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 1장 호랑이 굴에 발을 딛다 (3)
노인이 불쑥 내민 손에는 술병이 들려 있었다· 잠시 노인이 내민 술병을 바라보던 진무원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술병을 건네받은 진무원이 거침없이 벌컥벌컥 마시자 노인의 눈에도 이채가 어렸다·
“이놈아 조금씩 마셔라· 긴 밤을 보내려면 아껴 마셔야 한단 말이다·”
노인의 말에 진무원이 술병에서 입을 떼고 다시 건네주었다· 그러자 노인이 술병을 흔들며 투덜거렸다·
“썩을 놈! 많이도 마셨다· 그렇게 술이 고프더냐?”
“주는 걸 거절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놈 참 말은 청산유수구나·”
진무원은 아예 노인의 앞에 털썩 주저앉아 동호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물위에 점점이 떠 있는 유등의 모습이 꼭 연꽃이 활짝 핀 것 같았다·
“흐흐! 정말 일품이지 않느냐? 좋은 술 한 병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한 명만 있으면 더할 나위 없지·”
“술을 함께 마실 사람이 필요하셨나 봅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더니 딱 그 짝이더구나·”
“그럼 제가 개똥이군요?”
“영광인 줄 알거라· 노부에게 개똥 취급이나마 받을 수 있는 게 어디 흔한 일인 줄 아느냐?”
“그렇습니까?”
노인이 다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하! 좋구나· 세상 별게 있느냐? 욕심 부릴 게 무에 있느냐? 맛있는 술 한 병과 이런 멋진 풍경이면 족한 것을· 그렇지 않느냐?”
진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 노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진무원을 바라봤다·
“네놈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구나?”
“어르신처럼 세상을 다 사신 분이야 미련이나 욕심을 버릴 수 있겠지만 저는 아직 살아갈 날이 더 많습니다· 겨우 술 한 병과 멋진 풍경만으로 만족하기엔 지금의 젊음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아깝지요·”
“허! 이놈 봐라?”
진무원의 대답이 뜻밖이었는지 노인이 잠시 멍하니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진무원은 담담한 표정으로 노인을 마주 보았다·
먼저 시선을 돌린 이는 노인이었다·
“쯧! 그놈 참 되바라졌구나· 하긴 젊은 놈인데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겠지· 하나 네놈 성질대로 살다가는 결국엔 좋은 꼴을 보진 못할 게다· 때로는 세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법도 알아야 한다·”
“그런가요?”
“그냥 네놈보다 세상을 오래 산 늙은이의 오지랖이라고 생각하거라· 하나뿐인 술친구가 당장은 네놈뿐이라서 하는 말이야·”
“고마운 충고 가슴에 새겨듣겠습니다·”
“흥! 그래도 앞뒤가 꽉 막힌 놈은 아니구나· 옜다! 술이나 더 처먹어라·”
노인이 다시 진무원에게 술병을 건네주었다· 진무원은 거절하지 않고 술병을 받아 들었다·
노인의 장담처럼 무척 맛있는 술이었다· 진무원이 이제껏 마셔본 싸구려 독주와는 차원이 다른 것 같았다·
“맛있군요·”
“천일향이라는 놈이다· 향긋한 주향이 일품인데 워낙 수량이 적어 일 년 중 오직 이맘때만 맛볼 수 있지·”
진무원이 다시 노인에게 술병을 건넸다· 술병을 받은 노인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네놈은 노부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느냐? 어찌 그리 질문은 하나도 안 하고 술만 넙죽 받아먹는 것이냐?”
“물어보시면 대답해 주실 겁니까?”
