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 6장 과거의 악몽은 다시 반복되게 마련이다(3)
명류산을 진정시키고 갑판 밖으로 나온 당기문의 표정이 절로 굳었다· 그의 시선이 맞닿은 곳에 중년의 도사가 있었다·
도포를 입고 있는 둥글둥글한 인상의 중년 도사는 바로 칠성 진인이었다· 당기문을 바라보는 칠성 진인의 눈빛 역시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당기문은 단박에 칠성 진인의 정체를 알아봤다·
“칠성?”
“흥! 당문에서도 나온 것인가?”
서로를 향해 내뱉는 말과 눈빛에 날이 잔뜩 서 있다· 특히 당기문을 바라보는 칠성 진인의 눈빛엔 독기마저 서려 있어 지켜보는 이의 가슴까지 섬뜩하게 만들었다·
칠성 진인이 당기문을 향해 다가왔다· 그런 그의 몸에서는 날카로운 기세가 칼날처럼 뻗쳐 나왔다·
“오랜만이군 기문·”
“십 년 만이지 싶군 칠성·”
“코빼기도 안 보이기에 죽었나 싶었더니 여전히 잘 살고 있군·”
“자네가 화산파의 제자들을 이끄는 건가? 부디 이전과 같은 사고가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군·”
“감히!”
칠성 진인의 얼굴에 노기가 서리면서 발산하는 기세가 더욱 강렬해졌다· 그에 당기문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지만 뒤로 물러나거나 사과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대립에 당황한 이는 화산파의 제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길게 고민할 것도 없이 칠성 진인의 등 뒤에 섰다· 자세한 사정이야 알 수 없었지만 칠성 진인은 사문의 존장이다· 당연히 그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
독술과 의술의 대가라 할 수 있는 당기문이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았기에 육체적인 능력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십여 명이 넘는 고수가 내뿜는 기세에 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당기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의 손을 통해서 한줄기 공력이 흘러들어 오면서 숨 쉬기가 편해졌다·
당기문이 뒤를 돌아봤다·
“무원·”
어느새 다가온 진무원이 그의 어깨를 통해 공력을 주입해 주었다· 그 덕에 당기문은 자신을 짓누르던 막대한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칠성 진인도 그 사실을 느꼈는지 눈에 이채를 떠올렸다· 자신이 흘려내는 기세는 일반 무인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진무원은 아무렇지 않게 당기문에게 내공을 주입해 기세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칠성 진인이 물었다·
“자네는 누군가?”
“이분의 일행입니다·”
“흠!”
진무원의 간단한 대답에 칠성 진인은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와 같은 대문파의 장로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는 소속 문파와 이름까지 말해야 한다· 그것이 강호의 관례였다·
“기문의 일행답게 예의가 무언지 모르는 것 같군·”
“허! 이 친구가 누군 줄 알고····”
“됐네· 자네와 함께 다니는 인물의 수준이야 뻔하지· 난 이만 선실로 들어갈 테니 앞으로도 아는 척하지 말게·”
칠성 진인은 냉랭한 표정으로 뒤돌아서 선실로 향했다· 당기문은 그런 칠성 진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쯧쯧! 저 못된 성질머리는 전혀 변한 것이 없군·”
그사이 화산파의 제자들이 칠성 진인을 따라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진무원이 물었다·
“원래 아시는 분입니까?”
“누구? 칠성? 알다마다· 한 십여 년 전쯤 한동안 함께 지낸 적이 있지· 그때도 성격이 보통 고약한 것이 아니었는데 여전히 변한 것이 없군·”
당기문의 구겨진 얼굴이 쉽게 펴질 줄을 몰랐다·
그때 멀리서 지켜보던 하진월이 당기문에게 다가왔다·
“화산파라면 전에 말하던 그····”
“맞네· 십여 년 전 당문과 화산파가 회합을 가진 적이 있었지· 그때 칠성 때문에 당문과 화산파 모두 큰 곤욕을 치렀다네·”
당시 강호에는 천변음마(千變淫魔)라는 음적이 활동하고 있었다· 별호 그대로 그는 역용술에 매우 능했는데 누구도 그의 진면목을 알지 못했다·
당시 천변음마에게 능욕을 당한 여인의 수가 무려 수백이 넘어갔는데 이 때문에 운중천에서도 수많은 무인을 풀어 그를 잡고자 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독공에 워낙 조예가 깊어 엄청난 피해만 남겼을 뿐 그를 잡지 못했다·
천변음마가 섬서성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한 화산파에서는 당문에 도움을 청했고 그 결과 당기문을 비롯한 당문의 정예들이 합류했다·
화산파와 당문의 무인들은 끈질기게 추적했고 그 결과 섬서성 끝자락에서 명문가의 여인을 겁탈하려던 천변음마를 포위할 수 있었다·
천변음마는 여인을 인질로 삼은 채 독공을 사용해 버텼다· 당기문은 신중하게 접근하자는 의견을 내놓은 데 반해 화산파에서는 더 큰 피해가 나기 전에 속전속결로 제압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당기문은 천변음마가 사용하는 독의 종류를 알 수 없으니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화산파의 고수 한 명이 그의 의견을 무시하고 제자들을 이끌고 급습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결국 천변음마를 처단했지만 화산파의 고수 이십여 명이 죽거나 다쳤고 여인과 그녀의 집안이 몰살을 당했다·
“화산파의 고수라는 사람이 바로 칠성 진인이군요?”
