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 3장 강호는 넓고 사람은 많다 (2)
명류산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입으로는 술을 마시고 있지만 그의 귀는 온통 남수련과 좌문호의 좌석을 향해 열려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좌문호가 기막을 펼친 사실을 모르는 명류산의 얼굴은 궁금증으로 가득했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들을 수가 없으니 속이 타는 것이다·
명류산뿐만이 아니었다· 이곳 객잔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모두 남수련과 좌문호의 대화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류산처럼 그들 역시 그 어떤 대화도 듣지 못했다·
그때였다·
쾅!
갑자기 좌문호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객잔 안의 사람들이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좌문호가 무서운 눈으로 남수련을 노려보았다· 남수련도 지지 않고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맴돌았다·
일촉즉발의 기운에 객잔 안의 무인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좌문호가 이를 뿌득 갈았다·
“정녕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것이오? 그래서는 남 소저에게 아무런 득도 안 될 텐데!”
“제 생각은 확고해요·”
“오늘의 결정 부디 후회하지 않길 바라겠소·”
좌문호가 뒤돌아섰다·
그의 얼굴엔 분노의 빛이 가득했다·
이제껏 많은 기재를 만나고 창룡회에 가입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렇게 매몰차게 거절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누구보다 창룡회에 대한 자부심이 큰 만큼 가슴에 남은 상처 또한 컸다·
그가 객잔 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무인들이 ‘힉’ 하는 기괴한 신음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 강렬한 살기가 넘실거리는 눈빛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수련은 객잔 문을 박차고 나가는 좌문호의 뒷모습을 어두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창룡회 세상이 어지러워지니 젊은 무인들마저 파벌을 만드는구나·’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좌문호의 제안을 거절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을 보아하니 앞으로 제법 피곤해질 것 같았다· 저런 눈빛을 가진 자들은 자존감이 쓸데없이 높고 강해서 조그만 원한도 잊지 않는다·
‘하는 수 없지· 최대한 주의하는 수밖에·’
남수련이 젓가락을 놓았다·
입맛이 다 떨어졌다· 개인적으로 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한잔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점소이를 불러 다시 주문했다·
“여기 술 한 병 가져오너라·”
점소이가 대답과 함께 즉시 술병을 가져왔다· 그녀는 홀로 자작하기 시작했다· 몇몇 무인이 그 모습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아름다운 여자가 홀로 술을 마시는 광경은 무척이나 유혹적이었다· 만일 비응검객 좌문호와 대치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분명 몇몇은 그녀에게 다가가 추근거렸을 것이다· 명류산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뭘까? 일행이 또 있을까? 그녀 역시 운중천으로 가는 건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막상 그녀에게 다가갈 용기는 없었다· 명류산은 죄 없는 싸구려 독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때였다· 또다시 객잔 입구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좌문호가 다시 돌아온 것인가 싶어 바라봤다· 하지만 들어온 이들은 좌문호가 아니었다·
‘저들은?’
명류산의 눈이 빛났다· 어디선가 한번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적갈색의 피풍의를 입은 채 선두에 선 남자는 바로 진무원이었다· 그의 뒤를 하진월과 당기문 당미려가 따르고 있었다·
진무원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떠올랐다· 객잔 안에 남아 있는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는 객잔마다 만석이라서 쫓겨나다시피 했다· 그나마 이곳이 가장 허름한 객잔이라서 왔는데 이곳에도 빈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진무원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혼자 탁자를 차지하고 있는 남수련을 향했다·
“소저 혹시 괜찮으시다면 잠시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보다시피 남는 자리가 없어서 말입니다·”
남수련이 잠시 진무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미 좌문호 때문에 기분이 상한 경험이 있기에 그녀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진무원의 깊고 유현한 눈동자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고맙습니다· 이리 와서 앉으십시오· 고맙게도 소저께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진무원의 일행이 탁자에 앉으며 정중히 인사를 했다·
“고맙네 소저·”
“감사해요·”
남수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이제 식사가 거의 끝나가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의 말에 진무원 등이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점소이가 즉각 달려왔다· 당기문이 모두를 대신해 물었다·
“혹시 남는 방 있느냐?”
“그게··· 이젠 별채밖에 없습니다요· 그런데 너무 비싸서····”
점소이가 말끝을 흐렸지만 당기문은 개의치 않았다·
“그럼 별채가 있긴 있단 말이구나? 얼마더냐?”
“은자 다섯 냥은 주셔야····”
말을 해놓고도 점소이가 얼굴을 붉혔다· 주인의 뜻에 따라 그렇게 받고 있지만 스스로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별채라고 해봐야 주인댁 내외가 쓰던 초라한 거처에 불과했다· 장점이라고는 그나마 높다란 담장 덕분에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롭다는 것뿐이다· 그런 초라한 거처를 은자 다섯 냥이나 받는다는 것 자체가 점소이에게도 불편한 일이었다·
“허! 주인이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려고 작정했구나·”
“죄 죄송합니다요·”
“네가 죄송할 게 무에 있겠느냐? 내 셈을 치를 테니 별채를 다오·”
당기문은 내친김에 품에서 은자가 담긴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 안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기문은 은자 다섯 개를 꺼내 점소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식사는 나중에 따로 셈을 치를 테니 이 집에서 제일 잘하는 걸로 몇 가지 내오거라·”
“예 알겠습니다요!”
