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4장 늙은 용은 추락하고, 젊은 용들은 비상을 꿈꾼다 (2)
흔히들 항유천당(上有天堂) 하유소항(下有蘇杭)라고 했다·
하늘에 천당이 있으면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는 말처럼 중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혔다·
바다가 가까워 식재료가 풍족하며 원림이 발달해 중원의 부호치고 소주 항주에 장원 한 채 두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아름다운 풍경에 끌려 사람들이 모여들고 사람들이 모이니 재화가 쌓였다·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윤기가 흐르고 글 쓸 줄 안다는 시인묵객들은 이름난 장원의 식객을 자처하며 수많은 명문과 명화를 남겼다· 때문에 소주에 사는 사람들은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운정원(雲政園)은 소주의 서호(西湖)에 지어진 아름다운 원림이었다· 원림 안에 서호의 물을 끌어들여 커다란 연못과 가산을 만들고 화려한 정자를 만들었는데 봄이면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가을이면 홍엽이 가득해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정자의 이름은 운향각(雲香閣)·
평소 사람들의 발길을 엄금하던 그곳이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사람이 들어왔다·
이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무척이나 잘생긴 남자였다· 얼굴선이 유난히도 날카로우면서도 피부가 새하얬는데 그래서인지 붉은 입술과 날카로운 눈매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남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가산과 연못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남자의 차가운 눈동자 속에는 가산의 아름다운 풍경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 듯했다·
그는 마치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미동도 없이 한참이나 가산을 바라봤다· 그의 몸에서는 자연스럽게 위압감이 발산되고 있었는데 오만한 그의 표정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때 종복으로 보이는 듯한 중년 남자가 종종걸음으로 정자 밑으로 달려왔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공자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안으로 들이거라·”
“예!”
중년 남자가 물러가고 잠시 후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제야 남자가 뒷짐을 풀고 뒤를 돌아봤다·
새벽에 핀 수련처럼 청초한 외모의 여인이 정자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윽하면서도 촉촉한 눈동자는 마치 세상의 모든 지혜를 담고 있는 듯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여인의 등장에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오랜만에 보는군·”
“이 년 만이지 싶네요 심 공자님·”
여인도 미소를 지었다·
남자의 이름은 심원의· 사사천의 소천주이자 칠소천의 일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배경을 가진 이 시대의 기린아였다·
심원의와 마주 선 여인은 서문혜령이었다· 그녀 역시 칠소천의 일원이자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를 가진 것으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다른 이들은?”
“거의 다 도착했을 거예요·”
“그런가?”
심원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운정원은 사사천 소유의 장원으로 심원의가 주로 쉴 때 별장으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개인적인 용도 외에 타인에게 이곳을 개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운정원을 개방한 것 자체가 오늘이 무척이나 특별한 날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창룡회(蒼龍會)·
그간 그와 서문혜령이 포섭한 젊은 무인들이 회합을 가지는 자리였다·
“수천은?”
“아직 폐관 수련이 끝나지 않았다고 하네요·”
“아직도인가?”
“결정적인 단초를 얻었나 봐요· 원하는 것을 얻기 전까지는 절대 나오지 않겠다고 하네요·”
“그거 기대되는군·”
누가 뭐래도 창룡회의 중심은 담수천이었다·
그 이름 석 자만으로 창룡회의 수많은 젊은 무인을 하나로 묶는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남자는 그 한 명밖에 없었다· 창룡회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심원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담수천이 강해지는 만큼 창룡회도 강해진다· 창룡회가 강해지는 만큼 심원의의 꿈을 이룰 확률 역시 높아지기에 담수천의 무력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분명 무섭도록 강해질 거예요· 궁극의 무를 향한 그의 집착은 그야말로 소름 끼칠 정도니까요·”
“역시 칠 년 전 그 일이 영향을 끼쳤나 보군·”
심원의의 말에 서문혜령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칠 년 전 북천문에서의 치욕적인 도주가 그에겐 씻을 수 없는 치욕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더욱더 무공 수련에 집착했고 가장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서문혜령과 심원의조차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우리에겐 잘된 일이야· 회주가 강할수록 구성원의 야심 역시 커지는 법이니까·”
“역시 심 공자님다운 말씀이시군요·”
“천하 격변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어· 당장은 미약한 변화에 불과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분명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거야·”
“밀야의 등장과 옥계 참사를 말씀하시는군요· 확실히 그 일 때문에 우리의 계획이 앞당겨질 가능성이 커진 게 사실이에요·”
“역시 서문 소저도 인지하고 있었군· 하긴 당연한 말인가? 서문 소저는 천하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 중 한 명이니까·”
“과찬이에요·”
서문혜령이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밀야의 재등장으로 인해 천하는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이제까지 운중천의 강력한 지배력 때문에 숨을 죽이고 있던 야심가들이 하나둘씩 기지개를 켤 거야· 그야말로 우리가 원하던 시대지·”
“하지만 많은 사람이 죽을 거예요·”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법이지· 그런 면에서 나는 옥계에서 희생된 사람들에게 감사해· 그들의 희생이 난세의 시발점이 되었으니까·”
난세는 기존의 공고하던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태동함을 뜻했다· 심원의와 창룡회가 그토록 기다려 온 절호의 기회였다·
“그에 대한 소문은 들었나요?”
“그?”
“옥계 참사를 종식시킨 남자 말이에요· 요즘 북검이라는 별호로 불린다네요·”
“아 북검·”
그제야 심원의가 아는 척을 했다· 실제로 그는 북검이란 별호를 크게 귀담아듣지 않았다· 별호가 제법 광오하긴 하지만 언제나 소문은 과장되게 마련이니까·
심원의의 그런 무신경함에 서문혜령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심원의는 자신의 눈높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의 이름은 진무원이에요·”
“진무원?”
