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 3장 죽일 수 있다면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세상 이치다 (2)
진무원과 태무강이 격돌할 때마다 땅거죽이 뒤집어지고 아름드리나무가 쓰러졌다· 설화에 걸리는 모든 것이 갈라졌고 태무강의 혼원염마기에 휩쓸린 물체는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진무원은 몸 안에 침투한 혼원염마기에 대항하느라 전력을 다할 수 없었고 태무강이 진무원에게 당한 상처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벌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전력을 다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누구 한 명 물러서지 않았다·
“크흐흐!”
태무강은 광기를 발산하며 진무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상처가 벌어지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광기에 질려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무원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냉철한 이성을 갖고 있었고 일단 약점을 파고들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집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몸 안에서 그림자 내공과 태무강의 혼원염마기가 격돌하고 있었다· 혼원염마기는 그림자 내공을 잡아먹으며 상극의 성질로 변화하려 했다·
혼원염마기는 광포했다· 어떻게든 그림자 내공을 잡아먹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그림자 내공은 더 은밀히 자신을 감췄다· 혼원염마기가 세를 불리려고 해도 잡아먹을 내공이 없어 그럴 수가 없었다·
혼원염마기가 제풀에 지쳐갈 때 즈음 그림자 내공은 은밀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혼원염마기를 꼭꼭 에워싼 채 오히려 자신과 같은 색으로 물들였다·
혼원염마기는 뒤죽박죽이었다· 워낙 많은 기운이 뒤섞여 어느 것이 원류이고 어느 것도 지류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혼돈의 결정체가 혼원염마기였다·
하지만 진무원은 그중에서도 매우 익숙한 기운 두 가지를 분류해 낼 수 있었다·
‘하나는 밀야 다른 하나는 운중천·’
단순히 타인의 기운을 잡아먹고 변화시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 원류에 상반된 두 단체의 기운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어떻게?’
그뿐만이 아니었다·
태무강이 펼치는 초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근본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초식이 섞여 있었지만 근원을 따라 올라가면 밀야와 운중천의 초식만이 존재했다·
진무원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태무강은 밀야와 운중천의 교차점이었다· 그들의 특성을 함께 갖고 있었으며 양 단체 모두에 증오심을 갖고 있었다· 진무원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온갖 모순의 교집합 그것이 바로 태무강이었다·
혼돈의 마인은 그 순간에도 진무원을 향해 혼원염마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뒤섞인 회색의 강기는 진무원을 향해 무섭게 짓쳐 들고 있었다·
“가루 하나 남기지 말고 세상에서 사라지거라·”
혼돈의 강기가 폭풍이 되어 진무원을 덮쳐왔다·
광포한 폭풍 앞에 선 진무원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촛불처럼 위태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문혜령의 얼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일그러져 있다·
“혼돈의··· 마인?”
어떻게 그 얼굴을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칠 년 전 태무강에 의해 북천문에서 도주해야 했던 서문혜령이다· 태무강에게 당한 충격으로 담수천은 폐관 수련을 택하지 않았던가? 천재라고 소문난 그녀였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녀가 관대승을 노려보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눈앞에서 보는 대로입니다·”
“당신····”
관대승은 서문혜령의 눈에 어린 불신과 경악의 빛을 읽었음에도 태연했다· 언젠가는 겪어야 할 관문이고 이젠 그녀도 어느 정도 진실을 알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서문혜령이 말을 더듬었다·
“서 설마 혼마도 운중천의····”
“혼마는 운중천에 속해 있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 아주 연관이 없는 자도 아니지요·”
“····”
“혼마는 그분께서 사역하시는 마인·”
“그분?”
“강호를 진정으로 다스리는 분이지요· 자세한 것은 조부님께 여쭤보십시오·”
서문혜령의 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조부님한테 물어보라구요?”
