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 1장 위기와 악연은 연이어 찾아온다 (1)
어둠과 빛 사이의 회색 공간·
한쪽은 빛이고 다른 한쪽은 어둠인
혼탁한 회색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한 손엔 어둠을 쥐고 다른 한 손에는 빛을 쥐고 세상을 희롱하는 자들이·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나 역시 회색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검은 무복에 붉은 전포를 걸친 이들은 묵혼대라고 불렸다·
그들은 전부 정처 없이 중원을 떠돌던 고아였다· 무적세가에서는 고아 중에서 재능이 출중한 자들을 따로 골라 모처에 밀어 넣었다·
그곳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곁에 있던 동료가 오늘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처음엔 동료의 죽음을 슬퍼했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껏 슬퍼할 수 없었다· 자칫 방심하면 죽음이 그들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아들은 웃음을 잃었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잃고 인간의 감정을 하나둘씩 상실했다· 그렇게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잃고 살인병기로 재탄생했다·
묵혼대는 그렇게 탄생한 살인병기 중에서도 가장 잔혹하고 무공이 강한 자들만 모아 편성한 조직이다·
그들은 타인의 죽음도 자신의 죽음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타인을 죽이는 것이 좋지만 자신이 죽어도 아무런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어떤 살인병기보다 무서웠다· 목표를 죽이기 위해선 자신의 목숨마저 초개처럼 내던질 수 있기에·
묵혼대의 파상공세가 진무원을 향해 펼쳐졌다· 그들의 손에는 늑대의 이빨을 연상시키는 낭아도가 들려 있었다·
수십 자루의 낭아도가 진무원의 전신을 난도질할 듯이 날아왔다·
따다다당!
설화가 낭아도 사이를 헤집으며 불똥을 사방으로 튕겼다· 수십 자루의 낭아도와 격돌했음에도 진무원은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설화가 더욱 날카롭게 묵혼대의 숨통을 노렸다·
전력에서 밀린다고 판단되자 묵혼대는 전략을 바꿨다· 그들은 진무원을 정면으로 상대하는 대신 외곽을 빙빙 맴돌았다· 또 위력이 강한 초식에 몰살당할 것을 염려해 서로 간에 공간을 충분히 두었다· 그러면서도 유기적인 움직임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진무원은 그런 그들의 기민한 움직임에 감탄했다· 그가 천살조를 쉽게 전멸시킬 수 있던 것은 그들이 무력만 믿고 한곳에 뭉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우림이란 강력한 초식으로 그들을 몰살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묵혼대는 달랐다· 그들은 진무원이 위력이 강대한 초식을 쓸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서 천살조보다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진무원이 슬쩍 곁눈질로 옆을 바라보았다·
소무상이 하진월과 당기문 당미려 등을 데리고 장원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묵혼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 한 명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진무원만을 공격하고 있었다·
진무원의 시선이 관대승과 서문혜령을 향했다· 그들이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만반의 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인가?’
언젠가 저들의 역습이 있으리란 것은 짐작했지만 설마 그 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오래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묵혼대가 교묘하게 그를 압박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문혜령은 묵혼대를 맞아 한 치도 밀리지 않는 진무원을 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진무원의 무위는 그녀의 짐작보다 더 가공했다·
‘이미 오물을 뒤집어썼어·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를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해·’
이 자리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운중천이 그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결코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번 일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분명 수천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거야·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
만일 담수천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본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육지문이 담수천에게 마녀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 말리지 않았다· 그래야만 그를 합법적으로 운중천에서 내보낼 수 있었으니까·
“화영·”
“네 아가씨·”
그녀의 등 뒤에 채화영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있던 일이 절대 새어 나가서는 안 돼요·”
서문혜령의 시선은 소무상과 당기문 등을 향해 있었다·
“이미 서문세가의 정예들이 밖을 지키고 있어요· 그들은 절대 살아나가지 못할 거예요·”
“자 잠깐! 절대 살아나가지 못한다니? 당 대협 아니 사부와 사매는 손 안 대기로 했잖아?”
