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 1장 가지가 풍성해도 줄기를 모두 가릴 수는 없다 (1)
스스로를 의심하는 그 순간 마음속엔 귀신이 찾아온다·
탐욕과 어둠을 자양분 삼고
질시와 분노를 먹이 삼아 덩치를 불려갈 지니·
귀신에 먹힌 자·
결국은 자기 자신도 먹히고 말 것이다·
검광이 번쩍인 순간 진무원의 몸이 뒤로 밀렸다·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을 아득히 넘어선 섬격(閃擊)이었다·
연천화의 검공은 찰나의 순간에 명멸하는 섬광 같았다· 번쩍이고 소멸되고 다시 번쩍이며 수레바퀴처럼 연환 되었다· 톱니바퀴처럼 정교하면서도 숨 쉴 틈도 없이 이어지는 그의 공격에 진무원조차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방어에만 치중해야 할 정도였다·
쉬가악!
연천화는 커다란 패검을 마치 장난감처럼 사용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엄청난 풍압이 일어나 진무원을 압박했다· 전신을 짓누르는 엄청난 압력에 진무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중천무량검(重天無量劍)· 이것이 나의 검공이다·”
연천화의 음성이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자신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북천문을 배신하면서까지 검보를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수십 개의 검공을 분석하고 해체해 장단점을 파악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검의 철학에 도움이 되는 검리를 받아들이고 상반되는 검리는 철저히 배제했다· 그렇게 그는 십년 동안 자신만의 검공을 완성해갔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무한에 가까운 압력이 층층이 형성되어 상대를 압박한다· 내공의 소모가 극심해 무한에 가까운 공력이 없으면 펼치는 것조차 불가능한 불가해의 검공·
오직 그만을 위해 존재하고 그만이 펼칠 수 있는 검· 그것이 바로 중천무량검이었다·
연천화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기이한 압력이 일어나 진무원의 전신을 옥죄어왔다· 마치 깊은 바다 속에 잠긴 것처럼 숨 쉬는 것도 힘들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더 힘들었다·
진무원의 눈빛이 깊이 침전되었다·
그 역시 검의 길을 걷는 무인이었다· 멸천마영검이라는 불가해의 검공을 익히기 위해 평생을 노력해왔다· 그렇기에 연천화가 걸어왔을 고된 길이 눈에 선히 보였다·
고독과 집념으로만 걸을 수 있는 검의 길·
새로운 검공은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검공을 완전히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는데 수많은 세월이 걸린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다른 검공에 눈을 돌리고 안계를 넓힐 수 있다·
하루가 쌓여 한 달을 이루고 한 달이 모여 일 년이 된다· 그렇게 쌓인 일 년의 세월이 또다시 수십 년이 모여 지금 연천화의 나이가 되었다·
중천무량검에 연천화의 인생이 담겨 있었다·
비록 그것이 잘못된 선택과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그 가공할 집념과 노력만큼은 인정해줘야 했다·
연천화의 중검이 섬전처럼 진무원의 눈앞에서 번쩍였다· 전방위 감각이 없었다면 뭐가 어떻게 된지도 모르고 당할 뻔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만큼 연천화의 검공은 무섭고 날카로웠다·
“아!”
동하평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연천화의 중천무량검은 실로 무서웠다· 그의 검이 직접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데도 엄청난 압력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그나마 진무원이 그의 앞에서 연천화의 검에서 일어난 압력을 해소해주지 않았다면 진즉 폐가 쪼그라들어 숨이 끊어졌을지도 몰랐다·
‘문주께서 그랬지· 단순히 무재만 놓고만 본다면 연천화의 재능은 최고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검에 대한 집념만큼은 감히 그 누구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고·’
그래서 누구의 밑에도 있을 수 없었다·
북천문은 그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아닌 날개를 묶어둔 좁은 새장에 불과했다· 그것이 연천화가 북천문을 배신하고 진관호를 운중천에 판 이유였다·
쉬앙!
연천화의 중검이 그의 미간을 향해 날아왔다·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가공할 압력이 그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얼굴에 파문이 일고 두 눈의 실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 됐다·
죽음을 직감한 동하평이 눈을 감았다·
캉!
