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 1장 가지가 풍성해도 줄기를 모두 가릴 수는 없다 (2)
콰르르!
검은 색 기류에 둘러싸인 비무대가 요동치고 있었다· 군웅들은 안력을 높였지만 보이는 것은 온통 검은색 기류뿐이었다· 하지만 눈으로 보지 않아도 상상을 초월하는 싸움이 기류 안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음에도 섬뜩한 예기와 날카로운 기파가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누군가 검은색 기류를 두 조각내고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살풍경한 모습에 모두가 공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중에서도 심원의와 서문혜령의 표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저자의 무력이 저 정도였던가?”
“그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거물이 되었군요·”
“으음!”
진무원의 나이라고 해봐야 이제 겨우 스물너덧 정도· 그들보다도 어리다· 그런데 지닌바 무위는 그들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그가 상대하고 있는 이는 북천사주 중 한명인 연천화였다· 지닌바 무위가 아홉 하늘에 거의 육박한다고 알려진 강호 최절정의 고수였다· 그런 고수를 상대로 진무원은 밀리는 기색 하나 없이 대등한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아마 칠소천 중 누구도 저렇듯 연보주와 대등하게 싸울 수 없을 거예요·”
“인정해야겠군·”
심원의가 주먹을 꽉 쥐었다· 어깨에 경련이 일고 악다문 이빨 사이로 혈흔이 내비쳤다· 그만큼 분한 것이다·
한때 자신의 손가락으로 생사를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보잘 것 없던 존재가 어느새 거인으로 성장해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항상 남들 위에서 군림해온 심원의에겐 굴욕이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놔두면 놈은 분명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다· 그냥 두고 볼 것인가?”
“당장은요·”
“방관하겠다는 건가?”
심원의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높아진 그의 목소리에도 서문혜령은 차분했다·
“이미 기세가 넘어갔어요· 연보주가 동하평이란 자를 공격한 것만으로도 중인들은 의구심을 가질 거예요· 의심은 또 다른 의심을 부를 것이고 분명 진실을 파헤치려는 자들이 나올 거예요·”
“으음!”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나서서 사람들의 눈총을 살 필요는 없어요· 그런 역할은 십대장로들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래서 이대로 지켜보겠다?”
“그건 아니에요· 당장은 때가 아니란 것뿐이에요· 상대의 기세가 강할 때 굳이 맞설 필요가 없다는 뜻이에요· 지금 당장은 그가 득세를 하고 있지만 지금의 기세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는 없어요·”
서문혜령이 군웅들 앞쪽에 있는 하진월을 바라보았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하진월 역시 서문혜령을 보고 있었다·
‘한방 크게 얻어맞은 것은 인정하죠· 하지만 언제까지 내가 이대로 두고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나에게도 비장의 한수는 있으니까요·’
그녀가 숨겨둔 비수는 날카로우면서도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었다·
서문혜령은 쉽게 지치지 않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굴욕을 감내할 수도 있었다· 기다리다보면 분명 기회는 올 것이다· 지금은 그때를 위해 힘을 비축해야할 때였다·
모두가 서문혜령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십대장로들은 그녀만큼 인내심이 강하지도 않았고 기다리는데 익숙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연천화의 무위에 놀라고 그와 대등하게 맞서 싸우는 진무원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 연보주와 대등한 경지라니·”
“이 자리에서 놈을 없애지 못하면 끝없는 후환에 시달릴 것이 분명하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반드시 저자를 제거해야 하오·”
그들은 평소라면 체면 때문에라도 절대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을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그만큼 그들이 진무원에게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대력심이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던 간에 금마대는 놈을 제압할 준비를 하도록·”
“존명!”
금마대가 대답과 함께 일제히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이제까지 당기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너무 하는 것 아니오?”
이제까지 화를 꾹꾹 눌러 참았던 당기문이었다· 하진월 때문에 참았고 당문을 생각해서 참았다· 하지만 십대장로들이 작당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당기문이 나서자 대력심이 인상을 썼다·
“당 장로 뭐가 너무 하다는 거요?”