“그렇습니다· 그분은 강호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접근해 계신 분· 서문 소저의 자격이 충분한 이상 그분께서 말씀해 주실 겁니다·”
“강호의 진실이라니 지금 제가 모르는 진실이 있다고 말하는 건가요?”
“강호는 서문 소저의 짐작보다 더 넓고 깊답니다· 그 깊은 곳에는 서문 소저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일들이 일어납니다· 굳이 말하자면 심연(深淵)의 세계라고 할 수 있겠군요· 서문 소저의 조부께서도 그 심연의 세계의 몸담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서문혜령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아는 조부는 아홉 하늘 중 한 명이다· 강호를 지배하는 자이지 그 어떤 단체에 몸담고 있을 정도의 작은 그릇이 아니었다·
관대승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서문혜령을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앞으로 서문 소저의 책임이 막중합니다·”
“····”
“그분께서 서문 소저와 창천의 고성에게 거는 기대가 무척 큽니다· 부디 그분의 기대에 부응해 주십시오·”
서문혜령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한순간 수십 개가 넘는 표정을 짓던 그녀가 곧 원래의 냉철한 표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많은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관대승은 그런 서문혜령의 모습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 그렇게 시작하지· 부정하고 의심하고 포기하고 그러다가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지·’
이제까지 많은 이가 그와 같은 단계를 밟아 그들의 사람이 되었다· 관대승은 이번에도 그렇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관대승의 시선이 진무원과 싸우는 태무강을 향했다·
‘휴면의 후유증인가? 칠 년 만에 깨웠더니 영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군·’
그가 알고 있는 태무강의 무위는 결코 이 정도가 아니었다· 묵혼대와 자객들을 상대하느라 지친 진무원 정도는 벌써 제압해야 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진무원 저자의 무위가 예상보다 뛰어난 것인가?’
관대승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전자라면 별 문제가 없지만 후자라면 문제가 커진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모든 계획을 대폭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무원 끝까지 골치 아프게 만드는군·”
진무원을 바라보는 관대승의 눈에 은은한 살기가 떠올랐다· 그 한 사람 때문에 감수해야 할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일을 수습하려면 꽤나 많은 심력을 소모해야 할 것 같았다· 또다시 심력을 소모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에게 짜증이 일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전신이 오싹해지면서 한기가 전신을 엄습했다·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한 아찔한 고립감과 현기증에 관대승과 서문혜령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무슨?”
번쩍!
그 순간 진무원의 검에서 강렬한 빛이 번쩍였다· 사람의 눈을 멀게 할 만큼 강렬한 빛에 두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진무원이 멸천마영검 제오식 섬광혈(閃光血)을 펼친 것이다·
찰나의 섬광에 삶과 죽음이 갈린다·
설화는 공간과 시간을 단축해 태무강의 미간을 노렸다·
“크윽!”
태무강은 간신히 고개를 돌려 설화를 피해냈다· 하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해 관자놀이를 비롯해 머리 옆쪽에 긴 자상이 생겨났다· 두피가 갈라지고 살과 뼈가 입을 쩍 벌리며 회백색 뇌수가 드러났다·
일반적인 무인이었다면 즉사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태무강은 죽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 정신이 반쯤 날아간 상태에서도 진무원의 옆구리에 강력한 일격을 먹였다·
퍼엉!
태무에게 걷어차인 진무원은 족히 십여 장을 훌훌 날려갔다· 옆구리가 한껏 구부러진 것이 갈비뼈 서너 대는 족히 부러진 듯했다· 하지만 진무원은 애써 고통을 참으며 뒤쪽에 있는 바위를 박차고 다시 태무강을 향해 달려들었다·
머리에 큰 상처를 입은 태무강은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날뛰고 있었다· 지금이 그를 쓰러뜨릴 절호의 기회였다· 진무원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쉬가악!
유성혼과 단천해가 연이어 펼쳐졌다·
설화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정신이 반쯤 날아간 상태에서도 태무강은 본능적으로 반탄강기를 펼쳤다· 그 때문에 진무원은 이번에도 태무강의 숨통을 확실히 끊지 못했다· 대신 태무강의 옆구리와 복부에 큰 자상을 남겼다·
“크으으!”
