“아우·”
“형님 미려는 어떻습니까?”
“괜찮네· 강한 아일세·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낼 걸세·”
“다행입니다·”
“앞으로 어찌할 생각인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서문화가 분명 추적해 올 걸세·”
“알고 있습니다·”
하진월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도 짐작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가 직접 본 서문화는 결코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고 상처 입은 자존심을 혼자서 삭힐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반드시 추적해 올 것이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서문화는 천하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특히 서문세가의 전뇌호천공을 극성까지 익혀 지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릴 수 있었다· 단 한 걸음을 옮기는 그 짧은 순간에도 수십 가지의 계획을 만들어내는 이가 바로 서문화였다·
서문화는 분명 하진월의 계획을 꿰뚫어 보고 있을 것이다· 하진월의 성향을 철저히 분석하고 그가 수립할 수 있는 모든 계획과 가능성을 감안해 추적해 올 것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그의 추적을 피할 수 없다· 그보다 한발 앞서 생각해야 한다·’
하진월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서문화라면 그가 계획하는 것을 철저하게 꿰뚫어 보고 그에 대한 대응책을 세울 것이기 때문이다· 서문화는 그런 철벽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해내야 한다· 반드시·’
하진월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수많은 가능성이 그의 머릿속에서 명멸해 가고 수십 가지의 계획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당기문은 생각에 잠긴 하진월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가장 고민하고 있을 사람이 그란 사실을 알기에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아우라면 분명 이 상황을 타개할 대책을 내놓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당기문은 복잡한 계획은 하진월에게 맡기고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당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내가 돌아가는 순간 당문도 위험하게 된다· 가주께서는 그 누구도 두렵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나와 미려 때문에 당문 전체가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다·’
서문화와 운중천을 상대로 독을 사용했을 때 이미 당문과 인연이 끊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젠 그도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해야 할 때였다·
‘류산····’
명류산을 생각하자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그의 첫 번째 제자인 그 이름을 이제 가슴속에 묻어야 했다·
‘하지만 절대 너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당기문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 가슴이 아프고 분노한 적은 없었다· 당기문이라는 인물의 가슴에 악(惡)이라는 감정이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그 원인은 바로 운중천이었다·
그때 배를 몰던 뱃사공이 다급하게 말했다·
“저기 앞에 사람들이····”
하진월과 당기문이 동시에 상념에서 깨어나 뱃사공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강의 하류에 대여섯 척의 배가 떠 있다· 각 배에는 십여 명의 무인이 무기를 들고 서 있었다·
“운중천이구나· 이곳까지 천라지망을 구축해 놓았다니·”
하진월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곳에 검문이 있는 것은 그의 예상 밖이었다· 하지만 운중천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어 이곳까지 천라지망을 구축해 놨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기동력이었다·
아직 소무상은 운기요상을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운공이 절정에 달했기에 중단할 수도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큰 내상을 입고 상처가 더욱 악화될 수도 있었다·
하진월이 당기문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믿을 수 있는 것은 당기문의 독공밖에 없었다·
당기문이 하진월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게 아우· 난 이제 독을 쓰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는다네·”
“죄송합니다 형님·”
“죄송할 거 없네· 나도 자네와 같은 배를 탔네· 당연히 해야 할 일일세· 난 나의 결정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네·”
“감사합니다 형님· 이 위기만 벗어나면 됩니다· 이번 한 번만 부탁하겠습니다·”
“알겠네·”
당기문은 품 안에서 독이 든 자기병을 꺼냈다·
이젠 남은 독도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남은 독만으로도 수백 명의 사람을 너끈히 죽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래서 당기문도 각별히 조심해서 하독해야 했다· 자칫하다가는 무인뿐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피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당기문은 조심스럽게 거리와 바람의 세기를 가늠했다·
낯선 배의 등장에 운중천 무인들이 접근해 왔다· 순간 당기문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저들이 단순히 접근해 오는 것이 아니라 넓게 퍼져서 서서히 포위망을 구축해 왔기 때문이다·
바람은 등 뒤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뒤쪽에서 접근해 오는 자들은 독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누구냐? 배에 타고 있는 자들은 신분을 밝혀라!”
정면에서 접근해 오는 배에 타고 있는 운중천의 무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여차하면 공격하겠다는 듯이 그의 손은 검의 손잡이를 꼭 잡고 있었다·
그들의 살벌한 기세에 하진월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도 당기문의 독만으로는 눈앞의 위기를 헤쳐 나가기 역부족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때 우두머리 무인이 소리쳤다·
“수상한 놈들이다! 모두 놈들을 제압하라!”