“본말이 전도 되도 유분수지· 무한에서 일어났던 사건 때문에 그를 가뒀던 것이 아니었소? 그런데 이제 와서 엉뚱하게도 그가 북천문의 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이려 하다니· 도대체 어디까지 후안무치해질 생각이오?”
“말을 가려서 하시오 당 장로· 후안무치라니?”
“그럼 이게 후안무치가 아니고 무엇이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도 어느 정도지· 이건 도가 지나치지 않소?”
당기문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비록 무공 초식 하나 변변히 익히지 못했고 내공도 쌓지 못했지만 그 기세만큼은 십대장로들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진무원과 연천화의 대결에 정신이 팔려있던 무인들 중 상당수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을 정도였다·
얼굴이 벌게진 대력심이 목소리를 높였다·
“말을 가려서 하시오 당장로·”
“내가 못할 말을 했소이까?”
대력심의 강렬한 기세에도 당기문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에 십대장로들의 얼굴에도 난감한 빛이 떠올랐다·
비록 무공을 일초반식도 모르지만 당기문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당문의 장로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는 천하에서 가장 독에 해박한 인물이었다· 그와 원한을 지게 되면 그 후환이 어디까지 미칠지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그때 칠성진인이 일어나 당기문의 옆에 섰다·
“나 역시 그의 의견에 동의하오·”
“으음!”
칠성진인은 화산파의 장로였다· 그의 의견은 곧 화산파의 의견이나 다름없었다·
‘이리 되면 당문과 화산파가 반기를 든 셈인가?’
두 문파가 강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들이 이렇게 대놓고 반대할 줄은 예상을 하지 못했기에 십대장로들은 더욱 당혹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인물이 두 사람에게 합세했다·
“저희 무산파도 당문과 화산파의 의견에 동의해요·”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서있는 늘씬한 체형의 여성이 서 있었다· 무산파의 남수련이었다·
후기지수로 분류되는 남수련이었지만 장문제자인만큼 무산파를 대변한다 할 수 있었다· 무산파가 비록 신비지문에 속했지만 그 영향력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우리 공동파도 마찬가지요·”
이번엔 공동파의 장로마저 합세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십대장로들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운중천을 구성하는 주요문파들 중 네 문파가 공식적으로 반기를 든 이상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수도 없게 되었다·
대력심과 유청월처럼 강경한 자세를 고수하던 이들의 표정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이대로 일을 강행했다가는 오히려 큰 역풍을 맞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유청월이 십대장로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강호의 노고수들답게 그들은 임기응변에 능했다· 그들이 한발 물러섰다·
“좋소! 그렇다면 일단 북천문의 후인이라는 문제는 미뤄둡시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무한에서 운중천의 허락 없이 수십 명의 인원을 살해한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소·”
“그렇소이다· 감히 운중천의 영역에서 살상을 한 죄는 크오· 이 일만큼은 엄중하게 처벌해야 하오·”
그들의 억지에 당기문이 목소리를 높였다·
“자객들의 습격을 받은 거라 했소· 제 아무리 운중천의 영역이라지만 가만히 앉아서 당해야한단 말이오?”
“그들이 자객이란 증거는 어디에도 없소·”
“시신을 살펴보면····”
“이미 철저히 살펴보았소· 허나 어디에도 그들이 자객이라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소·”
“그런····”
유청월의 억지에 당기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무원과 하진월을 습격했던 자객들의 시신은 이미 운중천에서 수습해갔다· 그들이 시신을 보이지 않는 이상 당기문 등이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당기문의 시선이 하진월을 향했다· 하진월은 여전히 그들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얄밉게 느껴질 정도였다·
당기문이 구원을 청하는 눈빛을 보내자 하진월이 손가락으로 연단 아래를 가리켰다· 당기문의 시선이 자연스레 하진월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향했다·
연단에 한 사내가 누군가의 뒷목을 잡고 올라오고 있었다· 수많은 무인들이 연단을 지키고 있었지만 사내의 기이한 기세에 짓눌렸는지 누구도 그를 막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사내를 향했다·
유청월이 물었다·
“자네는 누군가?”