명류산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것은 당신이 약속을 지켰을 때의 이야기죠·”
“당신 말대로 했잖아?”
“그렇다면 시키는 대로 증언을 했어야죠·”
서문혜령의 목소리는 더할 수 없이 차가웠다·
“그건····”
“약속을 안 지킨 것은 당신이에요· 그런데 내가 왜 당신의 말을 들어줘야죠?”
명류산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었다·
그에게 먼저 접근해 온 이는 서문혜령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껏 들떠 있는 가슴에 바람을 집어넣은 것도 서문혜령이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유혹에 빠져 진무원에 대한 정보를 갖다 바쳤다·
서문혜령은 명류산에게 달콤한 미래를 약속했다· 그래도 망설이는 그에게 당기문과 당미려의 안전을 약속했다· 명류산이 꺼리고 있는 심리적인 장벽을 파악하고 무너뜨린 것이다·
“그래도 사부와 사매는 안 돼·”
“이미 늦었어요·”
서문혜령은 냉정했다·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그녀의 냉정함에 명류산이 치를 떨었다·
명류산이 서문혜령에게 주먹을 겨누며 외쳤다·
“이 미친년아 어서 명령을 철회하지 못해!”
“감히!”
“이 개 같은 년아 네년은 지옥 불에 떨어져서도 결코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명류산이 서문혜령에게 독설을 토해낸 후 당기문 등이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졸지에 욕을 얻어먹은 서문혜령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사이 명류산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채화영이 그녀를 위로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제가 그를 처리할게요·”
“아니에요· 어차피 그는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어요· 지금은 진 소협에게만 집중해요·”
“알겠어요·”
서문혜령은 냉정했다· 그 이면에는 명류산이 아무리 애를 써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거란 자신감이 존재했다· 그만큼 그녀는 오늘의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북천문을 재건하겠다고?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절대로!’
저 멀리 묵혼대와 싸우는 진무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쿠과가가각!
광포한 바람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어느새 바닥에는 묵혼대의 시신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진무원의 무위는 실로 가공했다· 묵혼대의 파상공세 속에서도 그는 표홀히 몸을 움직였다· 그의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혈화가 피어났고 그때마다 누군가 반드시 한 명이 죽었다·
일검일살(一劍一殺)의 가공할 검공·
“실로 무섭구나· 저자의 재능이 그 인내심이 그 집요함이·”
“아가씨·”
“지난 십 년 동안 저자는 타인의 눈을 피해 무공을 익혔어요· 그 시간 동안 다른 이들에게 충분히 과시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철저히 자신을 숨겼어요· 나까지 깜박 속아 넘어갔을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은 감히 의심조차 하지 못했겠죠· 이건 천재일우의 기회예요· 이대로 그가 몇 년만 더 숨어서 세력을 길렀다면 기존의 강호 판도는 송두리째 흔들렸을 거예요·”
채화영은 숨을 죽였다· 그녀는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서문혜령이 타인을 저렇듯 높게 평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가씨가 느끼는 위기감이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엄청난 모양이구나·’
서문혜령이 위기감을 느낄 정도의 남자가 눈앞에서 싸우고 있다· 진무원이 별다른 초식을 펼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묵혼대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채화영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강력한 내공을 발출하거나 흔한 검기 하나 내보이지 않았지만 절제된 강함이 느껴졌다· 자신의 힘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단호함과 여유가 진무원의 몸짓에서 묻어나왔다·
채화영 역시 무공의 궁극을 추구하는 무인이다· 그렇기에 진무원의 강함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묵혼대는 실로 집요했다· 그들은 동료의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 명이 죽으면 다른 한 명이 그 빈자리를 채웠고 어떻게든 진무원의 몸에 상처 하나라도 내려고 발악했다·
