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 6장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절대 잊지 않는다 (3)
“이봐 당신·”
하진월은 엉뚱하게도 근처에 있는 젊은 보표를 불렀다· 젊은 보표가 영문을 알지 못해 멀뚱멀뚱 하진월을 바라봤다· 하지만 하진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까닥거렸다·
젊은 보표가 인상을 팍 썼다·
“무슨 일이슈? 지금 바쁜 거 안 보이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네·”
“그럼 뭐가 중요하오?”
“지금쯤 분명히 은밀하게 지켜보고 있는 눈이 있을 터 그들을 제거해 주게나·”
“내가 왜?”
“흑월이니까·”
순간 젊은 보표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며 하진월은 미소를 지었다·
“무원이 떠나기 전에 이야기해 주었네·”
“그 인간이 진짜····”
“내가 운중천이라면 반드시 우리 일행이나 조천우에게 감시를 붙였을 터· 그들이 어디에서 지켜볼 줄 모르지만 제거해 주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네·”
“그걸 내가 왜 해야 합니까?”
“그게 흑월에도 이득이 될 테니까·”
“무슨···?”
“정보의 독점이야말로 흑월의 가장 큰 무기· 굳이 운중천과 정보를 나눌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진월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마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눈빛에 청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삼뇌서생 하진월 이자에 대한 정보는 흑월에도 거의 없다·’
흑월에도 정보가 없다는 것은 주목의 대상이 아니란 뜻이다· 흑월의 원칙대로라면 청인은 위험을 피해 이 자리를 은밀히 빠져나가야 했다· 그런데도 그가 망설이는 것은 하진월 때문이었다·
철기당의 무인들과 백룡상단의 보표들이 밀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전멸은 시간문제였다· 그런데도 하진월의 얼굴에는 전혀 위축된 표정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마저 띠고 있었다·
그래서 꺼림칙했다· 과연 하진월이 갖는 자신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요구가 마구 샘솟았다·
“젠장할! 나중에 월주한테 잔소리 무지 들을 것 같은데·”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을 걸세· 내가 장담하지·”
“어디 지켜보겠소· 썩을!”
투덜거리던 청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진월은 그의 가공할 은신술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문정아·”
“예!”
하진월의 부름에 곽문정이 뛰어왔다· 겨우 하룻밤을 같이 지냈을 뿐이지만 그는 하진월이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말씀만 하세요·”
하진월이 품에서 손바닥만 한 깃발 십여 개를 꺼내 곽문정에게 건넸다·
“이걸 내가 가리키는 곳에 정확히 꽂아라· 깃대에 표시된 만큼만 꽂으면 된다·”
하진월의 말처럼 깃대에는 칼로 낸 듯한 흠집이 각각 다른 깊이로 새겨져 있었다·
하진월은 귓속말로 곽문정에게 깃발을 꽂아야 할 곳을 알려주었다·
“잘 기억할 수 있겠지?”
“예 맡겨만 주세요!”
곽문정이 힘차게 대답했다·
하진월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하진월밖에 없었다·
곽문정이 하진월이 가리킨 방향으로 급히 뛰어갔다·
하진월의 옆에 있던 당기문이 입을 열었다·
“내가 도와줄 일은 없겠는가?”
“왜 없겠습니까? 당연히 있지요·”
하진월이 미소를 지었다· 하진월의 눈은 맑고 깊었다· 그의 눈은 당기문이 보지 못하는 곳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현기를 담고 있었다·
분명 위기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든든했다· 당기문은 그 이유가 하진월과 함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괴팍한 성격에 말투도 괄괄했지만 하진월은 이상하게 신뢰감을 주는 남자였다· 이런 남자를 데리고 진무원이 무엇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한번 지켜볼까?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윤서인은 윤자명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상황이 너무나 급박했기에 보표들에게만 기댈 수 없었다· 그녀의 손에는 죽문검이 들려 있었다·
공동파의 진신절학이 그녀의 손에서 펼쳐졌다· 그러나 상대는 패권회의 무인이었다· 그녀도 검기를 뿌릴 수 있었지만 상대 역시 권기를 마음대로 수발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무엇보다 상대는 그녀보다 실전 경험이 월등했고 피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차이가 승패를 가르고 있었다·
퍼억!
“아악!
상대의 주먹이 그녀의 허벅지 바깥쪽에 작렬했다· 극렬한 통증에 윤서인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계집이 감히 어디서····”
상대의 눈에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다·
다른 패권회의 무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옥계의 참사로 수많은 동료를 잃은 그들의 가슴에는 오직 분노만이 가득했다· 윤서인의 미모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제거할 대상에 불과했다·
윤서인이 암담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수개월 동안 동고동락하던 보표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흘리는 신음성에 귀를 막고 싶었다· 그들의 죽음에 눈을 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강호는 더 이상 낭만적인 곳이 아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걸쳐져 있는 위험한 세계였다· 그곳을 살아가는 강호인의 삶을 감당하기엔 그녀의 신경이 너무도 여렸다·
“서인아·”
윤자명이 원통한 눈으로 윤서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동생이 위험에 처한 모습을 보았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크윽!”
