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 1장 누구나 정상을 꿈꾸게 마련이다 (1)
옛것과 새것이 교차하는 순간이 온다·
시대의 격류는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투쟁하지 않는 자
옛것과 함께 사라질지니···
쟁패의 시대
무인의 시대가 열린다·
황철 등과 이별한 후 진무원은 방향을 동쪽으로 돌려 잡았다· 운중천이 있는 호북성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사천성을 가로질러야 했다· 일행과 헤어진 덕굉에서 사천성으로 넘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덕굉과 접경한 사천성 서부는 무척이나 높은 고원지대로 이뤄져 있다· 험준한 고봉과 첩첩산중의 연속이고 제대로 된 관도는커녕 소로조차 없어 사람들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된 길잡이가 없다면 몇 날 며칠을 산속에서 헤매다가 탈진해 죽기 좋은 곳 혹 운이 좋아 며칠을 무사히 살아남았더라도 종국에는 짐승의 밥이 되어 최후를 맞이하기 좋은 곳이 바로 사천의 서부 고원지대였다·
그나마 진무원 일행은 사정이 좀 나았다· 당기문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기문은 평소에도 독물을 구하기 위해 사천성 곳곳을 이 잡듯 뒤지고 다녔고 이 근처에도 몇 번 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당기문조차 비슷비슷한 지형과 분위기 때문에 길을 몇 번이나 잃고 제자리로 돌아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래도 일행 중 누구 한 사람 화내는 사람이 없었다·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산길을 걷는데도 일행의 모습엔 여유가 있었다· 진무원과 청인 당미려는 무공을 익힌 고수였고 하진월과 당기문은 무공을 모르긴 했으나 그래도 일반인보다는 월등한 체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당기문은 하진월이 끌고 온 커다란 소를 타고 있었다· 말도 오르지 못하는 험준한 산길을 누런 소는 씩씩거리면서도 잘도 올랐다· 일반 소보다 두 배는 큰 몸집과 그에 어울리는 엄청난 양의 근육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당기문이 누런 소의 등을 만지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허! 일개 소가 대단하군· 이 커다란 몸집으로 어찌 이렇게 산을 잘 탈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
“하하! 형님 사람 중에서도 간혹 별종이 나오듯 소에서도 그런 종자가 나온답니다· 이 녀석 역시 그런 놈 중 하나지요· 저는 이놈을 황아(黃兒)라고 부릅니다·”
하진월이 누런 소의 등을 토닥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자신의 이름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황아가 귀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나직한 울음을 토해냈다·
“황아라···· 어울리는군·”
“그렇지요? 요놈이 아주 보물단지입니다·”
며칠 같이 붙어 다니더니 당기문과 하진월은 서로가 마음에 들었는지 의형제를 맺었다· 당기문이 형이 되고 하진월이 동생이 되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당미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는 당기문이 저렇게 다른 사람과 죽이 잘 맞는 모습을 처음 봤다· 당기문이 원래부터 저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는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천재끼리는 통한다더니 그래서 그런 건가?’
당미려가 아는 당기문은 천재였다· 하진월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두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면이 많았다·
당미려의 시선이 문득 앞서 걸어가고 있는 진무원을 향했다· 사천의 고원지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진무원은 부쩍 말수가 줄었다·
분명히 같이 걷고 있지만 의식은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자신의 내면세계 깊숙한 곳으로 침잠해 들어간 것 같았다·
“진··· 무원·”
당미려는 무의식중에 그의 이름을 부르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돌아봤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이는 없는 것 같았다·
당미려의 얼굴이 붉어졌다·
언제부턴가 진무원의 사소한 몸짓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선을 주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고개가 그가 있는 쪽을 향해 돌아갔다· 하지만 진무원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휴우!”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한숨을 내쉴 때 갑자기 앞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기문과 하진월이 잡담을 멈췄고 진무원이 심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전방을 바라보았다·
“후아! 아주 죽겠다!”
너스레를 떨며 누군가 수풀을 헤치고 그들 앞에 나타났다· 낯선 얼굴의 중년인이다· 그러나 일행 중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그가 청인이란 것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인의 옷에는 풀잎이 잔뜩 묻어 있었다·
당기문이 물었다·
“길은 찾았는가?”