그 처절한 모습에 몸서리가 절로 쳐질 지경이다· 채화영 자신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열 명 이상 붙으면 살아남을 자신이 없다· 하지만 진무원은 그런 묵혼대를 상대로 오히려 우위를 점하고 한 명 한 명 착실히 제거해 나갔다·
그녀의 팔뚝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이러다가 진무원이 묵혼대를 모두 쓰러뜨리고 자신들을 향해 공격해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관대승이 옆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강하구나· 하지만 아무리 강해도 오늘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음성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단순히 묵혼대만 믿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묵혼대는 그의 힘을 빼놓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았다· 진정한 전력은 이 이후에 투입될 것이다· 그들의 힘은 묵혼대에 비할 바가 아니다·
“마음껏 날뛰어라 진무원· 하나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눈앞에 펼쳐진 무한 지옥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소무상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그의 앞을 일단의 무인이 가로막고 있다· 하나같이 살벌한 예기를 뿌리는 무인의 수가 수십 명이 넘었다·
복장도 가지각색인데다 무기도 제각각이다· 얼핏 오합지졸같이 보이지만 소무상은 그것이 아니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
선한 뜻을 가진 자가 무기를 들고 길목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고로 이들은 적이었다·
스릉!
그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손에 들자 그의 기도가 바뀌었다· 검을 들었을 때의 그는 다른 사람이었다· 돌변한 그의 기도에 앞을 가로막은 무인들이 일순 흠칫했다·
마치 잘 벼려진 명검을 보는 듯한 예기가 소무상의 몸에서 줄기줄기 뻗쳐 나오고 있었다·
그때 하진월이 소무상의 귀에 속삭였다·
“내 말 명심하고 있겠지? 어떻게든 삼십여 장만 더 전진하거라· 그럼 길이 열릴 것이다·”
“저만 믿으십시오 군사님·”
“음!”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하진월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책사는 미래를 준비하는 자· 이 정도 상황쯤은 대비해 놓고 있었다· 문제는 내 예상보다 빨리 이런 상황이 닥쳤다는 것이다·’
솔직히 조금 더 여유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예상보다 저들의 역공이 훨씬 더 빨랐다· 그 약간의 차이가 지금의 위기를 만들었다·
하진월은 두 번 다시 방심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살아남아야 했다·
그가 당기문에게 속삭였다·
“형님도 여차하면 독을 살포할 수 있게 준비해 주십시오· 저들은 반드시 살인멸구하려 할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닙니다·”
“알겠네·”
당기문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무리 관대승이라 할지라도 당문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당문의 장로인 자신을 이렇게 핍박한다는 것은 반드시 살인멸구하겠다는 의지였다·
“미려야 절대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거라·”
“예 숙부님·”
당미려의 손에 암기가 들려 있다· 소무상을 도와줄 수는 없었지만 하진월과 당기문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지키겠다는 의지였다·
그 순간 무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검과 도가 허공을 가르고 거대한 도끼가 수평으로 짓쳐 왔다·
피잉!
순간 한줄기 섬전이 번쩍이더니 선두에서 달려오던 무인의 이마에 동전만 한 구멍이 뻥 뚫렸다·
외당의 무사들이나 익히는 청운검법(靑雲劍法)이다· 삼류 무공이란 소리를 듣던 검법이지만 소무상의 손에서 펼쳐지는 청운검법은 더 이상 별 볼 일 없는 검법이 아니었다·
쐐애액!
독사보다 날카롭고 승냥이보다 광포한 이빨이 적의 목에 구멍을 냈다·
포악한 바람이 불고 있다· 소무상이 몰고 온 바람이었다·
소무상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옷과 검이 선혈로 붉게 물들어갔다· 그래도 소무상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주군이 첫 번째 내린 명이다·
‘반드시 지킨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주검이 쌓여가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 이날의 싸움이 강호에 몰고 올 거대한 변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