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 6장 과거의 악몽은 다시 반복되게 마련이다(2)
남수련이 갑판에 서서 손목을 천천히 돌렸다· 약간의 통증이 있었지만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남수련은 마찬가지로 발목과 허리 등도 조금씩 움직여 상태를 점검했다·
아직 통증이 남아 있었지만 전반적인 상태는 양호했다· 이 정도라면 며칠 안 가 예전처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당기문이 혼신을 다해 치료해 준 결과이다· 거기에 그녀의 의지와 웅혼한 내공까지 더해져 보통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엄청난 속도로 회복한 것이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밖에 나와도 괜찮아? 숙부께서 며칠 더 안정을 취하라고 했잖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은 바로 당미려였다·
“괜찮아· 안에만 있으면 너무 답답해서 차라리 밖에 있는 게 더 낫네· 몸도 거의 나았고·”
“그럼 다행이고·”
두 여인은 편하게 말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 함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이 깊어졌고 의기가 투합됐다· 그렇게 두 여인은 친구가 되었다·
사실 남수련이 회복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도움을 준 이가 바로 당미려였다· 그녀는 남수련의 곁에 붙어서 극진하게 간호했고 속마음까지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당미려는 남수련의 곁에 서서 강가 풍경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문득 남수련이 입을 열었다·
“그 사람····”
당미려가 고개를 돌려 남수련을 바라보았다·
“많이 좋아하니?”
“····”
“역시 그렇구나·”
당미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남수련은 마치 그녀의 속내를 읽기라도 하듯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엔 다른 사람이 있어·”
“알고··· 있어·”
“너만 상처받게 될 거야·”
남수련이 본 진무원은 곧게 자란 나무 같았다· 일단 한번 마음을 주면 결코 쉽게 변하지 않고 외부의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만일 당미려를 먼저 만났다면 모르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다른 사람의 잔영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결코 쉽게 걷히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기에 남수련은 친구의 외사랑을 말리고 싶었다· 당미려는 굳이 그렇게 힘든 사랑을 하지 않아도 될 자격과 인성을 갖춘 친구였다·
당미려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은은한 미소에 남수련은 자신의 말이 아무 소용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뜻대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남수련은 친구의 앞길에 펼쳐진 가시밭길이 미리 보이는 듯해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에 당미려가 오히려 남수련을 위로하듯 말했다·
“난 괜찮아· 이러다 말겠지· 자연스럽게 정리되겠지·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당미려의 읊조림이 바람을 타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남수련은 말없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진무원·’
북검이라는 별호 외엔 모든 것이 철의 장막에 가려진 남자· 그가 몰고 온 격류에 수많은 이의 운명이 휩쓸리고 있었다·
‘과연 이 격류가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지····’
강호란 괴물은 결코 녹록하거나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 괴물은 자신에게 역행하는 자를 결코 그냥 두지 않는다·
남수련의 표정에 복잡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때였다·
쾅!
누군가 갑자기 선실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얼굴이 새까맣게 변한 채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이는 바로 명류산이었다·
“끄으으!”
명류산은 숨넘어가는 신음을 흘리며 갑판을 마구 뒹굴었다· 그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남수련과 당미려가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때 들려온 당기문의 음성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멈추거라·”
“숙부님?”
당기문이 갑판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뒤를 진무원과 하진월이 따르고 있다·
당기문이 바닥을 뒹구는 명류산을 보며 혀를 찼다·
“쯧! 독이 조금 과했던가? 어째 반응이 전보다 더 격렬하군·”
“형님 이러다 애먼 사람 잡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진월이 옆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명류산이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며칠 함께했다고 알게 모르게 정이 든 모양이다· 약간이나마 걱정이 되는 것을 보면·
당기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고통에 몸부림치는 명류산을 바라보았다·
명류산은 생각보다 그의 독에 절 적응했다· 반대로 그 부작용도 나타났다· 바로 독에 대한 내성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씩 양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내성을 극복하기 힘들었다· 그 때문에 당기문은 평소보다 과하게 독의 양을 늘렸다·
그 결과가 보는 대로 명류산의 발작으로 나타났다· 평소에도 엄살이 심한 명류산이지만 이번에는 정말 심각했다·
잠시 명류산을 내려다보던 진무원이 입을 열었다·
“그의 고통을 줄일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런 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스스로 극복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래도 이번 고비만 넘기면 비약적으로 내공이 늘 거야·”
“음!”
“그러니까 견디거라 이놈아· 다음부터는 조금 더 수월해질 거다·”
그의 말을 들었는지 바닥을 나뒹굴던 명류산이 갑자기 악을 썼다·
“이 미친 인간아! 뭐가 어쩌고 어째! 아이고! 나 죽겠네!”
그는 침을 튀기며 당기문에게 욕을 해댔다·
당기문의 사촌 팔촌까지 욕하던 그가 다시 바닥을 나뒹굴며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얼마나 발작했을까? 갑자기 그의 움직임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흠! 이제 다 된 것 같군·”
당기문이 명류산의 맥문을 잡고 눈을 감았다· 한참 동안이나 진맥을 하던 그가 눈을 뜨며 진무원을 보았다·
“너도 한번 살펴보겠느냐?”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명류산의 맥문을 잡았다· 그는 당기문처럼 진맥을 하는 대신 그림자 내공을 명류산의 몸에 주입했다·
“음!”
진무원의 눈이 빛났다· 그에 당기문이 미소를 지었다·
“느껴지느냐?”