“예 말씀하신 대로 조그만 소로가 있더군요· 워낙 수풀이 우거져서 지나칠 뻔했는데 어쨌거나 찾았습니다·”
“잘했네· 원래 짐승들이 다니던 길인데 아직 남아 있다니 다행이군· 앞으로도 그런 길을 계속 찾아야 할 걸세· 힘들겠지만 몇 번 갈아타다 보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게야·”
청인의 대답에 당기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고원지대이다· 애당초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나마 짐승들이 자주 다니는 길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따지고 보면 산에 난 길 대부분이 먼저 짐승들이 낸 것이다· 그 후로 사람이 다니면서 제대로 된 길이 생기는 것이다·
청인이 투덜거리면서 진무원의 옆으로 다가왔다·
“젠장! 이젠 하다하다 길 찾는 것까지 시키냐? 너무하는 거 아냐?”
“그래도 우리 중에서는 가장 길 찾는 데 능하니까요·”
“나에게 길 찾기를 시키는 인간은 너밖에 없을 것이다· 떠그럴!”
그러면서도 청인은 싫지 않은 표정이다·
언제부턴가 그는 조금씩 진무원과 일행에게 동화되어 가고 있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싫어 여전히 매일같이 얼굴을 바꾸고 있지만 그래도 목소리만큼은 바꾸지 않는 것이 그 증거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지랄! 고생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전혀 싫은 표정이 아니다·
진무원은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청인의 말처럼 조금 더 걷자 짐승이 다니는 조그만 길이 나타났다· 소로는 미리 알고 찾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갈 만큼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다·
진무원과 일행은 소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지기 시작했고 산에는 금세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결국 진무원과 일행은 적당한 곳을 찾아 노숙을 해야 했다· 청인은 노숙을 할 만한 곳을 금방 찾아냈다·
집채만 한 바위 두 개가 맞닿아 있는 곳이다· 바위가 바람을 막아주고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조그만 샘이 있었다·
청인이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우고 당미려가 물을 길어왔다· 그사이 진무원은 토끼 두 마리를 사냥해 왔다· 일련의 작업은 순식간에 진행됐고 그들이 노숙하는 곳에서는 고기 익는 냄새가 진동했다·
“이런 좋은 자리에 술이 빠져서는 안 되지· 흐흐!”
하진월이 황아라고 부르는 누런 소 곁으로 다가갔다· 황아의 옆구리에는 가죽 주머니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하진월은 그중 하나를 뒤져 커다란 술병을 꺼내 들었다·
그에 당기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아우가 뭘 좀 아는구만·”
“암요· 제가 뭘 좀 알죠· 흐흐!”
그 모습을 보면서도 진무원과 청인은 그러려니 하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지난 며칠 동안 반복되어 온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토끼 고기와 함께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진무원과 청인도 곁에 앉아 가끔 술 한잔을 얻어 마셨다· 그렇게 한 시진이 지나자 모두가 곯아떨어졌다·
모두가 잠이 들었지만 진무원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진무원의 망막 가득 별의 바다가 들어왔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진무원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별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노숙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였다·
바위 정상에 오르자 별들의 바다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진무원은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얼 그렇게 보는 것이냐? 별 따위가 뭐 대수라고·”
언제 다가왔는지 하진월이 서 있었다· 진무원은 놀라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그냥 신기해서요·”
“신기할 것도 많다·”
하진월이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진무원도 그를 따라 옆자리에 앉았다·
하진월이 술병을 내밀었다· 진무원은 사양하지 않고 한 모금을 마신 후 다시 하진월에게 건넸다· 하진월은 숨도 쉬지 않고 술을 발칵발칵 들이켰다·
“크으!”
술병을 입에서 뗀 하진월이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그래도 아름답기는 지랄같이 아름답구나· 마치 환상 같아·”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별을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리 손을 뻗어도 별을 잡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허공을 휘젓는 하진월의 손짓은 공허하기만 했다· 진무원은 그런 하진월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각자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다른 법·’
하진월이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자신과 함께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직 그 정도까지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유대감이 강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와 함께 같은 길을 걷는데 아무런 이질감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경험이었다·
문득 하진월이 물었다·
“네놈은 가슴의 울림대로 살아가겠다고 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느냐?”