그 순간 그의 코앞에서 쇳소리가 울려 퍼지며 가공할 압력이 거짓말처럼 해소되었다·
슬며시 눈을 뜬 동하평의 눈에 진무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진무원의 설화가 연천화의 중검을 저만치 튕겨낸 것이다·
희끗한 잔영만 남긴 채 진무원의 동체가 움직였다· 마치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것처럼 진무원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허공에 묵 빛이 번쩍일 때마다 연천화의 중검이 뒤로 튕겨나갔다· 검에 담긴 힘으로 따지자면 연천화의 중검이 압도적이었지만 진무원은 교묘하게 맥을 끊고 있었다·
결국 동하평의 숨통을 끊지 못한 연천화가 중검을 거둬들이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의 눈에는 은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제 동하평의 숨을 끊어 입을 막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쯤 되면 연무장의 무인들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의혹은 또 다른 의혹을 낳을 것이고 의구심이 증폭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이미 오물을 뒤집어썼다· 그가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군웅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이 모든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해야 했다· 그 원인 제공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많이 컸구나· 제법 이빨도 들어낼 줄 알고· 강하게 컸어·”
“숙부 덕입니다·”
“장난은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놀아보자꾸나·”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진무원을 죽이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이제 주위의 시선 따윈 상관없었다· 어차피 모든 것이 변명으로 들릴 터라면 차라리 진무원을 죽여 후환을 없애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와 몇몇 십대 장로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뒷수습은 그들의 몫이었다· 그들을 믿었고 자신을 믿었다·
후웅!
극한의 공력을 주입하자 그의 패검이 검명을 토해냈다·
“아!”
순간 비무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연천화의 주위 공간이 이지러져보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연천화가 발산하는 존재감과 기파가 공간마저 이지러트린 것이다·
두 사람이 서있는 비무대가 찌그적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연천화가 발산하는 가공할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의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연천화의 압박 속에서 진무원이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이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양한 감정이 담긴 수많은 시선들· 그들 속에 익숙한 이들도 있었고 적의 어린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평생을 가도 진무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정체를 감췄다면 얼마든지 편히 살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만천하에 정체를 밝혀 이런 고난을 자초하는지 말이다·
‘누구에게나 존재의 이유는 다른 법이지·’
북천문에 태어난 것이 그의 의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관호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 역시 그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저 태어나보니 아비가 북천문주 진관호였고 그의 아들이란 이유로 수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진무원은 진관호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길을 택한 아비 그런 아비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 진무원에겐 무엇보다 중요했다·
문득 진무원의 시선이 하진월과 마주쳤다· 그의 망막에 맺힌 하진월은 웃고 있었다·
‘자 판을 만들어줬으니 마음껏 날뛰라구·’
뒷수습은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이다·
진무원은 피식 웃었다· 단 며칠 만에 동하평을 찾아내 이곳으로 데려온 하진월의 능력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고서점 지하에서 처박혀 있던 그 하루 동안 하진월은 십년 전 북천문에서 있었던 사건을 재구성함으로써 진실의 이면에 숨어 있던 동하평의 존재를 찾아냈다· 그것 하나만 봐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믿으라고 한다· 자신을 믿고 마음대로 날뛰라고 한다·
“그럼 어디····”
진무원은 그의 호의를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설화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퍼엉!
그 순간 연천화가 움직였다· 그가 서있던 비무대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터져나가며 진무원을 향해 거센 풍압이 밀려왔다·
진무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설화를 휘두르자 눈앞의 공간이 비단폭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잘려나가며 연천화가 나타났다·
쩌엉!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격돌하며 사방으로 후폭풍이 몰아쳤다·
“크윽!”
후폭풍에 휘말린 동하평이 비무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멍하니 비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콰르릉!