“예·”
명류산의 몸에서 끈적끈적한 기운이 일어나 진무원의 내공에 반항했다· 명류산의 몸 안에 형성된 기운은 일반적인 내공과 달리 굉장히 끈적이면서도 음습한 성질을 품고 있었다·
진무원이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날려 버릴 만큼 미약한 기운이지만 명류산의 몸 안에 내력이라 부를 만한 기운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것도 다른 것이 아닌 독기(毒氣)를 바탕으로·
“확실히 이놈의 체질이 독특한 것 같구나· 이렇게 빨리 독력을 흡수해 내공으로 전환하다니·”
당기문이 활짝 웃었다· 그에겐 명류산이 느꼈을 고통 따윈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한 방식이 옳게 맞아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명류산은 그가 생각하는 방식에 가장 적합한 체질을 가지고 있었다·
당기문이 명류산을 어깨에 들쳐 메고 선실로 향했다·
“내가 반드시 네놈을 고수로 만들어주마·”
광기마저 느껴지는 그의 음성에 하진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놈의 명복을 빌어줘야겠구나· 하필 형님한테 걸려서 쯧쯧·”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여 하진월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누구도 당기문을 말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명류산은 누구보다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아직 진무원에게는 맞설 엄두조차 낼 수 없을 만큼 미약한 성취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처음 조우했을 때보다는 장족의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명류산은 여러모로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존재였다·
진무원이 미소를 지으며 강가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선착장이 보였다·
선착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과 말 수레와 마차들이 뒤섞여 선착장은 시장통을 방불케 할 정도로 혼잡했다·
그렇게 많은 이가 한 공간에 있으면 소란스러울 만도 한데 이상하게 고요했다· 사람은 물론이고 말과 소 같은 짐승들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중심에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도사 복장의 사람들· 선착장 한가운데 말없이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몸에서는 사위를 압도하는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착장에 있는 상인들은 그런 도사들을 경외감이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풍부한 경험으로 한눈에 도사들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화산파(華山派)·
강호 구대문파의 하나로 그 역사만 수백 년이 넘는 전통의 명문이다· 도가 계열의 문파로 이제까지 배출한 절정의 무인이 수천이 넘어간다·
명실상부한 섬서성의 패자로 그 영향력이 천하를 아우를 정도로 대단했다· 도가 계열의 문파로서는 가히 최고라 할 수 있었지만 같은 도가 계열의 무당파에는 밀리는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차이는 극히 미미했기에 화산파 도사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그런 자부심은 고스란히 기세로 나타나고 있었다· 마치 잘 벼려진 검처럼 날카로운 기세를 발산하는 그들의 모습에 사람들은 감히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들의 중심에 사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중년의 도사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한 인상과는 반대로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칠성 진인(七星眞人)·
화산파의 장로로서 특히 매화검(梅花劍)에 큰 성취를 이뤘다고 알려져 있다· 매화검은 화산파를 대표하는 검공 중 하나로 상승지경으로 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 화산파 내에서도 익히는 사람이 얼마 없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단 상승지경으로 가는 통로를 열면 그 후부터는 무위가 비약적으로 상승해 천하에 적수를 찾기 어렵다는 절학이다·
칠성 진인이 주위에 있는 젊은 도사들을 바라보았다·
적게는 이십 대 초반에서 많게는 삼십 대 후반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화산파의 미래라 할 수 있는 이대제자와 일대제자들이다·
화산파에서는 운중천에서 척마대를 뽑는 행사에 자파의 젊은 무인들을 대거 파견했다· 척마대에 뽑히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경험을 두루 쌓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화산파에서 파견한 제자들은 각 항렬에서 모두 최고의 재능을 갖고 있는 자들이었다· 일대제자 세 명은 차기 화산을 이끌어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재들이고 그 뒤를 잇는 일곱 명의 이대제자 역시 또래의 기재 중 발군의 재능을 갖고 있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칠성 진인은 그런 기재들을 보호하고 이끌 막중한 책임이 있기에 더욱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경계했다·
“사숙 저기 배가 들어옵니다·
칠성 진인의 곁에 있던 삼십 대 중반의 도사가 손가락으로 강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커다란 운마도강선이 다가오고 있다·
“흠! 선표는 확인했겠지?”
“예 모두 일등석으로 끊어뒀습니다·”
공손히 대답하는 도사의 이름은 창운(蒼雲)· 화산파 일대제자인 창 자 돌림 중에서도 단연 발군의 재능을 갖고 있다고 소문이 난 기재이다·
지닌바 무위는 일대제자 중에서도 단연 손가락 안에 꼽히지만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해 따로 중책을 맡지는 않았다· 하지만 화산파 내에서 그를 무시하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창운의 곁에 있는 두 명의 도사도 같은 일대제자들이다·
창혜와 창궁· 그들 역시 일대제자 중에서는 비교적 어린 축에 속했다· 무재는 창운에 비해 조금 떨어질지 모르지만 상황 판단력이나 임기응변 등은 오히려 더 낫다는 평가를 듣고 있었다·
“모두 짐을 챙기고 일행과 두 걸음 이상 떨어지지 말거라·”
“예!”
창혜와 창궁이 이대제자들을 통솔해 운마도강선에 탈 준비를 마쳤다·
이대제자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운마도강선을 바라보고 있다· 이십 대라고 하지만 그들은 무공에 입문한 이래 화산파를 벗어난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그 때문에 그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마침내 운마도강선이 선착장에 멈춰 섰고 사람들이 오르기 시작했다· 화산파의 무인들은 가장 늦게 운마도강선에 올랐다·
“우와!”
생전 처음 커다란 배를 타보는 어린 제자들이 드넓은 갑판의 모습에 감탄사를 터뜨렸다·
칠성 진인은 그런 제자들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자신 역시 그들 나이 때는 저렇게 호기심을 숨기지 못했다·
그때 잠시 갑판을 둘러보던 칠성 진인은 선실 문을 열고 나오던 중년인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당신은?”
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