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 7장 앉아서 폭풍을 부른다 (3)
운중천 한가운데서 진무원과 심원의가 마주 섰다· 금주상과 집법당 무인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먼저 입을 연 이는 심원의였다·
“칠 년 만인가?”
“그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스스로를 숨긴 채 살아오다니 네놈도 참 대단하구나·”
진무원을 바라보는 심원의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 어린 감정은 증오와 분노에 가까웠다·
“그때도 네놈은 무공을 익힌 것을 숨겼겠군· 크큭! 이 심원의가 감쪽같이 속은 건가?”
“살아야 했으니까요· 그게 딱히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 생존을 위한 노력은 죄가 아니지· 하지만 기만을 당한 입장에서 보자면 기분이 나쁜 것은 사실이거든·”
“기만을 당했다고 보십니까?”
“그럼 기만이 아니던가? 네놈은 나에게 무공을 익힌 사실을 철저히 숨겼고 나는 멍청하게 끝까지 네놈의 거짓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심원의가 이를 뿌득 갈았다·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소름 끼치게 빛나고 있었다·
‘북검 북검이란 말이지·’
칠소천을 위협하는 찬란한 별호다·
이미 그에게 현공휘가 패퇴했다· 그의 별호가 헛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하지만 심원의는 진무원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기 싫었다·
진무원을 자신과 같은 반열에 놓고 사람들이 평가한다는 사실 자체가 소름 끼치게 싫었다· 그가 인정하는 이는 오직 담수천 한 명뿐이었다·
그를 제외한 동 나이대의 누군가 자신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상대는 그가 그토록 무시하던 북천문의 마지막 후인이다·
‘적어도 네놈만큼은 내가 사는 세상에서만큼은 네놈을 인정할 수 없다·’
심원의가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에라도 진무원에게 한 방 날릴 기세이다·
그 순간 진무원이 입을 열었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것이 죄가 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심 공자님에게 사과 또한 하지 않을 겁니다·”
“흥! 나도 네놈에게 사과 받을 생각 따윈 없다· 단지 오늘은 네놈의 그 잘난 낯짝을 보러 온 것뿐이다· 어차피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네놈은 그리 오래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게 되겠죠·”
“감히 운중천에서 이 소란을 일으키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네놈은 차라리 북방의 거친 평원에서 평생을 숨어 지내는 것이 나을 뻔했다· 그랬다면 비참할지언정 근근이 목숨은 이어갔을 테니까·”
“당신은 그렇게 살고 싶습니까?”
“당신?”
심원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차피 서로가 존중해 줄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다시 한 번 묻죠· 당신은 그렇게 살고 싶습니까? 평생을 도망 다니면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며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흥! 평생을 가도 나에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저도 십 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운명이란 것은···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서 내 뜻과는 상관없이 틀어져 버리더군요· 그 운명의 변곡점이 당신에게도 나타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궤변을 늘어놓는구나· 감히 누가 나의 운명을 튼단 말이냐? 나는 태생부터 네놈과 다른 사람이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절대라는 단어는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감히!”
결국 심원의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노기를 터뜨렸다· 그의 강력한 내력이 담긴 외침에 근처에 있던 집법당 무인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진무원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심원의의 기세가 해일처럼 일어나 진무원을 향해 덮쳐갔다· 무형의 기세였지만 진무원의 눈에는 그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심원의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여전히 칠 년 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살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모든 것을 감춰야 했던 그 고단하던 시절의 초라한 모습으로·
스가악!
그 순간 진무원의 몸에서 한줄기 기파가 흘러나왔다· 마치 검기를 일점에 응축시킨 것처럼 강렬한 기파는 순식간에 심원의의 기세를 끊어낸 것도 모자라 그의 심맥을 파고들었다·
심원의의 안색이 싹 변하며 급히 공력을 끌어올리며 진무원의 공력을 몰아냈다·
“놈!”
그의 도발에 진무원이 초강수로 응수한 셈이다· 예상치 못한 진무원의 응수에 그의 자존심이 상했다·
쿠우우!
그가 공력을 끌어올리자 주변의 공기가 요동쳤다· 그러자 이제까지 지켜만 보고 있던 금주상이 다가왔다·
“거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금 당주님·”
“자네 개인적인 화풀이를 하라고 시간을 내준 것이 아니네·”
금주상의 눈에는 진무원은 가만히 있는데 심원의 혼자서 공력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보였다· 진무원의 내력 유동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원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지금 진 문주를 건드리는 것은 운중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 나는 부디 자네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제가 너무 성급했던 모양입니다·”
금주상의 목소리가 차가워지자 심원의가 한발 물러섰다· 비록 그가 칠소천의 일원이라지만 상대는 운중천의 실세 중 한 명이다· 이 자리에서 대들기에는 보는 시선이 많았다· 자칫하다가는 이제껏 힘겹게 쌓아온 평판이 단숨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무원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까지 노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만일 금주상만 옆에 없었다면 그는 진작 진무원을 향해 무공을 펼쳤을 것이다·
“우린 반드시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네놈은 저 밑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나에게 목숨을 구걸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네놈이···!”