“소무상이라고 합니다·”
그의 등장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소무상의 정체를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단 한명을 빼고·
“자네가 어쩐 일인가?”
소무상에게 아는 척을 하는 남자는 비각전주 월성천이었다· 소무상이 당주로 있는 추밀당이 비각전 휘하의 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소무상이 목덜미를 쥐고 있던 자를 연단에 던졌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유청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인가?”
“이번에 무한에서 난동을 부린 자객들 중 한명입니다·”
“자객?”
십대장로를 비롯한 운중천 수뇌부들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월성천이 급히 물었다·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암살을 시도했던 자들 중 한명을 우연히 잡았습니다·”
“그가 자객이란 증거가 있는가?”
“직접 물어보십시오·”
소무상이 남자를 제압했던 마혈을 풀어줬다· 그러자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월성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말하라· 정말 네가 자객이냐?”
“크윽! 그···렇습니다·”
대답을 하는 남자의 얼굴엔 짙은 공포의 빛이 어려 있었다· 공포의 근원은 바로 소무상이었다· 단지 소무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남자는 바지에 오줌을 지릴 정도였다·
자객으로 키워져 누구보다 고통에 무감각하다고 자부했던 남자였지만 소무상의 고문은 그런 남자의 자부심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
소무상의 고문에 남자의 육체보다 정신이 먼저 무너졌다· 정신이 무너진 남자는 소무상의 질문에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정말 자객이란 말이냐?”
“환환살문의 자객이 맞습니다· 저희는 의뢰를 받고 진무원이란 자를 습격했습니다·”
“의뢰?”
“그렇습니다· 문주께서 의뢰를 받아 살행을 결정하였습니다·”
“의뢰를 받았다?”
월성천의 미간에 골이 패인 순간 대력심이 앞으로 나섰다·
“네놈의 말에 책임을 질수 있느냐? 네놈이 무한에서 난동을 부린 자들과 한패라는 것을 어찌 믿느냐?”
“그들의 겨드랑이를 살펴보면 조그만 나비 문신이 있을 겁니다·”
남자가 팔을 들어 자신의 겨드랑이를 보여줬다· 그곳에는 검은 나비 문신이 있었다·
“으음!”
남자의 대답에 대력심이 할 말을 잃었다· 진무원을 습격했던 자들의 겨드랑이에 나비 문신이 있는 것은 오직 운중천의 수뇌부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당기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누가 자네들을 사주했는가?”
“청부는 오직 문주께서 직접 받는지라 저 같은 말단 자객은 그런 상세한 내용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남자의 대답에 서문혜령 뒤쪽에 있던 좌문호가 은밀히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남자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왔다면 사태가 것잡을수 없이 커질뻔 했기 때문이다·
서문혜령이 눈을 감았다·
‘끝났구나·’
이로써 진무원을 옭아매던 족쇄가 모두 사라졌다· 그를 억압할 명분 따윈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십대장로도 그 사실을 알기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서문혜령이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그녀의 망막에는 온통 하진월의 얼굴만 보였다·
‘그는 결국 단 한 번도 앞에 나서지 않고 이 모든 일을 해냈구나·’
그 주도면밀함에 소름이 다 끼쳤다· 강렬한 위기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아니야· 차라리 잘됐어· 이로써 당신이라는 존재를 확실하게 인지하게 되었으니· 당신이라는 존재가 노린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나도 손해를 본 것만은 아니야·’
서문혜령은 웃었다·
어둠속에서 날아오는 화살이 무서운 거지 드러난 창은 큰 위협이 되지 않는 법이다·
하진월은 진무원의 발목에 매인 족쇄를 풀었을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세상의 주목을 받게 했다· 세상의 양지에 환히 드러난 셈이니 감시하기가 오히려 쉬워졌다·
그때였다·
지잉!
한줄기 강렬한 기파가 연무장을 휩쓸었다·
서문혜령의 시선이 비무대 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