“맞다· 당시 그의 독단적인 결정 때문에 한 집안이 완전히 멸문을 당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조리 독에 중독되어 죽었지· 나와 당문의 고수들이 해독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당시 천변음마가 사용한 독은 백록산(百甪酸)이라는 극독이었다· 일단 한번 중독되면 순식간에 급사하기 때문에 미처 치료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화산파의 무인들은 좀 나았다· 그들은 내공을 이용해서 끈질기게 버텼고 그사이 당문의 무인들이 해독을 했으니까· 그래도 다섯 명이 백록산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당기문은 칠성 진인에게 이 사태의 책임을 물었고 화산파에서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칠성 진인에게 백 일 면벽을 명했다·
“허! 말이 되느냐? 일가가 몰살을 당했는데 겨우 백 일 면벽이라니· 그 많은 사람의 목숨이 겨우 백 일 동안 벽을 보고 수행하는 것으로 대체되다니·”
당기문은 분노했지만 화산파는 그 이상 어떤 대답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천변음마를 잡은 사실을 강호에 널리 알려 위명을 떨쳤다·
“그날 이후 당문과 화산파는 사이가 멀어졌고 마찬가지로 나와 칠성 사이에도 결코 메울 수 없는 깊은 골이 생겼지·”
“그때의 일에 원한을 가진 모양이군요·”
“그래도 십 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니 조금은 유해진 줄 알았는데 그는 전혀 변한 것이 없군·”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입니다·”
“정말 그런 것 같구나·”
당기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운중천까지는 며칠을 더 배를 타고 가야 한다· 그 시간 동안 칠성 진인과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안에 들어가 좀 쉬겠네·”
당기문이 명류산이 있는 선실로 향했다· 진무원과 하진월은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진월이 문득 입을 열었다·
“강호의 은원이란 늪과 같아서 일단 발을 담그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지·”
“그 늪 속에서 수많은 이가 살아가고 있군요·”
“그래 더럽게 혼탁한데 지독한 중독성이 있어· 자신의 한 몸 썩는 걸 뻔히 알면서도 빠져나갈 수 없게 되지· 그래서 강호인의 몸에서 하나같이 구린내가 진동해· 킁킁! 아유 이놈의 냄새 지독하구나·”
하진월이 말을 하면서 자신의 옷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그에 진무원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진무원 역시 강호를 살아가는 자다· 강호인으로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그의 몸에서도 악취가 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수많은 이의 주검을 밟고 일어서 그들이 흘린 피 위에 영욕의 성을 쌓는 자·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그것이 진무원의 현 모습이고 강호를 살아가는 자들의 자화상이다·
하진월이 진무원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니까·”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군요·”
“그러냐? 나도 말해놓고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멍멍!”
하진월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갑판 위에 울려 퍼졌다· 진무원도 함께 웃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지만 운마도강선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운마도강선의 선수에는 커다란 횃불이 걸려 앞길을 밝혔다· 거대한 운마도강선은 마치 강을 따라 흐르는 섬처럼 그렇게 앞으로 나갔다·
낮 동안 갑판 위에서 웃고 떠들던 사람들은 각자의 선실로 들어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진무원은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갑판 위에 홀로 앉아 달빛이 어지럽게 부서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 선실 문을 열고 갑판 위로 올라왔다· 도포를 입은 삼십 대 중후반의 남자는 화산파의 일대제자인 창운이었다·
창운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진무원을 발견하곤 다가왔다·
“혼자 고즈넉이 달빛을 즐기려 했더니 선객이 있었구려· 앉아도 되겠소?”
“앉으십시오· 어차피 주인 없는 곳이니까·”
“고맙소·”
창운이 진무원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손에는 조그만 항아리가 들려 있었다· 진무원이 바라보자 창운이 피식 웃었다·
“도사가 술 항아리를 들고 있으니 이상하오?”
진무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창운이 항아리의 뚜껑을 열며 말을 이었다· 그러자 엄청나게 강한 주향이 흘러나와 진무원의 후각을 자극했다·
“이상할 것 없소· 도사도 사람이니까·”
그는 항아리의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진무원에게도 권했다· 진무원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거절하지 않고 술 항아리를 받았다·
창운이 내민 술은 싸구려 독주였다· 식도가 화끈한 것이 입안에서 불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주향이 독특하면서도 좋았다·
진무원은 다시 창운에게 술 항아리를 건넸다· 창운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다시 술을 마셨고 그렇게 몇 순배가 돌았다·
두 사람 모두 내공의 고수라 취기를 억누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얼굴이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
문득 창운이 입을 열었다·
“혹시 천변음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셨소?”
“들었습니다·”
“역시 그렇구려·”
창운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술 한 모금을 마셨다· 잠시 수면에 비친 달빛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사숙께서는 잃은 게 많다오· 외부에선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화산파 내부에서는 따가운 시선을 받다 보니 주로 한직을 맴도셨다오· 자신의 조급함 때문에 다른 제자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셨는지 모습도 거의 내보이지 않으셨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너무 사숙을 미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것이오·”
“저는 그분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미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진무원의 대답에 창운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무 앞서간 모양이구려· 당 대협과 동행이기에 막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당 대협은 칠성 진인을 뵙기 전까지는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그분께서도 칠성 진인을 개인적으로는 미워하지 않을 겁니다·”
창운이 진무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포권을 취했다·
“화산파의 창운이오·”
“진무원입니다·”
“하하하! 이거 오랜만에 술잔을 나눌 만한 사람을 만나니 기분이 정말 좋구려·”
창운의 낭랑한 웃음소리에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창운은 보는 사람까지 유쾌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남자였다·
“내 요 며칠 고민하느라 머리가 아팠는데 오늘만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 소협과 함께 한잔하겠소· 마음껏 마시구려· 비록 싸구려에 주향도 잘 지워지지 않는 독주지만 얼마든지 있으니까·”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나눴다· 달빛 아래 그들의 목소리가 흩어졌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 ☆ ☆
다음 날 창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