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 1장 누구나 정상을 꿈꾸게 마련이다 (2)
“이곳에서 싸움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수하의 말에 담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얼마 전 진무원 일행에게 붙인 비선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담주인으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다·
그때부터 담주인은 직접 수하들을 이끌고 추적에 나섰다· 추적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가 이끄는 비선들은 반드시 흔적을 남겼으니까·
흔적을 따라 도착한 곳이 바로 덕굉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강가였다· 강가에는 이제 희미해진 발자국 몇 개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의 수하들은 그 속에서 싸움의 흔적을 찾아냈다·
“음!”
담주인이 무릎을 굽히고 바닥을 살폈다·
남은 것은 단순한 발자국 몇 개에 불과했지만 그 속에는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특히 담주인처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일수록 알아낼 수 있는 정보의 양은 더욱 많았다·
다른 자국이 모두 희미해졌는데도 이것만 아직 또렷이 남아 있다는 것은 발자국의 주인이 무척이나 강한 내공의 소유자이거나 혹은 육중한 체구를 가졌다는 것을 뜻한다·
‘패권회의 무인들이 대부분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지· 반대로 점창파의 무인들은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지고 있고·’
무공의 특성에 따라 체형도 갈리게 마련이다· 담주인이 아는 한 운남성에서 이런 체형을 가진 이가 가장 많이 있는 곳이 바로 패권회였다·
‘조천우가 이곳까지 따라온 것인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가 아는 조천우는 결코 원한을 잊는 사람이 아니었다· 옥계 참사에서 입었을 자존심의 상처를 이곳에서 만회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으음!”
담주인이 침음성을 흘리며 허리를 폈다·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패권회에서 조천우가 신비롭게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그와 함께 패권회의 주력 무인들도 사라졌다· 그 때문에 패권회의 동향을 감시하던 허동천이 상부의 질책을 받기까지 했다·
“곤명에서 사라진 자의 흔적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도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이 사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만큼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가 부하들에게 외쳤다·
“이 근처에서 싸움이 있었다면 분명 어딘가 시신도 있을 것이다! 시신을 찾아내라!”
“옛!”
적무당 무인들이 대답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져 수색을 시작했다· 수색이 계속될수록 싸움의 흔적이 더욱 여실히 드러났다·
치열한 공방전의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되었고 바닥에 뿌려진 핏자국이 드러났다· 하지만 어디서에도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거의 반나절을 소비하고도 시신을 발견하지 못하자 담주인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철저하게 증거를 인멸했군·”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백룡상단과 진무원 등이 이곳으로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조천우의 흔적이 이곳으로 이어졌고 치열한 전투를 치른 흔적이 발견됐다·
“철기당과 백룡상단의 전력으로 조천우가 이끄는 패권회에 대응한다? 턱없는 소리· 그렇다면 역시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북검이 개입한 것인가?”
칠 년 전 가장 큰 주목을 받은 무인이 담수천이다· 백인비무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의 별호는 창천고성(蒼天孤星)·
강호에 갓 출도한 무인이 받기엔 너무나 과한 호칭이지만 누구도 그에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그만큼 그가 강호에 던진 충격은 대단했다·
담수천은 백인비무행을 성공적으로 끝낸 후 무슨 이유에선지 폐관하고 두문불출했다· 강호인들은 그가 하루라도 빨리 폐관 수련을 끝내고 나오길 기대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가 다시 출도하는 날 강호의 역사가 바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북검 진무원은 담수천 이래로 최고로 주목받는 젊은 무인이다· 그의 가공할 무위는 이미 옥계 참사에서 증명되었다· 하지만 그가 조천우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무인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담주인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아직 승부의 향방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이 그의 등골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마치 손톱 밑에 가시가 박힌 기분이다· 지금 당장이야 따끔한 통증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대로 방치해 두었다가는 손가락 아니 팔 하나를 송두리째 잘라낼 정도로 썩어들어 갈지 모른다·
그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워졌다·
“북검 진무원· 이제까지 그에 대한 정보는 모두 잊어버리고 전면 재조사에 들어가야 한다·”
☆ ☆ ☆
“허어!”