“글쎄다·”
“그래서 물어보지 않는 겁니다·”
“허! 그놈 혓바닥에 기름을 발랐는지 정말 청산유수로구나·”
노인이 혀를 찼다·
그런 노인의 눈에 기광이 일렁였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무원은 동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바다 위에 핀 수많은 연꽃 송이가 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에겐 아비가 그토록 원하던 풍경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비록 상대가 세상에 이름난 영웅호걸은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 함께 술잔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분 좋은 시간이라 할 수 있었다·
술은 금세 동이 났다·
노인이 아쉬운지 술병을 들여다보았다·
“쩝!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든 한 병 더 얻어오는 건데· 다시 그놈의 호랑말코를 졸라봐야겠구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많이 마신 모양입니다·”
“네가 잘못한 게 무에 있겠느냐? 보잘것없는 늙은이의 술친구가 되어준 게 전분데· 다른 놈들은 노부의 주정이 싫다고 이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고 있구나· 흐흐!”
그때였다· 계단 쪽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곳이 맞습니까?”
“황학루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 맞다· 다른 사람들도 금방 도착할 거야·”
젊은이들이 재잘거리는 목소리에 노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도 없으니 이곳에 미련도 없구나· 네놈은 남아서 구경이나 더 하려무나·”
노인이 갑자기 술병을 황학루 밖으로 던지더니 이어 자신의 몸 역시 내던졌다· 근 이십여 장을 날아가던 노인의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리는 곳에 정확히 술병이 날아들었다· 노인은 빈 술병을 박차고 훌훌 날아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야말로 가공할 경공술이었다·
진무원은 노인이 사라진 어둠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역시····”
당연히 무공을 익혔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흑월을 드나들 수 없으니까· 문제는 노인이 진무원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수라는 것이다·
“내공의 유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진무원조차도 전방위 감각을 익히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노인의 내공 수발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진무원이 아니었다·
“최소 절대의 경지에 이른 고수·”
진무원의 눈에 기광이 일렁였다·
오늘은 무한에 온 첫날이다·
첫날부터 우연히 절대고수를 만난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단지 무공만 강해서 고수라고 불리지 않는다· 주변의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만들 수 있어야 그때부터 고수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절대의 고수는 그에 더해 시간과 공간마저 자신에게 유리하게 통제한다· 그들에게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 단어나 마찬가지다·
설화를 잡은 진무원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때 좀 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와! 이거 무지 한산한데요·”
고개를 돌리자 젊은 무인 몇 명이 황학루 정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영준하게 생긴데다가 재기발랄해 보이는 이들이다· 질 좋은 비단 옷을 걸치고 허리에는 비싸 보이는 병장기를 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이는 선두에 서 있는 젊은 무인이었다· 훤칠한 키에 갈색 피부 선명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미남이었다·
젊은 무인은 오연한 미소를 진 채 황학루 내부를 둘러보다가 진무원에게서 시선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별다른 특색이 없는 진무원의 모습에 그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젊은 무인의 곁에 있는 조금 더 어려 보이는 소년이 종달새처럼 재잘거렸다·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한 것 같네요 사형·”
“그런 것 같구나·”
동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에 진무원이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대화로 미뤄보아 더 많은 이가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금방 걸음을 멈춰야 했다· 새로운 인물들이 계단을 타고 등장했기 때문이다·
진무원의 눈에 기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새로 나타난 이들 가운데 낯익은 얼굴이 몇 명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도 진무원을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했다·
그들은 바로 좌문호와 현공휘 그리고 흑백쌍웅이었다· 그들 뒤로 몇 명의 젊은 무인이 더 보였다·
“당신은?”
좌문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남수련 때문에 이미 한차례 충돌한 전력이 있는 그들이다· 당연히 진무원에 대한 감정이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불편한 심기는 고스란히 표정으로 드러났다·
그것은 흑백쌍웅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진무원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는 터라 절로 두려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 현공휘만은 예외였다·
그는 남수련과 거의 동시에 혼절했기에 진무원이 흑백쌍웅을 어떻게 다루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흑백쌍웅이나 좌문호 모두 그에 대해 얼버무렸기에 진무원이란 존재의 무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진무원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오랜만이군요·”
좌문호가 대답 대신 이빨을 으드득 갈았다·
현공휘가 혼절하고 흑백쌍웅이 진무원에게 상처를 입는 바람에 배를 탈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마차를 이용해 육로로 이동하느라 몇 배는 더 고생해야 했다·
진무원을 만나면서 모든 일정이 꼬였기에 그를 향한 분노는 클 수밖에 없었다· 자연 진무원을 향한 그의 시선에 강한 적개심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이곳에는 웬일이지?”