태무강이 기괴한 신음을 흘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진무원은 그런 태무강의 목에 설화를 꽂아 넣으려 했다·
피잉!
그 순간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강렬한 위기감이 진무원을 엄습했다· 진무원은 본능적으로 설화를 들어 전면을 가렸다· 그 직후 강렬한 충격이 그를 강타했다·
터엉!
설화가 활처럼 휘어지며 진무원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크헉!”
진무원이 겨우 허리를 펴며 선혈을 왈칵 쏟아냈다· 한 됫박은 됨직한 선혈이 바닥과 그의 가슴을 붉게 물들였다· 진무원은 꺽꺽대며 몸을 일으켰다·
후웅!
설화가 검명을 흘렸다· 뒤이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진무원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호오! 역시 대단하구나· 그 와중에도 내 공격을 막다니·”
누군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진무원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보통의 체구에 별다른 특징이 없는 평범한 얼굴의 남자였다· 진무원은 그를 알아봤다·
“운경··· 형님·”
“무원아·”
진무원을 보며 빙긋 웃는 남자는 바로 조운경이었다· 방금 전 지풍은 바로 조운경이 날린 것이었다·
조운경의 열 손가락은 타오르는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십자혈마공을 극성으로 익혔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진무원은 설화를 지지대 삼아 겨우 몸을 일으켰다· 설화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검명을 흘리고 있었다·
설화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 대상은 조운경이었다· 설화에 깃든 무녀의 한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꽤나 끈질기구나· 그래도 혼마라면 어렵지 않게 너를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조운경의 시선이 한쪽에 널브러져 있는 태무강을 향했다· 회백색의 뇌수가 드러나는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태무강의 숨통은 끊어지지 않았다· 아니 서서히 상처를 회복하고 있었다· 진무원의 그림자 내력에 방해를 받으면서도 그 정도였다·
‘자객들 다음엔 혼마 이번엔 운경 형님인가?’
적들은 그야말로 치밀하게 준비했다· 연이은 싸움으로 인해 진무원의 체력은 그야말로 바닥이었고 내공도 고갈되기 직전이었다· 그 모든 것이 적들의 치밀한 계산 아래 이뤄진 일이다·
조운경이 나선 것도 진무원의 몸 상태를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조운경이 싱글거리며 손가락을 들어 진무원을 가리켰다·
“그럼 어디 아비의 원수를 갚아볼까?”
그렇지 않아도 붉게 물들어 있던 손가락이 금방이라도 피가 뚝뚝 흘러내릴 것 같은 선홍색으로 변했다·
‘십자혈마공·’
천하의 수많은 마공 중에서 가장 극악한 위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것이 바로 십자혈마공이다· 십자혈마공을 대성하게 되면 부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되고 뚫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십자혈마공을 일컬어 파괴수(破壞手)라고 불렀다·
‘감당할 수 있을까?’
진무원이 이를 악물었다·
이성은 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속삭였지만 설화의 강한 떨림이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설화의 살기 어린 검명이 고조되면서 진무원의 머릿속이 점차 하얗게 지워졌다· 불길한 징조였다· 이성을 완전히 잃기 전에 진무원이 조운경을 향해 달려들었다·
끼이이이!
설화가 호곡성 같은 울음을 토해냈다· 그 모습을 보며 조운경이 중얼거렸다·
“그럼 어디 신명 나게 한판 놀아보자꾸나 동생아·”
그의 손가락에서 붉은 지력 십여 개가 발출됐다·
따다당!
지력과 설화가 허공에서 부딪치며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지금 승부를 봐야 한다·’
진무원은 남아 있는 공력 전부를 설화에 투입했다·
“이야아!”
진무원과 조운경의 몸이 순식간에 십여 차례를 교차했다· 그사이 수십 번의 공방이 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