고요한 하늘 아래 뇌성벽력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연천화의 패검은 천하에서 가장 무겁고 단단한 금속이라는 적련현철(赤鍊玄鐵)을 정련해 만들었다· 오직 적련현철만이 연천화의 가공할 공력과 중천무량검을 사용할 때 발생하는 가공할 압력을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패검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벼락이 내리꽂히는 듯한 충격과 함께 공기가 터져나갔다·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위력이었다·
“아아!”
“저자의 무공이 저 정도였다니·”
“으음!”
군웅들은 물론이고 십대장로마저도 연천화의 가공할 위용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십대장로들 역시 당금 강호의 최고 자리에 올라있는 고수라고 자부했지만 솔직히 지금 연천화가 보이는 엄청난 검공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단단한 화강암을 쌓아 만든 비무대가 연천화가 펼친 검공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비무대 근처에 있던 무인들은 서둘러 뒤로 물러나야 했다·
“세상에!”
군웅들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연천화의 검공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일검을 받아낼 자신조차 없었다· 그만큼 연천화의 무위는 그들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하지만 더욱 상상을 초월하는 것은 바로 진무원이었다· 연천화의 가공할 공세에 맞서 진무원은 설화를 휘둘렀다·
카카캉!
그 흔한 검기도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후에야 펼칠 수 있다는 검강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찌르고 베고 휘두르며 검의 묘리를 최대한 살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연천화의 가공할 공세는 진무원의 검을 뚫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검공을 익혔기에?’
연천화의 눈에 탐욕의 빛이 감돌았다·
북천문에 그가 모르는 검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북천문의 모든 검보를 쓸어왔기에 더욱더 그랬다· 하지만 진무원의 검은 그가 아는 그 어떤 검리와도 달랐다·
머리카락 하나만큼의 허점만 보여도 진무원의 검은 독사처럼 파고들었다· 그 날카로움과 예리함은 천하의 연천화마저도 헛바람을 들이키게 만들 정도였다·
‘반드시 놈을 사로잡아 무슨 검공을 익혔는지 알아내야 한다· 놈의 검공을 빼앗아 익힌다면 검의 극의를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가슴 속에 숨어있던 탐욕어린 괴물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 괴물의 속삭임에 연천화는 북천문을 배신했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다시 한 번 연천화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놈의 검공을 빼앗아 네 것으로 만들어라· 넌 더 강해질 수 있어· 그리 되면 운중천의 아홉 하늘을 네 발 아래 둘 수도 있을 거야·’
괴물의 속삭임에 넘어간 연천화의 눈이 붉게 충혈 됐다·
갑자기 그가 들고 있던 패검을 부서진 바닥에 꽂더니 품안에서 비수 여섯 자루를 꺼내 허공에 흩뿌렸다· 그러자 패검과 비수에서 검은 기류가 흘러나와 비무대를 휘감았다·
검은 기류는 외부와 비무대를 완벽하게 분리하더니 내부를 칠흑의 세상으로 만들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시커멨다· 칠흑의 공간은 진무원의 공간감을 흩트려 놓았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욕지기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공간감을 상실했는지 좌우와 위아래가 구별되지 않았다· 마치 디딜 것이 없는 공중에 붕 떠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검으로 창조한 세상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검계(劍界)인가?’
연천화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검으로 내부와 외부의 세계를 분리한 정도일 것이다·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그가 대단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곳에선 연천화의 능력은 배가 된다· 반대로 진무원은 갖은 제약에 발목이 잡혀 능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과 같은 수준의 고수들에게는 생사를 가르는 큰 차이일수도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연천화는 자신이 만들어낸 어둠 속 어딘가에 동화되어 있을 것이다· 우선은 그를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어디냐?’
진무원이 전방위 감각을 끌어올렸다·
쐐악!
그 순간 한줄기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진무원은 본능적으로 설화를 휘둘렀다· 그러자 조그만 비수 한 자루가 튕겨져 나갔다· 연천화가 검계를 만들 때 사용한 비수 중 한 자루였다·
튕겨져 나간 비수는 마치 스스로의 의지를 지닌 생물처럼 허공에 요요롭게 떠있었다·
“이기어검(以氣馭劍)?”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어둠을 뚫고 나머지 비수 다섯 자루가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