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 8장 지옥을 거닐어보지 않은 자, 지옥을 논하지 말라 (3)
호북성(湖北城)의 성도인 무한(武漢)은 양자강과 한수의 합류점에 위치해 있어 수륙 교통의 중심지였다· 동호(東湖)와 홍호(洪湖) 등 수많은 호수와 강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되어 있기에 하루에도 수많은 이가 물길을 이용해 무한을 찾곤 했다· 하지만 근래 들어 무한보다도 더 많은 이가 찾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한천(漢川)이었다·
무한에서 서쪽으로 백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천에는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단체의 총본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운중천(雲中天)·
강호무림을 지배하는 초거대 세가 한천이라 불리는 호수 한가운데 있는 조그만 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둘레만 사십여 리가 넘는 섬 안에는 수십 개의 대소 전각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운중천은 오직 정문으로 연결된 다리를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했는데 다리 위에는 항상 수십 명의 무사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허락을 받지 않거나 신분이 증명되지 않는 자는 출입이 불가능했고 이에 예외는 존재하지 않았다·
운중천은 각 문파에서 파견 나온 무인들과 항시 상주하는 무인들로 북적거렸다· 수천 명의 무인이 한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니 자연 막대한 양의 물자가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대의 마차와 수백 명의 상인이 운중천을 드나들면서 물자를 실어 날랐다·
운중천으로 통하는 유일한 다리 주위에는 자연스럽게 커다란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그 규모가 어지간한 현(縣)에 육박할 정도였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선택받은 사람들이라 부를 정도로 운중천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래서 마을의 이름 또한 운중현(雲中縣)이라 불렀다·
운중현은 단순한 마을이 아니었다· 풍운의 꿈을 안고 올라온 젊은 무인들 항시 운중천의 동향에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중소 문파의 비간(秘間)들 그리고 각기 야망을 품은 자들이 모여 사는 또 하나의 작은 강호였다·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돈이 모이고 그 돈을 노린 각종 상인들과 기녀들이 흘러들어 오고 그곳에서 다시 정보가 모였다가 흩어졌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운중현에 사는 사람 중 평범한 이는 거의 없었다·
청화객잔(靑花客棧)은 운중현의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객잔이었다· 운중현의 다른 객잔들보다 비용이 싸고 저렴해 가난한 젊은 무인들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이기도 했다·
청화객잔의 일 층 식당은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운중천에 입성할 기회를 노리는 젊은 무인들이었다· 평소에도 많은 이가 모이는 곳이지만 요 근래에는 손님이 배 이상 늘었다·
운중천에서 젊은 무인들로 이뤄진 새로운 조직을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수많은 무인이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운중천의 정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다른 곳보다 저렴한 청화객잔에 머물고 있었다·
청화객잔의 문이 벌컥 열리며 젊은 무인이 들어왔다· 하지만 식당에 있는 사람 중 젊은 무인에게 신경을 쓰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루에도 수많은 이가 청화객잔을 찾아왔고 또 나갔다· 단순히 스쳐 지나갈 인연에게 신경을 쓸 바에야 운중천의 동향에 이목을 곤두세우고 소문이라도 하나 더 주워듣는 것이 남는 장사였다·
젊은 무인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계산대에 앉아 있는 주인에게 다가가 뭐라고 속삭였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주인이 계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젊은 무인은 계단을 올라 삼 층으로 향했다· 삼 층 복도 끝에는 두 명의 젊은 장정이 지키고 있는 방이 있었다· 장정은 젊은 무인과 몇 마디 이야기를 하더니 안으로 들여보내 줬다·
방 안은 무척이나 검소했다· 탁자와 의자 등 투박한 가구가 전부였고 그 흔한 장식장 하나 없었다· 탁자에는 한 남자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평범한 체구의 남자였다· 남자의 등에서는 오랜 관록과 단단함이 느껴졌다· 그는 젊은 무인이 들어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젊은 무인은 숨을 죽인 채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슥슥!
좁은 방 안에 남자가 붓을 놀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젊은 남자에게는 그 소리가 마치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남자가 마침내 붓을 내려놓고 종이를 돌돌 말았다· 그는 어린아이 손가락만 하게 돌돌 말린 종이를 조그만 통에 넣고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젊은 무인은 그런 남자의 모습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의문이 풀렸다·
곧 푸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창가에 새 한 마리가 날아온 것이다·
‘전서응?’
흔히들 해동청이라고 부르는 조그만 매였다· 덩치는 비록 작지만 무척이나 날래고 사나워 길들이기가 쉽지 않은 놈이다· 하지만 일단 길만 들이면 천하의 그 어떤 전서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남자는 전서응의 다리에 조그만 통을 단단히 동여맨 후 날려 보냈다· 전서응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가 등을 돌렸다· 그러자 남자의 민낯이 드러났다·
나이는 삼십 대 후반에 마치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과 날카로운 눈매가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한 느낌을 받게 했다· 남자의 목에는 특이하게 조그만 가죽 주머니가 목걸이처럼 걸려 있었다·
그가 젊은 무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운남에서 지급으로 온 보고입니다·”
“운남?”
젊은 무인의 대답에 남자가 눈을 빛냈다· 젊은 무인은 품에서 봉서를 꺼내 남자에게 공손히 바쳤다·
남자는 봉서를 열고 그 안에 담긴 서신을 읽기 시작했다·
“조천우 실종?”
서신을 읽을수록 남자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이게 사실인가?”