“생각나는 거 없나요?”
“글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칠 년 전 북천문·”
“아! 북천문의 소문주 이름이 진무원이었지·”
그제야 심원의는 진무원이란 이름 석 자가 왜 아릿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지 떠올렸다·
“그럼 북검이란 자가 북천문의 그 진무원인가?”
“정보에 의하면 동명이인라고 하네요· 하나 왠지 마음에 걸려요·”
“동명이인이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그런데 그게 왜 마음에 걸리는지 모르겠군· 북천문의 진무원은 이미 죽은 자가 아니던가? 그 때문에 운중천에서도 철저히 조사를 했고·”
칠 년 전 일로 운중천은 발칵 뒤집혔었다· 그 때문에 상상을 초월하는 인력이 동원되어 조사에 나섰고 그 결과 북천문의 마지막 문주인 진무원은 죽은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거야 그렇지만····”
“지금은 미래에 집중할 때· 그런 과거의 망령 따윈 신경 쓸 시간이 없어·”
심원의의 말에도 서문혜령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손톱 밑에 박힌 조그만 가시처럼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신경을 콕콕 건드리고 있었다·
‘그래도 확인을 해봐야 해· 심 공자는 무시하지만 북천문의 정통 후계자가 가지는 이름의 무게는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서문혜령은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지금 심원의에게 그런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머지 분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때 종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기척과 함께 십여 명의 젊은 무인이 정자 위로 올라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도를 발산하고 있었는데 절제된 몸동작과 정광을 뿜어내는 눈빛이 그들의 경지가 범상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심 공자님·”
“서문 소저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들이 심원의와 서문혜령에게 포권을 취했다·
창룡회의 회주는 담수천이지만 실질적인 일 처리는 두 사람이 도맡아했다· 때문에 두 사람을 대하는 젊은 무인들의 태도는 무척이나 극진했다·
“오랜만에 보는군· 잘들 지냈는가?”
“하하! 저희야 이제나저제나 회합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아주 몸이 근질근질해 혼이 났습니다·”
너스레를 떠는 젊은 무인의 이름은 좌문호· 산동 지역의 명문인 삼환검문(三環劍門)의 장문제자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 중 명문의 제자가 아닌 이가 없고 한 번쯤 천재라 불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들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화의 주된 주제는 바로 얼마 후면 결성될 척마대에 관한 것이었다·
“척마대의 무인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대신 강력한 권한이 주어진다네· 특히 분쟁이 일어난 지역의 문파들을 소집 지휘할 수 있는 권한과 감찰권은 그야말로 매혹적이라 할 수 있지·”
강호 어디에서든 다른 문파들을 마음껏 부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위상은 독보적이라 할 수 있었다· 이 권한을 잘만 이용한다면 구대문파의 장문인이 부럽지 않은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서문혜령이 입을 열었다·
“창룡회가 비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예요· 우리는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 해요·”
“척마대라···· 노인네들이 기특한 생각을 다 했군요· 그들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권한 중 일부를 내놓을 줄은 몰랐는데요·”
“그만큼 밀야가 두렵다는 뜻이겠죠· 아니면 자신들의 출혈은 최소한으로 막고 젊은 무인들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뜻이거나· 공명심에 눈이 먼 젊은 무인들처럼 이용하기 좋은 존재는 드무니까요·”
“하기는····”
“그래도 우리는 이 기회를 잡을 수밖에 없어요· 지금 기회를 놓치면 창룡회가 또 언제 비상할 기회를 잡을지 알 수 없어요·”
서문혜령의 설명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만간 척마대를 뽑을 거예요· 그때까지 각자 만반의 준비를 하시고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포섭하세요· 특히 척마대에 뽑힐 가능성이 있는 자들 위주로요·”
“음!”
서문혜령의 시선이 심원의를 향했다·
“심 공자님께서 직접 만나서 끌어들여야 할 사람이 있어요·”
“내가?”
심원의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자신이 직접 나서면서까지 포섭해야 할 사람이라면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누군가?”
“삼뇌서생 하진월·”
“처음 듣는 이름이군·”
“운남성의 인물이니 심 공자는 모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는 반드시 포섭해야 해요·”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나?”
“그는 당금 천하에서 나에게 필적할 만한 두뇌를 가진 유일한 사람이에요·”
심원의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겸손해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이다· 이제껏 누군가를 그녀와 동등하게 평가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오 년 전 그를 만나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심마를 안겨주었죠·”
그를 만난 것은 유명한 대석학인 석대선생의 회갑연이었다· 우연히 동석한 두 사람은 담론을 나누기 시작했는데 천문 지리를 비롯해 절진과 용병술 전략까지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다·
사람을 보는 관점 철학 성격까지 무엇 하나 맞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서로의 천재성만큼은 확실하게 인지했다· 특히 서문혜령이 느낀 위기감은 매우 심각했다· 이대로 하진월을 내버려 두면 단시간 안에 자신의 위치를 위협할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가문의 절진을 하진월에게 보여주었다· 서문세가 수백 년의 정화가 담긴 구주만형대진(九州萬形大陣)이 그것이다· 서문세가가 배출한 천재들의 지식이 총망라된 구주만형대진을 본 순간 하진월은 큰 심마에 빠졌다·
“하지만 그가 정말 천재라면 지금쯤 심마를 극복했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하니 나도 만나고 싶군· 만일 포섭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반드시 제거해야 해요· 창룡회가 아닌 다른 그 어떤 용에게도 여의주를 물려주고 싶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