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 5장 잔칫상을 뒤엎는 자가 나오게 마련이다 (3)
은마상단은 호북성 조양 인근을 지나가고 있었다· 조양은 호북성 북단에 있는 조그만 현으로 무한까지 이어지는 관도가 지나가는 곳이다·
은마상단은 관도를 타고 남하하고 있었다· 소상주인 유장환과 보표들의 어깨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한 빛이 역력했다· 그래도 그들은 웃고 있었다· 이제 며칠만 더 가면 무한에 도착하고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근 일 년만의 조우였다· 당연히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벌써부터 보표들의 얼굴에는 짙은 기대감이 떠올라 있었다·
유장환도 웃었다·
‘다행이다· 별 탈 없이 이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되어서·’
그는 일행의 안전을 책임지는 소상주였다· 다른 이들보다 많은 것을 생각하고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일 년 동안 그가 겪은 심적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그 고통의 길도 끝이 보이고 있었다·
물론 본단에 도착해도 얼마 쉬지 못하고 다시 상행을 떠나야 할 테지만 그래도 당분간이라도 마음 편히 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행복했다·
문득 그의 시선이 근처 마차의 지붕 위에 앉아 있는 은한설에게 향했다· 모두가 제때 씻지 못해 꾀죄죄했는데 오직 그녀만은 예외였다· 딱히 씻을 만한 곳이 없었는데도 그녀는 늘 깨끗했다· 심지어는 그녀가 입고 있는 옷에도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은 것 같았다·
이젠 유장환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평범한 소녀가 저렇게 청정함을 유지하기도 힘들뿐더러 장정들도 힘들어하는 여정을 가뿐하게 버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 문파의 제자일까?’
유장환은 그녀가 명문의 제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어느 문파 소속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은한설을 바라보는 유장환의 가슴이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은한설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어서 이게 무슨 주책인가 하는 죄책감이 들었다· 겉으로 보이는 은한설의 나이는 이제 겨우 열대여섯 살 정도· 서른이 훌쩍 넘은 자신이 그런 은한설을 좋아한다는 것이 당혹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의 진심을 알게 되면 그녀도 좋아하게 될 것이다·’
그에게는 막대한 부와 은마상단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여인이라면 누구나 꿈꿔볼 만한 조건을 가졌다· 그런 물질적인 조건으로 여인의 환심을 사고 싶지는 않았지만 은한설에게만큼은 예외로 하고 싶었다· 그만큼 은한설은 환상적이면서도 몽혼적인 매력을 갖고 있었다·
“거참 욕심이 과하다니까요·”
옆에 있던 호상단주 이등명이 또다시 구박했다·
“사랑에 나이 차가 무슨 상관입니까?”
“벌써부터 사랑 타령입니까? 저 소저에 대해 아는 게 얼마나 있다구요?”
“꼭 모든 것을 알아야 합니까?”
“쯧쯧! 여자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입니다· 저렇듯 청초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강호의 흉악한 마두일 수도 있습니다·”
“에이! 꼭 말을 해도····”
“강호란 곳이 그렇게 흉악한 곳이니 마음을 놓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여간 초치는 데 일가견이 있다니까·”
그저 가벼운 농담처럼 말했지만 얼마 전부터 이등명은 약간의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결국 그녀에 대해 알아낸 것은 하나도 없다· 아는 것은 은한설이라는 이름 석 자뿐·’
강호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자들이 은한설처럼 신분 내력이 불분명한 자였다· 그 어떤 불씨를 안고 있는지도 모르고 괜히 골치 아픈 일에 연루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것은 이제 목적지인 무한에 거의 근접했다는 것이다· 무한에서 헤어지면 은한설과의 인연도 끝이다· 유장환이야 아쉬워하겠지만 약간의 시간만 지나면 금방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졌다·
그때 마차 위에 있던 은한설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느껴지는 분위기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쉬잉!
그 순간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커다란 창 한 자루가 은한설을 향해 날아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은한설이 뒤로 몸을 날리는 순간 창이 격중한 마차가 산산이 부서져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스 습격이다·”
“모두 사방을 경계하라!”
주위에 있던 보표들이 분분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게 무슨?”
유장환과 이등명의 얼굴에도 당혹한 빛이 떠올랐다· 전 중원에서도 치안이 가장 잘되어 있다고 알려진 곳이 바로 운중천이 있는 호북성이다· 설마 이곳에서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도적인가?”
“은 소저는?”
유장환이 다급하게 은한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부서진 마차 뒤편에 은한설이 무사히 있는 모습을 본 유장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은한설에게 가장 먼저 신경을 쓴 유장환과 달리 이등명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모두 마차를 엄폐물로 삼아 사방을 경계하거라!”
“예!”
그의 지시가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사방에서 낯선 인영들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시오? 우리는 은마상단의 상인들이오!”
이등명이 먼저 신분을 밝혔다·
호북성에서 은마상단의 영향력은 적잖았다· 일단 천하 십대상단 중 하나인데다가 호북성의 유수의 문파들과 많은 교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북성에서 은마상단을 건드린다는 것은 곧 다른 문파들과도 적대관계가 된다는 것을 뜻했다·
습격자 중 한 명이 걸어 나오며 소리쳤다·
“우리는 종남파에서 나왔다!”
“조 종남파가 왜?”
이등명의 목소리가 절로 떨려 나왔다·
종남파라면 구대문파 중 하나이다· 비록 은마상단이 십대상단 중 하나라지만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종남파에 비할 수는 없었다·
“십대상단 중 하나인 은마상단이 마녀와 손을 잡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무슨 말이오? 마녀라니!”