눈물이 앞을 가렸다·
패권회의 무인이 윤서인을 향해 그 커다란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솥뚜껑만 한 주먹에 윤서인의 가녀린 육신이 으스러지기 직전이었다·
서걱!
갑자기 낯선 무인이 그들의 싸움에 개입했다· 철기당의 공손창이었다· 그의 일검에 윤서인을 공격하던 무인이 목이 갈라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위험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숫자가 너무 많아·”
공손창이 윤서인의 앞을 가로막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철기당의 무인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수에서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났다·
철기당의 무인들 몸에도 선혈이 낭자했다· 그 대부분이 타인의 피였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그들이 무너지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그의 눈이 용무성을 찾았다·
쾅!
“크윽!”
굉음과 함께 용무성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의 입가엔 한줄기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천우의 일권에 내상을 입고 만 것이다·
조천우의 공력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주먹은 쇳덩이보다 단단했고 그 안에 담긴 파괴력은 집채만 한 바위라도 능히 분쇄할 정도였다·
조천우는 용무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무성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이다·
용무성의 얼굴은 더할 수 없이 굳어 있었다·
결과가 너무나 뻔히 보이는 싸움이었다· 제일 먼저 보표들이 몰살을 당하고 철기당의 무인들이 하나둘씩 죽어갈 것이다· 이렇듯 압도적인 전력과 물량 공세에는 아무리 철기당이라 할지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종리무환이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한번 기운 전황을 다시 되돌리는 것은 종리무환에게도 역부족이었다·
‘하필 녀석이 자리를 비웠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그는 처음으로 진무원이 자리에 없는 것을 원망했다·
그때였다·
[일각만 시간을 벌어주시오·]
누군가의 전음이 그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용무성이 슬쩍 뒤를 바라봤다· 이상하게 하진월이 눈에 들어왔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져서 피아를 구별할 수 없는 상황인데 이상하게 그만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다·
‘일각 일각이란 말이지?’
이상하게 의심이 들지 않았다· 정말 일각만 버티면 무슨 수가 나올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용린도를 꼬나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에 조천우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밑천이 남아 있는 모양이구나· 어디 한번 마음껏 펼쳐 보거라·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 테니·”
“흥! 나를 우습게보지 마라 노괴·”
조천우가 대답 대신 손가락을 꺼떡거렸다· 그에 용무성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공력을 용린도에 집중했다· 그러자 용린도가 붉은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용린마형도(龍鱗魔形刀)·
그의 진신절학이 펼쳐졌다·
쉬가각!
패도적인 도기가 공기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며 조천우를 향해 날아갔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에 조천우가 처음으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피부를 저릿하게 울리는 위압감과 신경을 불안하게 긁는 날카로운 기파가 범상치 않았다· 비록 분노 때문에 잠시 이성을 잃긴 했지만 그 역시 무의 궁극을 추구하는 무인· 생전 처음 보는 무공에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처음으로 웃었다·
“어디 마음껏 놀아보려무나·”
“큰코다칠 거요·”
용무성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살기 어린 그의 눈빛에 조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 하나만큼은 마음에 드는구나· 하지만 눈빛만으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지· 어디 그 칼도 눈빛만큼 날카로운지 보자꾸나·”
“결코 실망하지 않을 거요·”
용무성이 조천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치잉! 치잉!
과도하게 주입된 공력 탓에 용린도가 기괴한 도명을 터뜨렸다· 마치 짐승이 우는 것 같은 소리였다·
용무성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순식간에 조천우와의 거리를 단축했다·
“챠핫!”
촤하학!
용린도에서 짐승의 발톱과도 같은 붉은 도기가 폭사됐다· 조천우는 왼발을 축으로 몸을 살짝 회전하며 용린도를 흘려보냈다·
순간 용무성이 용린도를 회전하며 역수로 쥐었다· 그런 그의 공격에 조천우의 옷깃이 살짝 잘려 나갔다·
그때부터 용무성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됐다·
용린마형도의 절초인 마마귀혼참(魔劘鬼魂斬) 용아폭렬혼(龍牙爆裂魂) 등이 연이어 펼쳐졌다·
도광이 번쩍이고 도풍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대지의 거죽이 일어나고 근처에 있던 바위가 부서져 나갔다·
조천우의 눈빛이 변했다·
용무성의 도법은 그야말로 처절한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반드시 상대를 죽이겠다는 일념이 담긴 도법이었다· 용무성이 펼치는 초식 중 살초가 아닌 것이 없었다·
‘이 도법을 만든 자는 분명 살인을 탐닉하는 미치광이거나 원한이 하늘을 찌르는 자겠구나·’
천하의 조천우도 위기감을 느낄 만큼 용무성의 용린마형도는 살벌했다·
조천우가 양손을 활짝 펼쳤다·
“너는 나의 권(拳)을 견식할 자격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