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 3장 죽일 수 있다면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세상 이치다 (1)
“그는 호형포천보로 삼도미로진(三途迷路陣)과 영무환상진(影霧幻想陣)을 펼쳤구나·”
하진월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심마와 싸우면서 진의 원리를 파악하느라 심력을 모조리 소모했기 때문이다·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하진월은 움직였다·
소무상이 서문화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이 이상 서문화에게 시간을 주면 그들에겐 두 번 다시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당기문에게 다가갔다·
“형님·”
당기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입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오른손으로 품을 뒤지고 있었다·
“운향산(雲香酸)으로는 안 돼· 그래 칠보추혼독(七步追魂毒)까지 더해지면 효과가 배가 될 거야·”
당기문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소무상이 목숨을 걸고 서문화의 발목을 붙들고 있다· 당장은 선전하고 있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란 사실을 당기문은 잘 알고 있었다·
절대지경을 오래전에 넘어선 서문화이다· 당장은 혈은잠 때문에 내공을 제대로 쓸 수 없지만 분명 오래지 않아 해결책을 찾아낼 터였다· 절대고수들은 그처럼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여타의 규칙이나 상식은 그들에게 통용되지 않았다·
당미려가 그가 펼친 진법에 의해 심마에 빠졌고 명류산은····
그를 생각하자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불길한 기분이 엄습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명류산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느끼고 있었다·
“류산····”
비록 정식으로 받아들인 제자도 아니고 독을 복용시킬 때마다 투덜거리는 밉상이었지만 그래도 그에겐 소중한 사람이었다·
운중천은 그에게서 그런 소중한 사람을 앗아갔다· 당기문은 그런 운중천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품안에 있는 독들을 조합하며 필사적으로 방법을 강구했다· 그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독의 종류는 스무 개 정도이다·
각기 조합에 따라 약효가 배가 될 수도 있고 감소할 수도 있는 그런 것들이다· 당기문은 약효를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머리를 최대한 굴렸다·
“휴!”
하진월이 그런 당기문의 모습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당기문을 좋아하고 따른 것은 당문 같은 대문파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좋았기 때문이다·
독을 사용하는 것을 꺼리던 독의 대가가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활용하려 한다· 하진월은 그런 당기문의 변화를 마음 편히 반길 수가 없었다·
하진월은 독을 조합하는 당기문을 뒤로하고 진을 파훼하기 위해 움직였다· 소무상이 서문화를 붙잡고 있는 사이 어떻게 해서든 진법을 파훼해야 했다·
바닥 곳곳에 서문화의 족적이 남아 있다· 그의 족적이 진법의 근간이었다· 단순히 바닥에 새겨진 족적을 지운다고 진이 해제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오히려 진의 위력을 배가시킬 수도 있었다·
진의 근본 원리를 이해하고 엄격한 법칙에 의거해 파훼해야 했다· 다행히 하진월은 서문화가 펼친 진법을 깊이 이해하고 파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바로 이곳이다·”
그는 진법의 중심을 찾았다· 유난히도 많은 족적이 찍혀 있는 곳이다· 방향도 제각기였고 깊이도 제멋대로였다· 언뜻 무작위로 찍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진월의 눈에는 그 안에 담긴 일정한 규칙이 보였다·
하진월은 규칙에 따라 족적을 하나씩 지워갔다· 그런 그의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차 실수하는 순간 모두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그 때문에 하진월의 집중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가 슬쩍 소무상을 바라봤다·
‘조금만 더 버텨라 무상·’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소무상의 몸놀림은 점점 무뎌지고 있었다· 곳곳에 입은 상처 때문이다·
혈은잠 때문에 대부분의 공력을 사용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문화는 압도적인 무위를 자랑했다· 그의 등룡선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소무상의 전신에는 상처가 하나씩 생겨났다·
그래도 소무상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자신이 버티는 만큼 살아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귀찮구나 놈·”
서문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서문세가의 비전신공인 전뇌호천공을 극성으로 운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전뇌호천공은 인간의 두뇌를 극한까지 일깨운다· 지금 서문화의 두뇌는 두 개로 나뉘어져 평소의 다섯 배 이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쪽은 혈은잠의 독을 분석하고 해독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고 나머지 일부는 소무상을 상대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평소 실력의 오분지 일도 발휘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소무상은 서문화를 어찌하지 했다· 그만큼 서문화의 무력은 가공했다·
전뇌호천공은 두뇌를 혹사시키는 무공이다· 인간의 지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는 만큼 막대한 피로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일단 전뇌호천공을 이용하면 풀지 못할 문제가 없을 만큼 엄청난 효능을 갖고 있었다·
서문화가 전뇌호천공을 이용해서 풀지 못한 문제는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기문이 만들어낸 혈은잠에 대한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만큼 혈은잠은 지독했다· 그가 내공을 운용하면 할수록 단전은 돌덩이보다 더 단단하게 굳어갔다·
‘굳이 단전을 이용할 필요가 있을까? 내공을 우회해 운용한다면?’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일단 영감을 얻자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전뇌호천공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단전을 대체할 만한 혈도를 탐색하기 시작했고 곧 중단전을 찾아냈다· 간혹 강호에는 상 중 하단전을 골고루 활용하는 무공이 나오기도 했지만 서문세가에는 그런 무공이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상 중단전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서문세가의 무공은 강력했기 때문이다·
한 가닥 운용 가능한 내력을 중단전으로 돌렸다· 혈은잠에 잠시당한 하단전은 아예 봉쇄했다· 그리고 중단전의 회전력을 이용해 내력을 불리기 시작했다·
쿠우우!
