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 6장 옛 인연이 항상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1)
은한설은 반짝이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현재 그녀가 있는 곳은 섬서성 장안(長安)이었다· 당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던 장안은 아직도 옛 영화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었다·
장안은 서역을 오가는 상인들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이곳에서 서역으로 출발해 다시 돌아온다· 이곳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상단의 본단이 있는 지역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었다·
은마상단은 장안에서 하루를 묵어간다고 했다· 유장환은 내일 출발 시각을 알려주며 그때까지만 돌아오라고 당부했다·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은한설은 홀로 어디론가 향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장원의 외곽에 위치한 한적한 거리였다· 북적거리는 다른 곳과 달리 유달리 한적한 거리는 봉선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은한설은 봉선로의 고즈넉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사람이 많은 곳보다 이렇게 한적한 곳이 더 좋았다· 그녀는 이곳으로 오는 동안 얼굴에 칭칭 동여맸던 천을 풀었다· 그러자 아름다운 그녀의 미모가 드러났다·
그녀의 시간은 열여섯 살에 멈춰 있지만 독특한 아름다움은 만개한 꽃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디에 있든 은한설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그녀의 독특한 존재감과 아름다움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다·
벌써부터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흘깃 그녀를 보고 있었다· 몇몇 이는 은한설의 미모를 두고 수군거리고 있다·
은한설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매번 이랬다· 남자들은 발정 난 짐승처럼 그녀만 보면 숨겨진 욕망을 드러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의 남자가 똑같은 반응을 보이니 이젠 지겨울 정도이다·
은한설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근처에 있는 객잔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서자 점소이가 재빨리 달려왔다·
“어서 옵셔· 뭘····”
은한설을 맞이하던 점소이가 잠시 그녀의 외모에 넋이 빼앗긴 듯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이미 익숙한 일이기에 은한설은 담담히 말했다·
“양고기로 만든 화과 되나요?”
“예? 예 물론 됩니다·”
“그걸로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금방 내오겠습니다·
점소이가 얼굴을 붉힌 채 주방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은한설은 창가의 자리에 앉았다·
북천문에 있을 때 진무원은 항상 양고기로 만든 화과를 내왔다· 그때는 지겹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 몇 년간 입에 대지도 않았고 굳이 찾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늘 이상하게 양고기로 만든 화과가 먹고 싶었다·
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거리는 한적했고 지나가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은한설은 그 한적함이 좋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점소이가 쟁반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손님 주문하신 화과 나왔습니다·”
그가 탁자 위에 화과를 내려놓았다· 조그만 솥 안에 담긴 화과에서는 제법 맛있는 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점소이는 은한설의 얼굴을 다시 한 번 훔쳐보고는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갔다·
은한설은 수저로 화과의 국물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후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국물이 입으로 넘어갔다·
순간 은한설의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졌다· 자극적이면서도 화려한 맛이 느껴졌다· 주방장이 한껏 솜씨를 부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은한설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화과는 이렇지 않았다· 좀 더 담백하고 깊은 맛이 났다· 자극적이지는 않으면서도 그녀의 입맛을 충족시켰다·
‘무원·’
그제야 그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섬세하게 배려해 줬는지 알 것 같았다· 북천문에서의 평범하던 일상 색다를 것 없던 시간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은한설이 옛 생각에 젖어 있을 때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대낮부터 객잔 한쪽 구석에 앉아 술을 홀짝거리던 건장한 남자들이다·
남자들은 제법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인 듯 질 좋은 비단 옷에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패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남자들 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가 은한설의 맞은편에 앉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 소저 화과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지?”
“····”
“못 보던 얼굴인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겠는가?”
남자의 물음에도 은한설은 대답하지 않고 창밖만 바라봤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멋대로 의자에 앉은 남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흐흐! 천하의 석 공자를 이런 취급하다니·”
“거 맹랑한 계집일세·”
같이 있던 남자들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에 석 공자라고 불린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이봐 사람이 말을 걸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남자의 이름은 석단해· 장안의 명문가인 석가장의 둘째 공자였다· 반듯하게 자란 형과 달리 평소 파락호 짓을 많이 하고 다녔기에 석가장에서는 그를 내놓은 자식 취급할 정도였다·
은한설을 바라보는 석단해의 눈에 음욕의 빛이 짙게 떠올라 있다· 이제껏 수많은 여자를 건드리고 다닌 그의 눈에도 은한설은 매우 특별하게 보였다·
‘이년은 분명 물건이다·’
약간은 어려 보이는 외모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리다고 생각하니 더 아랫도리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그는 그보다 더 어린 소녀와도 동침한 적이 있고 석가장의 힘을 이용해 모든 문제를 무마했다· 그런 경험이 그에게 자신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은한설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허락 없이 남의 자리에 앉은 것이 더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 아닌가?”
“흐흐! 감히 장안에서 이 석단해에게 버릇을 논하다니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계집이로구나·”
“깜찍한 것이 아직 천상의 맛을 모르는 것이 분명하오 석 공자·”
은한설의 말에 석단해와 남자들이 음담패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듣는 이의 낯까지 붉게 만드는 음란한 말이 봇물이 터진 듯 흘러나왔다·
“어떠냐? 나를 따라가면 팔자를 고쳐주는 것은 물론이고 천상의 쾌락까지 알게 해주마· 흐흐!”
“천상의 쾌락?”
“흐흐! 네년도 일단 사내 맛을 알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게다· 자고로 나처럼 사내다운 사내에게 경험을 해야 인생의 참맛을 알게 되지·”
도를 넘어선 석단해의 말에 은한설의 표정이 점차 냉랭하게 변했다· 하지만 은한설의 미모에 정신이 팔린 석단해와 남자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석단해가 은한설을 품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물러나면 크게 다치지는 않을 거야·”
“다쳐? 우하하! 이 장안에서 누가 나를 다치게 한단 말이냐? 어린 계집이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잔말 말고 이 어르신이랑 함께 가자꾸나·”
석단해가 광소를 터뜨리며 은한설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그 순간 은한설의 눈빛이 변했다·
쾅!