“제길!”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당기문이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에 조그만 단환을 물고 있었다·
“제독단이구나·”
제독단을 입에 물고 있으면 호흡기로 침투하는 독을 미리 차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들기가 쉽지 않아 당문을 비롯한 독문에서도 절대로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 물건이 바로 제독단이었다· 적들도 당기문의 독에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
당기문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하진월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하진월이라고 해서 당장 뾰족한 수가 있을 리 만무했다·
당기문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적들이 탄 배가 지척까지 접근해 왔다· 그들은 하진월과 당기문 등이 탄 배로 건너뛰려 했다·
변고가 생긴 것은 그때였다·
갑자기 가장 가까이 다가온 배 한 척이 기우뚱하더니 가라앉기 시작했다·
“뭐 뭐냐?”
배 위에 있던 무인들이 당황하는 그 잠깐 사이 배는 물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배들도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이 침몰했다·
“물 아래 적이 있다·”
그제야 운중천의 무인들은 수면 아래서 누군가 그들의 배에 구멍을 뚫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수공에 능한 자들이 입에 단검을 물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들은 올라오지 않았다· 대신 수면이 온통 피로 붉게 물들었다·
뒤이어 간신히 버티고 있던 배들이 연달아 침몰했다· 하진월과 당기문은 긴장 어린 시선으로 수면을 바라봤다· 운중천의 무인들이 허우적거리며 도움을 요청했다· 배를 타고 있다고 모두가 수공에 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수면 위에서 허우적거리던 무인들이 갑자기 물속으로 쑥 빨려들어 가며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수십 명의 무인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하진월과 당기문은 긴장 어린 눈빛으로 수면을 주시했다· 그때 운공요상을 끝낸 소무상이 눈을 떴다·
“모두 괜찮으십니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안색이 창백하긴 했지만 운공요상을 하기 전보다 혈색이 많이 좋아진 모습이다·
그때 갑자기 물속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배 위로 올라왔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의 사내였다· 그의 몸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어 섬뜩함을 더하고 있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하진월이 입을 열었다·
“청··· 인인가?”
“늦었습니다·”
“역시 자네였군·”
그제야 하진월과 당기문 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낯선 얼굴의 사내는 청인이었다· 그가 운중천 무인이 타고 있는 배의 바닥에 구멍을 뚫은 것이다·
“잘 왔네· 덕분에 숨을 좀 돌릴 수 있겠군·”
하진월이 환하게 웃었다·
청인의 등장은 그에게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잘만 사용한다면 그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도 있었고 현 상황을 타개하는 데 누구보다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당기문이 물었다·
“무원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그는 북상하고 있습니다·”
“북상?”
“저도 이유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곳에 오기 직전 얻은 정보로는 분명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합니다·”
모두의 얼굴에 의혹이 떠오를 때 소무상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녀 때문인지 모르겠군요·”
“그녀?”
소무상은 진무원에게 보고한 내용을 일행에게 말해줬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하진월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무원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군·”
“하면 당분간은 무원이 합류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럼 어쩐단 말인가?”
“무원하고는 이미 주고받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희가 먼저 가 있으면 반드시 뒤따라올 겁니다·”
“하지만····”
“차라리 잘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무슨?”
“무원이 북상하면 모두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 운중천도 그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반대로 우리를 향한 시선은 분산되겠지요·”
“음!”
청인의 합류와 진무원의 북상·
꽉 막혀 숨조차 쉴 수 없던 공간에 구멍이 뻥 뚫린 기분이다· 잠시 침체되어 있던 하진월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음!”
진무원은 폐허가 된 숲 속을 걷고 있었다·
숲 곳곳에는 수많은 이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온전한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시신은 하나도 없었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늑대들이 시신을 탐하고 있고 곳곳에서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그 처참한 광경에 천하의 진무원조차 욕지기가 올라올 지경이다· 하지만 진무원은 침착하게 시신에 남아 있는 상처를 살폈다·
절단면이 마치 도자기의 표면처럼 매끄러웠다· 절단면에서는 아직도 섬뜩한 예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은한설과 군웅들의 싸움이 있던 지역이다· 이곳엔 오직 죽음과 파괴만이 남아 있었다·
진무원은 망설이지 않고 파괴의 흔적을 추적했다· 추적을 할수록 더욱 많은 주검이 나타났다· 혈향과 범벅이 된 광기의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지독한 피비린내에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진무원은 앞쪽에서 강렬한 기파를 느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광기 어린 기파는 그의 피부를 아프게 자극했다·
“호호호!”
뒤이어 들려온 광기 어린 교소·
그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진무원의 얼굴이 철갑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한설·”
단 한 번 웃음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의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진무원은 광기의 소용돌이를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