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 8장 지옥을 거닐어보지 않은 자, 지옥을 논하지 말라 (4)
진무원과 백룡상단 철기당의 무인들은 덕굉현에 도착했다·
덕굉현(德宏縣)은 운남성과 사천성 서장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조그만 현이다· 중원의 문물과 서장의 문물이 혼합되었기에 이국적인 느낌이 한껏 풍기는 곳이 바로 덕굉현이었다·
일행이 덕굉현에 온 것은 하진월의 의견 때문이었다·
“중원에서는 운중천의 눈을 피할 수 없어· 차라리 멀리 돌아가더라도 서장을 통해서 감숙성으로 가는 것이 나을 게야·”
용무성과 철기당은 하진월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백룡상단의 보표들도 거의 죽고 남은 이는 몇 명 안 됐다· 철기당의 무인까지 모두 합하더라도 스무 명이 채 안 되는 인원이다· 출발할 때의 인원 오분지 일에 불과했다·
이 정도 인원으로는 만일의 상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기에 용무성과 백룡상단의 보표들은 서장을 통해 감숙성으로 돌아가는 먼 여정을 택했다·
갈림길에서 윤자명이 진무원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그동안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진 소협·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들에 대한 보상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겁니다·”
“물론입니다· 저를 위해 희생하신 사람들에 대한 보답은 확실히 할 겁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언제라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꼭 백룡상단에 연락 주십시오· 백룡상단의 모든 것을 동원해 진 소협을 지원하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말만이 아닙니다· 이 윤자명 신의가 무엇인지 진 소협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이제까진 단순히 돈을 보고 살아왔지만 이후부터는 더 큰 목적을 위해 살아가겠습니다·”
윤자명의 음성에는 이전에 없던 굳은 신념이 담겨 있었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그 역시 심경의 변화를 겪었고 세상을 보는 눈 자체가 달라졌다·
진무원은 그에게 고개를 숙인 후 황철과 곽문정을 향해 다가갔다·
“황숙·”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무공을 완성하는 즉시 공자님을 찾아가겠습니다·”
“예·”
진무원의 시선이 황철의 곁에 있는 곽문정을 향했다·
“황숙을 잘 부탁한다·”
“예 걱정하지 마세요· 형이야말로 몸조심하세요·”
곽문정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며 대답했다· 그런 그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분했다·
진무원에게 아무런 힘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자신이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이·
곽문정이 애써 눈물을 참으며 밝게 웃었다· 진무원이 그런 곽문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진무원은 황철과 곽문정에게 미소를 보여준 후 몸을 돌렸다·
하진월과 청인 당기문 숙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젠 운중천을 향해 떠날 시간이었다·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진무원의 시선이 북쪽으로 향했다·
☆ ☆ ☆
그곳은 무척이나 거대한 협곡이었다·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이 양쪽으로 서 있고 그 한가운데를 큰 계곡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절벽은 칼날을 세워놓은 것처럼 날카롭고 굉음을 내며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세상을 모조리 휩쓸어 버릴 것처럼 사납기 그지없었다·
협곡 곳곳에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들이 은신해 있었다· 그들은 주위의 풍경과 완벽하게 동화된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기척을 지우고 체온마저 떨어뜨려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한 지운 자들의 수는 무려 백여 명이 넘었다· 그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암살자들이었다·
청련살문(靑蓮殺門)·
무려 이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자객의 집단이다·
이제껏 단 한 번의 암살도 실패하지 않았고 그들의 목표가 된 이는 반드시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자객들의 전설이 된 전설적인 살문·
얼마 전 그들에게 의뢰 하나가 들어왔다·
목표는 오직 한 명·
대가는 수만금이었다· 청련살문이 십 년을 일해야 얻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의뢰자는 불분명했지만 청련살문은 의뢰를 받아들였다·
그를 제거하기 위해 고용된 청련살문의 자객 수는 무려 백여 명· 사실상 청련살문의 모든 자객이 이 한 번의 의뢰를 위해 동원된 것이다· 청련살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지간해서는 움직이는 일이 없는 청련살문의 문주 백견수도 이 한 번의 의뢰를 위해 직접 나섰다·
‘이 의뢰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백견수는 이번 살행에 청련살문의 운명이 걸려 있음을 직감했다· 때문에 휘하의 자객들에게도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목표물을 제거할 것을 지시해 놓은 상태이다·
그들이 내뿜는 은은한 살기에 동물들은 물론이고 벌레들마저 울음을 멈췄다· 인간은 느끼지는 못하는 미세한 살기를 느끼고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투웅!
갑작스러운 기파에 은신해 있던 자객들이 움찔했고 날개를 접고 있던 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만큼 기파는 강렬했으며 심혼을 울리는 강렬한 진동을 발산하고 있었다·
‘시작이다·’
백견수는 그들이 제거해야 할 대상이 나타났음을 직감했다·
사사삭!
이제껏 숨을 죽이고 있던 자객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변 풍경과 동화된 채 목표가 나타난 곳으로 짐작되는 방향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견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일반 자객이 아니었다· 다른 자객들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최후의 보루였다· 이곳에서 끝까지 은신한 채 때를 기다릴 것이다·
‘그 어떤 대상이라도 청련살문의 손을 피할 수는 없다·’
백견수는 자신의 차례까지 오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그만큼 그는 부하들을 믿었다· 개개인이 수십 차례의 살행을 성공시킨 특급암살자가 십여 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그들을 믿지 못한다면 천하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쾅!