“이제껏 함께했으면서도 모른단 말인가?”
이등명을 향해 노성을 터뜨리는 이는 청산 진인이었다· 그는 종남파의 장문인인 청학 진인의 사제로 열화와 같은 성격과 고강한 무공으로 유명했다·
특이하게도 그는 창술에 능했는데 방금 전 창을 날린 것도 바로 그였다·
청산 진인의 뒤쪽에는 겨우 기력을 회복한 곤륜파의 도사가 있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은한설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제야 왜 이들이 자신을 찾아왔는지 이유를 알아차린 것이다·
곤륜파의 도사가 은한설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 마녀야 어디까지 도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너는 살인멸구를 하려 했지만 하늘의 도우심이 있어 종남파의 무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당장 스스로 무공을 폐지하고 순순히 항복하거라!”
공력이 담긴 그의 노성에 은마상단의 보표들은 심맥이 진탕되어 비틀거렸다· 보표들의 얼굴은 핼쑥하게 질려 있었다·
“마녀····”
은한설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살기 위해 싸운 일밖에 없었다· 먼저 건드린 것도 곤륜파이고 그녀를 마녀라고 매도한 이도 곤륜파의 도사였다·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마녀라고 불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마녀가 아니야·”
“흥!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할 셈인가? 마녀의 변명을 들을 필요 없소· 어서 그녀를 제압해야 하오·”
곤륜파 도사의 채근에 종남파 무인들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난감하게 된 것은 유장환과 이등명이었다·
그들은 은한설이 마녀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이제껏 함께 오면서 그녀는 단 한 번도 도의에 어긋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마녀라고 몰아붙일 그 어떤 근거도 없는 것이다·
유장환이 앞으로 나섰다·
“은 소저는 마녀가 아닙니다· 무언가 잘못 아시고 온 것 같습니다·”
“마녀를 변호하겠다는 것인가? 정녕 그것이 은마상단의 뜻인가?”
“그게 아니라 일의 선후를 확실히····”
“나는 청해성에서부터 마녀의 흔적을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마녀에게 사부님과 사형이 목숨을 잃었다· 대곤륜의 무인들이 마녀의 손에 죽었는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그게····”
곤륜파 도사의 서슬 퍼런 기세에 유장환이 말을 잇지 못하고 이등명을 바라봤다·
이등명은 본능적으로 은마상단이 설립된 이래 최대의 위기에 처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든 이 일을 수습해야 했다·
구대문파는 하나의 연합체나 마찬가지다· 종남파가 움직였다면 다른 문파들이 뜻을 함께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구대문파가 움직이면 당연히 운중천도 움직이게 마련이다·
천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운중천과 구대문파를 적으로 두고 은마상단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가 그녀와 동행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와 특별히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발뺌하겠다는 것인가?”
“그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왜 오랜 여정을 하다 보면 뜻하지 않은 동행을 하기도 하잖습니까?”
“그러니까 우연히 만나 동행했을 뿐이라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보표들과 함께 물러나라· 진실은 나중에 판명이 날 테니까· 하나 그녀의 곁에 있겠다면 한패로 볼 수밖에 없다·”
청산 진인의 말에 이등명이 유장환을 바라봤다·
은한설을 향한 유장환의 마음은 그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유장환 개인의 감정보다는 은마상단 전체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소상주님 지금은 물러날 때입니다·”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녀가 정말 마녀가 아니라면 종남파에서 진실을 밝혀줄 겁니다· 굳이 우리가 그녀와 엮여서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은마상단이 먼저입니다· 대의를 생각하십시오 소상주님·”
“크윽!”
유장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은한설을 바라봤다·
종남파의 무인들이 포위하고 있음에도 은한설의 표정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그녀의 모습에 유장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은 소저 정말 마녀입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
은한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은 마녀가 아니다· 마녀라고 불릴 만한 그 어떤 악행도 저지르지 않았다·
“소상주님 물러나야 합니다· 진실은 나중에 밝혀도 늦지 않습니다·”
이등명이 유장환의 팔을 잡아끌었다· 유장환은 아무런 대답이 없는 은한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은마상단의 보표와 상인들의 목숨이 자신의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에 달려 있다· 은한설을 향한 마음엔 변함이 없지만 그들의 안위보다는 중요하지 않았다·
유장환이 휘하 보표들과 상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은마상단의 무인들은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물러나십시오·”
그의 명령에 보표들과 상인들이 잠시 은한설을 바라보았다·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했지만 청해성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정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은한설 때문에 상단 전체가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은마상단의 보표들과 상인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뒤로 물러났다·
은한설은 그들이 물러서는 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들을 탓하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었다·
결국 그들과 자신의 인연은 딱 그만큼이었다· 거기엔 그 어떤 정(情)도 연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미워할 필요도 원망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가슴 한편이 씁쓸했다·
‘세상의 인심이란 덧없구나·’
갑자기 분노가 울컥 치솟아올랐다·
이제까지 자신을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의 돌변한 시선과 냉랭한 분위기가 불편했다· 자신은 그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끼친 것이 없는데 저들은 오히려 그녀를 골칫덩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청산 진인과 곤륜파 도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마녀야 당장 무릎을 꿇어라!”
“마녀를 제압하라!”
종남파의 무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은한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무인들을 보며 은한설이 중얼거렸다·
“마녀 세상은 진정 내가 마녀가 되길 원하는 것인가?”
은한설의 몸 안에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혈도를 타고 치닫던 광포한 기운이 한꺼번에 방출됐다·
화하학!
은한설의 몸이 순식간에 은백색 기류에 휩싸였다·
수십 년의 시공을 격해 백야마녀(白夜魔女)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