“컥!”
폭음이 울려 퍼지더니 석단해의 몸이 뒤로 튕겨나갔다· 은한설의 몸에서 흘러나온 은빛 기류가 그의 가슴을 강타한 것이다·
벽에 부딪친 후 바닥을 나뒹굴던 석단해의 몸이 몇 번 꿈틀하더니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석 공자?”
“이 계집이 감히 암습을 하다니!”
뜻밖의 상황에 놀란 남자들이 분분히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가득 떠올라 있다·
그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은한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분명히 경고했어· 지금이라도 그를 데리고 물러나면 아무런 일도 없을 거야·”
“석 공자를 암습하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어서 무릎을 꿇고 빌지 못하겠느냐?”
남자들의 말에 은한설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무공이라도 제대로 익혔다면 그녀의 기파를 조금이나마 느꼈을 텐데 이들은 그녀의 기파를 느낄 만큼의 무공도 익히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배경만 믿고 횡포를 부리는 것이다·
남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은한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은한설의 몸에서 다시 은빛 기류가 채찍처럼 뻗어 나와 두 사람을 강타했다·
빠각!
이번엔 비명도 없었다· 나란히 튕겨나간 두 사람은 벽에 부딪친 후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나마 손속에 사정을 봐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놀란 점소이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은한설이 봉변을 당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녀에게 치근거리던 이들이 피떡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쾅!
갑자기 일단의 무리가 객잔의 벽을 부수며 안으로 난입했다· 푸른 옷을 입은 세 명의 도사였다·
도사들 중 젊은 두 사람이 쓰러져 있는 세 사람의 상태를 살폈다·
“숨은 붙어 있습니다· 하나 앞으로 족히 석 달은 요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의 말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중년무인이 은한설을 무서운 눈으로 바라봤다·
“마녀여 손속이 과하구나·”
생면부지의 인물에게 마녀라는 소리를 들은 은한설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마녀?”
“흥! 부인할 셈인가? 우리는 청해성에서부터 너를 추적해 왔다·”
“청해성?”
“청해성에서 황포삼흉을 죽인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지?”
중년무인의 말에도 은한설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중년의 무인이 가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자신의 행적을 부정할 셈인가?”
“혹시 황포삼흉이 은마상단을 약탈하려던 세 명의 도적을 말하는 것인가? 그들을 죽인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는 것인가?”
은한설은 그제야 상대가 지칭하는 황포삼흉이란 존재가 누군지 추측해 냈다· 이곳까지 오면서 그녀가 누군가를 살상한 것은 그때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곤륜의 심판을 받을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잘된 것이 아닌가? 당신들의 수고를 덜어줬으니·”
“그들이 비록 용서받지 못할 악인이라지만 그렇게 단번에 처리할 일은 아니었다·”
중년무인은 어떤 변명도 용납지 않겠다는 완고한 분위기와 기세를 흘리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백남회로 곤륜파가 악인을 처단하기 위해 세상으로 내보낸 철혈의 무인이었다·
어려서부터 대곤륜에 선택되어 사십 년이 넘는 세월을 무공일로(武功一路)에만 매진했다· 그에게 악(惡)은 반드시 참(斬)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악을 처단함에도 과정이란 것이 필요했다·
정해진 절차와 죄의 정도에 따라 처벌의 정도가 달라져야 했다· 그렇지 않고 임의로 처리한다면 악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백남회의 완고한 분위기에 은한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서 어떡하자는 거지?”
“대곤륜으로 압송하겠다· 그곳에서 엄격한 절차를 거쳐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겠다·”
“압송하겠다고? 나를 곤륜으로?”
“그렇다· 곤륜은 정의롭다· 어느 한쪽에 치우침도 없이 사실에 의거해 판단할 것이니 믿고 따라와도 좋다·”
백남회의 눈에 살기가 감돌고 있다·
평생을 청정한 곤륜에서 살아왔기에 누구보다 마기에 민감한 그였다· 은한설과 대면한 그 순간부터 그의 육감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은한설이 마인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못하겠다면?”
“곤륜의 뜻을 거역하겠다는 것인가?”
“곤륜이라는 이름이 다른 이들에겐 경외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하등의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감히 곤륜을 무시하는 것인가?”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은한설의 동공이 서서히 은백색으로 물들어갔다·
밀야에서 태어나 평생을 자라왔다· 중원인은 밀야를 악으로 규정했지만 정작 은한설 자신은 밀야가 악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악이라면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선이 될 수 없었다·
타인의 정의를 증명하기 위해 악인의 탈을 뒤집어쓰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나의 정의는 살아남는 것· 생존을 위한 투쟁이 악으로 규정된다면 기꺼이 악의 길을 걷겠다·”
“드디어 마인의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마녀여·”
백남회의 눈에서 푸른색 신광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상청무상신공(上淸無上神功)·
중원의 일반적인 무공처럼 하단전을 이용해 축기를 하는 내가기공이 아니라 상단전을 열기 위해 만들어진 신공이다· 상청무상신공을 완성하면 심안이 열리면서 세상의 흐름을 볼 수 있게 되며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다고 알려져 있었다·
백남회는 아직 상청무상신공을 완성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곤륜의 그 어떤 무인보다 상청무상신공을 지고한 경지까지 익힌 것만큼은 분명했다·
은한설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나를 함부로 규정하지 마라 곤륜 그 오만한 이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