“운남성에서 파견된 적무당이 보내온 서신입니다·”
“적무당? 당주가 담주인이었지?”
“그렇습니다·”
젊은 무인의 대답에 남자가 서신을 내려놓고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젊은 무인은 그런 남자를 긴장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남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는 추밀당(追密堂)을 이끄는 당주였다·
운중천에는 수많은 비밀 조직이 존재했다· 추밀당 역시 그런 조직 중 하나였다·
추밀당은 운중천의 잠재적인 적의 동향을 파악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조직이었다· 추밀당에서 수집된 정보는 총관부를 비롯한 운중천의 각 정보 조직에 전해졌다·
즉 추밀당이 적으로 규정하는 자는 운중천에서도 적으로 규정했다· 그 때문에 많은 이가 추밀당을 두려워했다· 혹시라도 추밀당에 밉보이는 순간 자신들 역시 운중천의 적으로 규정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남자는 그런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청화객잔이 추밀당의 본거지이며 남자가 추밀당주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남자의 신분은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졌으며 오직 운중천의 수뇌부 몇 명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천우가 실종되었단 말이지?”
남자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무어라 중얼거렸고 젊은 무인은 그런 남자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수하들에게 적무당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라고 전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젊은 무인은 남자의 이상한 명령에도 한 치의 의문도 갖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남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남자의 손짓에 젊은 무인이 포권을 취한 후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남자는 촛불에 서신을 불태웠다· 서신은 순식간에 재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남자는 서랍에서 커다란 지도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중원전도였다· 운중천이 있는 호북성을 비롯해 운남성 감숙성 등 중원 전역의 지형이 세밀하게 묘사된 지도였다·
운중천에서 수십 년 동안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만들어낸 지도이다· 운중천 내에서도 이 지도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남자는 바둑돌을 꺼내 중원전도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의 행로·”
흰 돌이 감숙성에서 시작해 사천성 운남성으로 이어졌다·
남자는 이어서 검은 돌을 운남성 곳곳에 올려놓았다·
“이것이 이제까지 드러난 밀야의 흔적·”
남자는 턱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중원전도를 바라보았다· 마뜩치 않은 표정을 짓던 남자가 이번에는 특별히 제작한 푸른 돌을 운남성의 중심에 올려뒀다·
“패권회 그리고 조천우의 흔적·”
남자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번에는 붉은 돌을 꺼내 운남성 주변에 배치했다·
“적무당의 배치·”
그제야 그가 원하는 그림이 완성됐다·
현재 운남성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남자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정보가 취합되어 차곡차곡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가 철검문(鐵劍門)의 마지막 전인이라고?”
그는 현재 강호에 가장 큰 위명을 떨치는 신진무인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가슴은 거세게 뛰고 있었다·
“아니다· 그는 주군이 분명하다·”
그의 이름을 처음 듣는 그 순간부터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손바닥에 땀이 차고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는 남자의 피를 들끓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소무상이었다·
칠 년 전 북천문에 파견되었던 그가 추밀당주라는 신분으로 복귀한 것이다·
북천문이 전소하고 운중천으로 소환된 소무상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그는 당시의 참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한 마지막 생존자였다·
운중천에서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전문가들이 달라붙었다· 말이 전문가지 사실은 고문 기술자들이나 다름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소무상의 곁에 붙어 진실을 토해내게 하는 수많은 기법을 사용했다·
그들의 고문 아닌 고문에 소무상의 정신과 육체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갔다· 하지만 그는 결코 진무원의 생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 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그제야 운중천은 소무상의 증언이 사실이라고 받아들였다·
즉 진무원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한 것이다·
그제야 자유를 얻은 소무상은 운중천의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소무상은 철저하게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야 했다·
소무상은 이를 악물었다·
운중천은 그를 버렸지만 단 한 명 진무원만큼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일부러 진무원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혹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의 짐작은 맞았다·
그에 대한 운중천의 은밀한 감시는 무려 삼 년이나 더 이어졌다· 삼 년을 더 감시당한 끝에 소무상은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소무상은 오직 무공을 익히는 데만 열중했다· 진무원이 전해준 심득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것이다·
그때부터 소무상은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운중천도 그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점차 중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무상은 서서히 자신의 위치를 확보해 갔고 그 결과 지금의 추밀당주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소무상은 추밀당주로서 최선을 다했다·
운중천 안에서 자리를 확고히 하는 것만이 진무원을 위한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소무상은 최근 북검이라는 별호로 강호에 출두한 진무원이라는 존재를 주목했다· 아니 그가 북천문의 진무원이라고 확신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피가 들끓었다·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남자는 오직 단 한 명 그의 주군인 진무원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추밀당이고 뭐고 당장 때려치우고 한달음에 진무원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무공은 대성했을지 모르지만 아직은 주군의 기반이 너무 약하다· 주군이 기반을 마련할 때까지 운중천의 이목을 끄는 것을 막아야 한다·”
곧 난세가 시작될 것이다·
단순한 감(感)이 아니었다· 추밀당의 당주로서 수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얻어낸 추론이다·
“밀야나 운중천이나 모두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숨고르기가 끝나면 온 힘을 다해 격돌하겠지·”
수십 년 동안 한껏 응축된 힘이 격돌하는 셈이다·
봉인이 풀린 파괴력의 여파가 어느 정도일지 소무상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 그가 아는 것은 단지 끔찍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뿐이다·
“내 주군은 오직 한 명 그뿐이다· 그를 위해 이곳에서 버틴다·”
소무상이 결연한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