진무원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흐흐! 그럴 줄 알았다· 네놈 말은 대부분의 사람이 평범하게 살아가겠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허황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
“평범하게 사는 것이 허황된 겁니까?”
“대체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이더냐? 딱 남이 사는 만큼 산다는 것인데 결국 기준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 두고 산다는 것이 아니더냐? 잘사는 놈과 못사는 놈 강한 놈과 약한 놈 모든 것을 두 부류로 나눠놓고 딱 그 중간으로 살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가당키나 할까?”
“····”
“가슴의 울림대로 살겠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체 네놈의 가슴이 말하는 울림이 무엇이더냐? 결국 네 꼴리는 대로 살겠다는 것 아니냐? 수많은 사람이 지켜야 할 규범이 있고 질서가 있다· 그런 질서와 규율을 무시하고 네 꼴리는 대로 살겠다? 그러니 어찌 허황되지 않을까?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했다· 네 꼴리는 대로 행동했다가는 강호인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에게도 배척을 받을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남들이 자신보다 잘나서 마음대로 하는 꼬라지를 그냥 두고 보지 못한다· 분명 무시무시한 질시의 눈길이 쏟아지고 엄청난 야유가 쏟아질 것이다· 어쩌면 후대에 네놈은 무시무시한 악인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네 꼴리는 대로 살아갈 자신이 있느냐?”
“안 될 것은 뭐가 있습니까?”
“뭐라?”
“제 아버지가 왜 돌아가셨는지 아십니까?”
“그야 운중천과 전 중원의 압박 때문이 아니더냐?”
“틀렸습니다· 제 아버지는 그런 이들의 협박에 눈 하나 깜빡할 분이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싸우다 죽으면 죽었지 자결을 택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바로 저 때문에··· 오직 저 하나를 살리기 위해· 저는 제 아버지의 희망이고 그분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진무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진월이 그런 진무원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분께서는 그러셨습니다· 인생은 자신의 삶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투쟁하는 긴 여정이라고· 그에 대한 평가는 후대의 몫으로 남겨두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고·”
“으음!”
“그래서 그렇게 살려 합니다· 그게 잘못된 일입니까?”
진무원의 질문에 하진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진무원을 노려보던 하진월의 얼굴 전체로 한줄기 미소가 먹물처럼 번져 가더니 갑자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그놈 말은 참 시원하게 하는구나! 으하하하!”
하진월의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기백은 좋다· 하나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네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그게 뭡니까?”
“세상을 읽는 눈· 이면을 읽는 통찰력이다·”
“알아듣게 설명해 주십시오·”
“네놈이 알아듣기 쉽게 북천문을 예로 드마· 과연 북천문의 몰락이 하루 만에 일어난 것이더냐? 아무런 조짐도 없이 모든 무림인이 몰려와서 문을 닫게 했을까? 하나의 큰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선 반드시 전조(前兆)가 있다·”
“전조?”
“내 오래전부터 강호란 곳을 살펴보니 평균적으로 한 사람이 죽으면 그보다 열 배는 많은 자가 다치더구나· 그리고 다친 사람보다 수십 배는 많은 사고나 분쟁이 일어나더구나· 북천문이 멸문을 당할 때도 그랬다· 강호 곳곳에서 예전과 다른 수십 가지의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보다 열 배는 많은 조짐이 나타났다· 이전의 강호와는 전혀 다른 흐름이 나타난 것이다· 네 아비는 그런 전조들을 간과했고 결국 그 흐름을 이해하지 못해 북천문이 멸문을 당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다·”
“그것이 북천문이 멸문한 이유란 말입니까?”
“직접적인 이유는 운중천이라는 거대 세력의 탐욕이겠지·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전조들만 미리 읽었어도 최악의 경우는 피할 수 있었단 뜻이다· 그래서 그러한 흐름을 읽는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진월의 말은 비수가 되어 진무원의 가슴을 후벼 팠다·
‘막을 수 있었던 일· 회피할 수도 있었던 시간· 이면을 바라보는 힘·’
마치 고승의 화두처럼 하진월이 던진 단어가 진무원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진무원이 하진월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가르쳐 주십시오·”
하진월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