“이곳은 오래전부터 오고 싶던 곳입니다·”
“구경 다 했으면 얼른 내려가 줬으면 좋겠군· 보다시피 이곳에서 우리의 모임이 있으니·”
진무원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창룡회가 모이는 건가?’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먼저 온 젊은 무인들이 어느새 좌문호 일행에 합류했다· 그들 역시 창룡회의 일원인 것이다· 그들은 호기심이 담긴 시선으로 진무원과 좌문호의 대립을 보고 있었다·
‘저 남자가 누구기에 좌 소협이 저렇게 날 선 반응을 보이는 거지?’
제삼자가 보기에도 과할 정도로 좌문호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들이 아는 좌문호는 저렇듯 감정의 편린을 쉽게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좌문호의 부동심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는 진무원에 대해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좌문호의 축객령에 진무원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굳이 이곳에서 그와 충돌할 필요는 없기에 조용히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현공휘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남수련은 어디에 있느냐?”
“····”
“답하라· 그녀는 어디에 있느냐?”
“그걸 알아서 뭐 하려고요?”
“나는 아직 그녀와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현공휘는 아직 양패구상이란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 자신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하던 상대와의 결과였기에 더욱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현공휘의 눈에는 지금 보이는 게 없었다· 그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무서운 광망을 폭사하고 있었다· 같이 있던 젊은 무인들조차 움찔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현공휘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는 진무원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지금 무한에 머물고 있습니다·”
“무한 어딘가?”
“그것까지 알려드리는 것은 무리인 것 같군요·”
“감히!”
현공휘의 눈썹이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갔다· 그의 몸에서 가공할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던 젊은 무인들이 현공휘에 동조했다· 자세한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현공휘는 그들과 같은 창룡회의 일원이다· 현공휘가 관계된 일이라면 그들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장내에 기이한 열기가 일렁거렸다· 그에 좌문호는 위기감을 느꼈다·
‘위험해· 필요 이상으로 과열됐어·’
제아무리 진무원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그이지만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할 줄 알았다·
젊은 무인들은 단순히 현공휘의 살기에 고조된 것이 아니었다· 진무원이란 존재가 그들의 이성과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좌문호가 현공휘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자 현공휘가 이빨을 드러냈다·
“이 손 놓지 않으면 너도 적으로 간주하겠다·”
“자존심을 회복할 기회는 많이 있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저희의 회합입니다·”
이번 회합은 심원의나 서문혜령이 아닌 좌문호의 주도로 이뤄지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가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자연 그의 심정은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현공휘가 좌문호를 노려보았다· 살기로 가득 찬 그의 시선에 좌문호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뒤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에 현공휘의 시선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제야 좌문호가 다른 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살기를 거두십시오·”
“난 싫은데····”
제일 먼저 황학루에 올라온 젊은 무인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진무원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버린 그였다·
칠소천의 일원인 현공휘가 냉정을 잃고 흥분하게 만든 진무원이란 존재가 궁금했다·
그의 이름은 남궁일검·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 출신으로 익힌 무공이나 노수는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남궁일검이 이렇게 나오자 근처에 있던 젊은 무인들이 다시 웅성거리 시작했다· 그에 좌문호가 이를 악물고 진무원을 노려보았다·
‘위험해! 역시 이자는 위험해· 자칫 창룡회가 비상하기도 전에 이자 때문에 분열을 일으킬 수도 있어·’
폭발할 것 같은 열기 한가운데 진무원은 고요히 서 있었다· 그를 둘러싼 대기가 심상치 않게 요동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