그의 존재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중단전을 이용해 급속도로 내공을 회복해 가는 것이다· 생전 처음 걷는 길이지만 전뇌호천공은 어둠 속의 등불처럼 그를 안전한 길로 안내하고 있었다·
서문화의 변화를 제일 먼저 느낀 이는 그를 상대하던 소무상이었다· 꽉 막힌 수로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것처럼 미약하던 내공이 갑자기 거세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쾅!
“크윽!”
서문화가 휘두른 가벼운 일수에 소무상이 내상을 입고 비틀거렸다· 하지만 소무상은 물러서지 않았다·
당기문이 또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하진월이 움직이고 있다·
‘견디기만 하면 어떻게든 견디기만 하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흔들리는 전의를 다잡았다·
그가 상대하는 남자는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는 평을 듣는 아홉 명 중의 하나이다· 예전 같으면 감히 고개를 들고 바라보지도 못할 만큼 그와는 격이 다른 존재이다·
그런 이와 싸우고 있다· 비록 대등한 것도 아니고 혼자의 힘으로 싸우는 것도 아니지만 그와 검을 겨루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무상은 극한의 쾌감과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간혹 인간에겐 축복처럼 단 한 번의 기회로 급격한 도약을 하는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이제까지 자신을 막고 있던 견고한 벽을 깨고 저 높은 하늘로 훨훨 날아오르는 순간이·
소무상에겐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서문화는 그보다 월등히 강한 강자였다· 그리고 소무상이 그토록 원하는 경지에 다다른 자였다· 그가 이루고자 하는 궁극의 영역을 먼저 개척한 절대의 무인·
소무상의 몸짓은 그토록 원해온 이상향의 움직임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의 검이 등룡선이 그리는 궤적을 따라갔다· 서문화의 몸짓 손짓 심지어는 호흡까지도 닮아가고자 노력했다·
배움에 목마른 채 치열하게 살아온 자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을 부쉈다· 그의 청운검법은 그렇게 또 하나의 벽을 깨고 진일보하고 있었다·
“이건?”
서문화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기세와 정묘함이 달라졌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쉬악!
마치 독사의 이빨처럼 소무상의 검이 서문화의 사혈을 파고들었다· 서문화가 등룡선으로 가볍게 쳐 냈다· 이전 같으면 맥없이 튕겨 나가야 할 검이 허공에서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다시 서문화의 사혈을 파고들었다·
아무리 쳐 내도 제비처럼 낮은 궤적을 그리며 다시 돌아오는 소무상의 검에 서문화는 짜증이 왈칵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아예 검을 부숴주마·”
아예 검과 소무상을 한 번에 파괴하려는 듯 전력을 다했다·
쩌엉!
등룡선과 소무상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엄청난 충격으로 소무상의 몸이 크게 흔들리며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호구가 찢어져 피가 철철 흘러내렸지만 그의 검은 아직 파괴되지 않았다· 등룡선과 격돌하는 순간 교묘하게 검신을 비틀어 파괴력을 분산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등룡선에 담긴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완전히 흘려보내지 못해 검의 표면에 실금이 잔뜩 가 있다·
‘주군·’
소무상은 진무원이 얼마 전에 손을 봐줬기 때문에 이 정도나마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이 검으로 자신과 지인들을 지켜주길 원했다·
소무상은 검에 자신의 모든 내공을 주입했다·
“크아압!”
“버러지 같은····”
서문화가 중단전으로 겨우 살린 내공을 등룡선에 모두 실었다·
쩌어엉!
다시 한 번 등룡선과 검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하게 실금이 가 있던 검의 표면이 급속도로 갈라졌다· 서문화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 순간 소무상은 남은 공력을 전부 검에 주입했다·
콰앙!
그 순간 겨우 형체만 유지하던 검이 폭발을 일으켰다·
“크윽!”
비산하는 파편 속에서 당혹한 서문화의 신음성이 울려 퍼졌다·
큼지막한 검편이 어깨와 가슴과 복부가 만나는 지점에 박혀 있다· 뜻하지 않은 상처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거의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느껴보는 육체의 고통은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가슴과 복부 사이에 박힌 파편이 그의 중단전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애써 하단전을 우회해 모아두었던 내력이 유실되기 시작했다· 이대로 방치하면 혈은잠에 봉쇄된 하단전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감히!”
그가 노기 어린 시선으로 소무상을 노려보았다· 소무상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육신에 상처를 낸 자였다·
서문화의 시선을 받은 소무상의 얼굴이 핼쑥하게 질렸다· 이번 한 수로 그의 내공은 밑바닥을 보이고 말았다· 목숨을 건 도박이 성공했지만 이젠 움직일 기력조차 없었다·
그때였다·
“무상! 어서 물러나라!”
등 뒤에서 들려온 하진월의 목소리에 소무상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돌려 달아났다· 그의 얼굴에 미련이나 수치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선 그 어떤 치욕도 감당할 수 있었다·
뒤를 돌아서니 하진월이 어느새 서문화가 펼쳐 놓은 진을 해제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무상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당미려를 등에 들쳐 업었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자·”
“예!”
하진월이 당기문을 바라봤다·
“형님 어서 가십시다·”
“잠시만 기다리게·”
당기문이 품에서 독이 담긴 주머니 몇 개를 꺼내 서문화를 향해 흘려보냈다· 그래도 서문화는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흔들린 중단전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독을 모두 뿌린 당기문이 서문화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선배 덕에 선을 확실히 넘었소· 나도 더 이상 괴물이 되는 것을 망설이지 않을 거요· 고맙소 선배·”
당기문이 독주머니를 바닥에 버리고 뒤돌아섰다·
서문화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그런 당기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크윽!”
당장에라도 세 연놈을 잡아 멱을 따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당기문이 뿌린 독이 그의 몸으로 침투해 오고 있었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절대로!’
생전 처음 느끼는 치욕이다·
버러지만도 못하게 여긴 자들의 역습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