심원의는 겨우겨우 화를 꾹꾹 눌러 참았다· 진무원은 그런 심원의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심원의가 금주상 등과 함께 멀어지는 진무원을 보며 중얼거렸다·
“두고 보거라· 네놈을 천하에서 가장 비참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심원의는 결코 원한을 잊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 아무리 조그만 것일지라도·
진무원은 집법당의 뇌옥에 갇혔다· 그가 갇힌 곳은 집법당의 뇌옥에서도 가장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독방이었다· 외부의 면회는 당연히 허용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운중천 내부 인사들의 접근도 원천적으로 봉쇄됐다·
대부분의 사람은 독방에 갇히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지만 진무원은 달랐다· 오히려 그는 더 잘됐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무공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진무원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시기가 그가 성장할 최적의 순간이라는 것을· 이 시간을 잘만 활용하면 폭발적으로 무공이 늘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진무원은 기꺼이 독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자 두꺼운 철문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금주상은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진무원이 들어간 독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디 이 고난을 잘 헤쳐 나가길 빌겠다 북천문의 젊은 문주여·”
진무원이 집법당의 뇌옥에 갇힌 직후 운중천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그토록 젊은 무인들이 고대하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이제껏 무한이나 운중현에서 정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던 젊은 무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운중천의 정문 한쪽 벽에 커다란 벽보가 붙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벽보로 향했다· 사람들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벽보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렸다·
“금일부터 닷새간 척마대의 무인을 뽑는 행사를 진행한다! 응시 자격은 무림의 명숙 세 사람 이상의 추천을 받은 자 혹은 누구나 알 수 있는 혁혁한 공을 세운 자로 한정한다! 이게 뭐야?”
말도 안 되는 자격 조건에 무심코 글을 읽던 무인이 화를 터뜨렸다· 벽보에 붙인 대로라면 진입 장벽이 너무나 높기 때문이다·
현 무림에서 명숙이라 불릴 만한 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그것도 한 명도 아닌 세 명 이상의 추천이라니· 이것은 아예 대놓고 명문 출신이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누구나 알 수 있는 혁혁한 공을 세운 자라니· 현 강호에서 그 정도의 공을 세운 무인이 몇 명이나 될까? 설령 있더라도 대부분이 명문가 출신일 확률이 높았다·
“이게 뭐야? 우리같이 든든한 배경이 없는 것들은 아예 운중천에 들어오지도 말란 이야기 아냐?”
“누가 아니라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질 것을 기대하고 왔건만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조건이 덕지덕지 붙었단 말인가?”
여기저기서 노성과 불만 섞인 음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불만은 곧 거대한 외침이 되어 운중천의 성문에 울려 퍼졌다·
“우리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달라!”
“우리도 척마대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
군중들의 성난 목소리에 정문을 지키는 외당무인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역시 척마대를 뽑는 조건이 너무나 가혹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들은 운중천에 속한 무인 감히 운중천 앞에서 소요를 일으키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외당무사 한 명이 소리쳤다·
“모두 진정하시오! 이곳은 운중천이오! 이 이상의 소요는 용납할 수 없소!”
“우리는 그저 공정한 기회를 받길 원할 뿐이오! 이건 너무나 가혹하지 않소이까?”
“그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모두 조용하시오·”
“아니 그럼 우린 뚫린 입으로 말도 못한단 말이오? 제기랄!”
장내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져 갔다· 누군가 불씨를 던지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이 위태위태했다·
그때였다· 성문 안쪽에서 외당의 당주 단운강이 걸어나왔다·
“이 무슨 소란인가?”
“그게 척마대를 뽑는 자격 때문에····”
“흠!”
단운강이 서늘한 시선으로 정문에 모여 있는 젊은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감히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젊은 무인들이 노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단운강도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단 사실을 인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단운강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쯤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의 불만은 잘 알고 있소! 운중천의 수뇌부도 조건이 가혹하다는 데 의견을 일치하였소! 그래서 특별히 여러분을 위해 문호를 조금 더 개방하기로 결정하셨소! 단 이번에도 조건이 있소이다!”
“조건이 무엇이오?”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 본 성에는 대역죄인의 자식이 들어와 있소!”
“대역죄인의 자식이 누구요? 그런 자가 강호에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모두들 십 년 전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오!”
“십 년 전이라면 북천문?”
“그렇소! 밀야를 막아야 할 북천문의 문주가 오히려 내통하고 강호를 팔아먹으려 한 사건이 있었소! 당시 운중천에서는 넓은 아량을 발휘해 북천문주의 자식을 살려주었소! 한데 이번에는 그 자식이 다시 중원을 밀야에 팔아넘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소!”
“그럴 수가···· 무슨 증거라도 있소?”
“증거가 따로 필요하오? 북천문주의 자식이 등장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밀야가 창궐했는데! 따지고 보면 척마대를 뽑는 것 역시 밀야 때문이 아니오?”
단운강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정문에 모여 있는 군웅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선동 어린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북천문주의 자식이란 자가 누구요?”
“모두들 그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거요! 진무원이라고 요즘은 북검이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소!”
“북검 진무원? 그가 북천문의 후인이란 말인가?”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그들이 알고 있는 북검 진무원은 현 강호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는 젊은 무인이다· 그가 북천문의 후인이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밀야와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몇몇 사람은 더 이상 단운강의 이야기도 듣지 않고 진무원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에 단운강이 은밀히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분들이 지시한 대로 하니 원하는 반응이 즉각 나오는군·’
그에게 지시를 내린 자는 운중천의 십대장로였다·
누군가 물었다·
“그런데 그 진무원이란 자와 우리가 척마대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겁니까?”
“운중천에는 진무원이란 자의 처분을 놓고 공개 판결을 할 예정이오! 그러니 여러분 모두 참석해서 증인이 되어주시오! 강호의 공적을 처리하는 일에 참석한 것이야말로 혁혁한 공을 세운 일이 아니겠소? 그러면 척마대의 행사에 참여할 자격 중 하나를 자연스럽게 충족하게 되는 것이오!”
단운강의 말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군중들의 웅성거림이 해일처럼 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