갑자기 협곡 북쪽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바위 사이에 은신하고 있던 백견수에게도 강한 진동이 전해졌다·
‘고수 그것도 극강의 고수·’
굉음이 울려 퍼진 곳과 그가 은신해 있는 곳의 거리는 어림잡아 삼백여 장· 그 정도의 거리를 격하고 전해지는 진동이라니 그의 상상 이상이었다·
백견수는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에 땀이 촉촉하게 배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럴수록 백견수는 더욱 이성적으로 변했다· 그는 의식적으로 육체의 반응을 조절했다·
심박 수를 낮추고 체온을 주위의 기온과 거의 같을 정도로 떨어뜨렸다· 특급 자객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감정과 육체를 조절할 수 있어야 했다·
백견수의 별호는 무음살검(無音殺劍)이었다· 그는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를 셋이나 죽인 경험이 있는 자객 중의 자객이었다·
쾅!
다시 한 번 그의 감각을 자극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전보다 소리는 작은데 이상하게 느껴지는 진동은 더욱 격렬했다·
쿵!
다시 한 번 폭음이 울려 퍼졌다· 마찬가지로 좀 전보다 소리는 더 작아졌는데 느껴지는 존재감은 더욱 커졌다·
‘이건?’
백견수가 자객의 금기를 깨고 동요했다·
피부 위로 지렁이가 스멀스멀 기어가는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척추를 자극했다·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였다· 이런 적은 처음이기에 백견수는 더욱 당황했다· 이성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자객이 된 이후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결국 백견수는 금기를 깨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굉음의 근원을 찾아 움직였다·
북쪽으로 백여 장을 이동했을 때 다시 한 번 폭음이 울려 퍼지더니 근처 수풀로 무언가 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수풀에 처박힌 물체를 확인한 순간 백견수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원형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일그러진 고깃덩이는 그의 수하였다·
‘유명·’
그의 한쪽 팔이나 다름없는 수하다· 특급 자객이고 수없이 많은 살행을 성공시켜 그의 총애를 받던 자다· 그런 이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져 있다·
쿠콰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강렬한 기파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나뭇가지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낙엽이 비처럼 흩날렸다·
“큭!”
백견수가 기파의 근원을 향해 몸을 날렸다·
커다란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휘류류!
은백색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칼날 같은 바람에 암습하던 자객들의 몸이 잘려나가고 있었다· 두 동강이 세 동강이 난 시신이 널브러지고 선혈이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비산했다·
백견수의 부하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은백색의 구체를 공격했다·
독을 묻힌 암기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고 각종 무기가 망막을 가득 채웠다· 그야말로 필사의 공격이었다·
투퉁!
그러나 자객들의 공격은 은백색의 구체에 막혀 힘없이 떨어지거나 오히려 튕겨나갔다· 그 직후 은백색 구체의 반격이 시작됐다·
예의 은백색 칼바람이 일어나 공격해 온 자객들을 공격했다·
“크헉!”
“흑!”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소리를 뱉지 않게 훈련을 받은 자객들이 공포가 섞인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가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백견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광경이었다·
백여 명이 넘어가던 부하들은 이제 겨우 십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들도 금방 꺼질 촛불처럼 위태해 보였다·
결국 백견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은백색 구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은밀히 움직여야 한다는 자객의 절대 금기를 깰 만큼 그는 절박했다·
그의 본능이 속삭이고 있었다· 저 은백색의 구체에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죽는다고· 항거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저 은백색의 구체 안에 웅크리고 있다고·
자객의 길을 걸으면서 마비되었다고 생각한 감성과 두려움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래서 백견수는 오히려 더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두렵다고 물러선다면 그것으로 자객의 생명은 끝이 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혼신의 공력을 검에 주입했다·
일검에 격살하지 못하면 오히려 죽임을 당한다·
쉬가악!
그의 검이 공기를 가르며 은백색 구체를 향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다른 자객들도 혼신의 힘을 다해 공격했다·
그들의 파상 공세에 놀랐는지 은백색의 구체가 갑자기 조그맣게 응축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은백색의 기류가 사방으로 폭발했다·
쿠콰카각!
모든 것이 잘려나갔다·
자객들의 검도 자객들도·
백견수의 몸도 허리에서 두 동강이 났다·
반대 방향으로 추락하는 자신의 하체를 보며 백견수는 생각했다·
‘뭐지 저 괴물은?’
그것이 그의 마지막 사고였다·
후두둑!
수풀과 나무 위로 피비가 내렸다· 그제야 은백색 기류는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는 듯이 사라져 갔다·
은백색의 기류가 사라진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이제 겨우 열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녀였다·
유난히도 창백해 보이는 하얀 피부와 흑옥같이 선명한 검은 눈동자 금방이라도 선혈이 뚝뚝 떨어질 듯 붉은 입술과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리는 푸른 머리카락·
방금 전 가공할 살육을 저질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소녀는 압도적인 미모와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소녀의 머리에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한 꽃 모양의 장신구가 꽂혀 있어 아름다움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의 앞에 검은 그림자가 뚝 떨어져 내렸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펑퍼짐한 검은 피풍의를 걸친 인형이 소녀 앞에 부복했다·
검은 인형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소주 대공을 이루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주위에 혈향이 진동하고 있었지만 검은 인형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소녀를 향해 있었다·
소녀의 성취를 알아보기 위해 청련살문에 암살 의뢰를 넣은 이는 바로 검은 인형이었다· 소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침내 소녀가 입을 열었다·
“사령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칠 년입니다·”
“칠 년···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흐른 건가?”
“소주께서는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령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도 소녀는 저 모습이었다· 칠 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는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멈춰진 시간 속에 사는 소녀의 이름은 은한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