점소이는 재신(財神)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후다닥 주방으로 달려갔다·
진무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허름한 곳이나마 거처를 구해서·”
“그러게 말이네· 그놈의 척마대가 뭐라고 가는 객잔마다 자리가 없는지·”
당기문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미려도 당기문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하진월이 코웃음을 쳤다·
“흥! 운중천에 가면 다들 뽑힐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운중천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멍청한 거지· 하루살이들이 생각하는 머리마저 없으니 어떻게 내일을 기약할까?”
그의 독설에 진무원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하진월이 그나마 공손하게 대하는 사람은 당기문 정도에 불과했다· 그 외 사람들에게는 독설을 가리는 법이 없었다· 그 때문에 당문을 떠나 이곳으로 오는 동안 문제를 일으킨 것만 해도 수차례이다· 그때마다 진무원은 진땀을 흘리며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하진월의 독설에 남수련이 자신도 모르게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하진월의 눈이 반짝였다·
“호! 소저께서는 이 몸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 같군·”
“그게 아니라····”
“어디 보자· 허리에 찬 요대에 새겨진 사방신(四方神)을 보아하니 무산파의 제자인 것 같군· 검에 붙은 수실이 금색인 것을 보니 장문인의 진전을 이어받은 직전제자군· 그렇다면 소저가 칠소천으로 위명이 자자한 무산신녀겠군·”
“그걸 어떻게?”
남수련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일렁였다·
무산파가 요대에 사방신을 새겨 신분을 증명한다는 것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장문제자에게 금색의 수실이 주어진다는 사실 또한 아는 사람이 무산파 내에서도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무산파 내부의 인물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을 하진월은 너무나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하진월이 히죽 웃었다·
“그게 뭐 놀랄 일이라고 그러는가? 입 닫으시게· 파리가 들어가겠네·”
“대협은 누구십니까?”
그녀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상대가 너무나 쉽게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말해줘도 모를 걸세· 아 형님은 알겠군· 들어본 적 있겠지? 당기문 대협· 당문의 만독각주일세·”
“그런?”
남수련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강호를 살아가는 자치고 당문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는 자 없었고 그중에서도 당기문은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다· 만독제 당관호를 제외하면 천하에서 가장 독물에 능통한 자였으니까·
“말학 후배 남수련이 당문의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허허! 사람하고는· 어서 자리에 앉으시게·”
당기문이 허락도 없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낸 하진월을 타박했다· 하지만 하진월은 태연했다· 자신이 남수련의 신분을 말할 때 진무원이 이미 기막을 펼쳐 음파를 차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음흉한 늑대 같은 인간들은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진월의 득의양양한 웃음에 진무원이 쓴 미소를 지었다· 어떨 때는 아이 같아서 어디로 튈지 도무지 예측을 할 수 없는 하진월의 모습에 그도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당기문이 옆자리에 앉아 있는 당미려를 가리켰다·
“이 아이는 내 질녀인 당미려라고 하네·”
“아! 사천일화(四川一花) 당 소저시군요· 반가워요·”
“제가 더 반갑네요· 천하에 위명이 자자한 무산신녀를 이리 뵙다니·”
같은 여자끼리라서 그런지 그녀들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남수련의 시선이 이번엔 진무원을 향했다· 그에 진무원이 포권을 취했다·
“진무원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진 소협· 그런데····”
남수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선가 그 이름을 들어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진월이 말을 돌렸다·
“남 소저도 운중천에 가는 모양이시군·”
“네·”
“경험을 쌓으러 나오신 건가?”
“맞아요·”
하진월의 정확한 추측에 남수련은 더 이상 놀랄 기력도 없는지 순순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속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이 남자가 누구기에?’
단 한 번 본 것만으로 그녀의 정체와 행보를 짐작해 내는 남자가 범상할 리 없었다· 문제는 그녀가 하진월의 정체를 도무지 짐작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강호에 이런 남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진월이 남수련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씨익 웃었다·
그때 점소이가 음식을 내왔다· 기존에 남수련이 시킨 것까지 더해지자 탁자는 음식으로 가득 찼다·
하진월이 말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같이 식사나 하세·”
“저는····”
“사양하지 말게· 혼자보단 여럿이 더 분위기가 있지 않은가?”
“그래요· 저희와 함께 식사해요 남 소저·”
당미려까지 합세하자 남수련은 더 이상 거절할 핑곗거리를 찾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솔직히 이들 일행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게 다섯 사람은 함께 식사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진무원은 펼친 기막을 거둬들였다·
술이 한차례 돌고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