당기문은 진무원과 하진월이 바싹 붙어 있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사천성의 서부고원에 들어선 지 벌써 닷새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진무원은 하진월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진월은 진무원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조금씩 전수하기 시작했는데 그 진폭이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났다·
-강호는 언제나 힘이 있는 자가 지배해 왔다· 말하자면 먹이사슬의 정점에 강자가 서는 것이지· 하지만 순수 무력만으로 그 자리에 선 자가 얼마나 있을까? 그들은 그 자리에 서기 위해 무척이나 오랜 시간 공을 들여왔다·
-결국 무림이란 강자가 구축한 그들만을 위한 지배 체계다· 현재는 그 정점에 운중천이 서 있지· 너는 그들이 어떻게 지금의 체계를 갖추었는지 알아두어야 한다·
-무림이라는 세계가 얼마나 더 존속할 수 있을까? 정말 힘이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면 현재 강호를 살아가는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남은 것일까?”
-순력(順力)이 존재한다면 당연히 그에 반하는 역력(逆力) 또한 존재한다· 무공이란 천외천의 힘을 가진 무인들에게 일반 백성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당장은 어렵겠지만 시일이 흐르면 결국 그들 역시 가장 효율적인 대응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세상은 또 한 번 변하겠지· 결국 지금의 무림 또한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가기 위한 과도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 외 기타 등등·
하진월은 끝없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풀어냈고 진무원은 물먹은 솜처럼 그의 지식을 받아들였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당기문 당미려 청인 등은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충격을 받았다·
하진월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세 사람에게도 무척이나 큰 충격이었다· 세상을 그렇게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에 놀랐고 또한 논리가 정연해 반박할 수 없다는 것에 더 놀랐다·
‘어떻게 저런 자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수 있었지?’
하진월을 바라보는 청인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침중했다·
흑월의 생명은 정보의 선점이다· 선점하고 수집한 정보를 무림 단체의 입맛에 맞게 가공해서 판매해 그 명맥을 이어간다· 때문에 강호의 변수가 될 만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의 수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무원이나 하진월 모두 그런 흑월의 정보망에 걸려들지 않은 인재들이다· 아니 단지 인재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평가하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인물들이다·
진무원의 무력도 파격적이지만 하진월의 철학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부분에 있어서는 하진월이란 존재가 더욱 컸다·
거기에 당가에서 두문불출하던 당기문이 따르고 당가의 재녀라는 당미려 그리고 자신도 은연중 진무원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진무원이란 존재가 하진월을 끌어들인 것인가 아니면 천재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모이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시대가 변하고 있는 것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흑월의 비월로 활동하면서 이렇게 심경이 복잡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임무는 항상 명쾌했고 단 한 번도 그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감시하고 그 내용을 흑월에 보고한다·
그렇게 단순하던 삶이 진무원을 만나면서 일대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하아!”
그가 무의식중에 한숨을 토해냈다·
당기문이 그런 청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지금 이 순간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 심정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들의 등장으로 인해 이 시대를 지배하는 강호의 틀이 큰 변화를 일으킬지도 모르겠구나·’
비록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그는 당가라는 명문의 구성원으로 오랫동안 강호에 몸담아왔다· 수많은 사람을 지켜봤고 많은 문파의 흥망성쇠를 지켜봤다·
거기엔 일정한 흐름이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이 그에 순응하며 살아갔다· 하지만 그가 지켜본 진무원이나 하진월은 단순히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며 살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그들은 갑자기 툭 불거져 나온 이질적인 존재를 순순히 용납하지 않는다· 진무원과 하진월이란 천재가 과연 세상의 못질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아니면 그대로 도태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의 주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몰랐다· 그때가 되면 당가는 당기문을 모르는 사람 취급할 것이 분명했다·
현재 강호의 명문이라 불리는 문파 대부분이 그렇게 자신을 보호하고 성장해 왔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당기문은 하진월처럼 진무원에게 사심 없이 다가갈 수 없었다·
‘나이가 들면 가리는 게 많아진다더니 내가 결국 그 모양이구나·’
당기문이 한숨을 내쉬었다·
절로 마음이 복잡해지는 여정이다· 생각이 많아지고 자꾸만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진무원은 하진월의 사상과 지식을 무섭게 흡수하고 있다·
세상에 홀로 고립된 채 무공을 익혀온 진무원이다· 황철이 보내준 책을 통해 지식을 쌓아왔지만 그것만으로는 항상 부족함을 느꼈다· 굳은 의지와 무력은 있었지만 그를 뒷받침할 만한 사고 체계가 명확히 갖춰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던 차에 하진월을 만났다· 하진월의 지식은 방대해서 진무원의 그 어떤 물음에도 막히지 않았고 오히려 이제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신선한 관점에서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진월과의 대화를 통해 진무원은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또 성장하고 있었다·
과연 그의 성장의 끝이 어디인지 당기문은 두렵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