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 3장 지인은 상봉하고, 격변의 바람은 불어온다 (3)
진무원이 깊이 침잠된 눈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도 그런 진무원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 순간 남자의 뒤쪽에서 무인들을 헤치며 두 사람이 걸어왔다·
“자네 무사했군·”
“진 소협·”
당기문과 당미려였다·
“당 대협 당 소저 어떻게···?”
“운중천의 무인들이라네· 이쪽은 운중천 총관부에서 파견 나온 담주인 당주일세·”
당기문의 소개에 하늘색 장삼을 입은 남자가 진무원에게 다가왔다·
“운중천의 담주인입니다·”
“진무원입니다·”
“강호의 떠오르는 신성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진 소협·”
담주인이 빙긋 웃으며 진무원과 시선을 맞췄다· 순간 진무원은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시선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기 때문이다·
“우선 운중천을 대신해 진 소협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옥계 사태를 겨우 수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옥계 참사가 수습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인지 모르겠군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봐야지요·”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오신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저희 역시 그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설마 진 소협이 우리보다 먼저 이곳을 찾아낼 줄은 몰랐지만요·”
진무원의 날 선 목소리에도 담주인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담주인의 모습에서 진무원은 그가 이런 일에 무척이나 익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조직에나 뒷수습을 위한 인물이 있는 법· 아무래도 이자 역시 그런 부류인 것 같구나·’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흥분하는 법이 없고 그래서 어떤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자· 그만큼 능력이 뒷받침해 주기에 상대하기가 껄끄러운 존재가 바로 담주인과 같은 존재였다·
“진 소협·”
“말씀하십시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제부터 저희에게 맡기시고 진 소협은 좀 쉬시지요· 철기당 여러분 역시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저희 운중천에서는 여러분의 노고를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담주인의 말에 진무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담주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진 소협이 대단한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일은 일개인이 수습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철기당도 분명 대단하지만 이런 종류의 일에 익숙하지 않구요· 그렇다면 남는 것은 저희 운중천뿐이지요· 저희가 광증에 걸린 분들을 따로 격리하고 치료하겠습니다·”
“이들의 광증을 치료할 방법을 알고 있단 말입니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거의 근접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니 저희를 믿고 맡겨주시지요 진 소협·”
말은 무척이나 정중했지만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담주인의 등 뒤에는 적무당의 무인들이 도열해 날카로운 기세를 발산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위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용무성이 얼굴을 찡그렸다· 담주인이 마치 자신들을 협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상대는 강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운중천이다· 운중천과 척을 지고서는 강호상에 발을 붙일 곳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 이상 골치 아픈 일에 엮이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진무원은 그런 용무성의 의중을 읽었다· 다른 철기당의 무인들 역시 용무성과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담주인이 진무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정중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진 소협·”
담주인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진무원도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담주인은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진무원에게 거절의 여지를 앗아가 버렸다· 보통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는 처세술이었다·
‘담주인··· 어쩌면 이자야말로 가장 상대하기 껄끄러운 존재일지도 모르겠군·’
진무원은 이쯤에서 자신이 물러나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뒤처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운중천의 명예를 걸고 이 일을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담주인의 시선이 진무원에 손에 들린 검은 상자를 향했다·
“아무래도 지독한 독기가 느껴지는 것이 그것이 광증의 원인 같군요·”
“····”
“그것도 저희가 가져가서 분석해 보겠습니다· 원인을 알면 광증의 치료도 더 쉽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차라리 당 대협에게 드리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분석할 때 당연히 당 대협도 참석시킬 겁니다· 그때까지는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담주인이 진무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무원이 담주인의 곁에 있는 당기문을 바라봤다· 그러자 당기문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무원은 담주인에게 검은 상자를 넘겼다·
“부디 광증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내시길 바랍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 소협· 우리는 운중천입니다·”
“그럼····”
진무원이 지나치려 하자 담주인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나중에 꼭 한 번 운중천에 들러주십시오· 아마 위에 계신 분들도 진 소협을 뵙고 싶어 하실 겁니다· 경계를 서는 외당에는 미리 말을 해둘 터이니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 찾아오십시오·”
“생각해 보겠습니다·”
“운중천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답니다 진 소협·”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담주인이 돌아섰다· 진무원은 그런 담주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철기당과 당기문 숙질이 따랐다·
진무원의 기척이 사라지자 담주인의 얼굴에 어려 있던 미소가 싹 사라졌다·
“진무원 진무원이란 말이지?”
진무원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지독한 한기가 어려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그가 정말 명맥이 끊긴 철검문(鐵劍門)의 마지막 전승자가 맞는가?”
“분명합니다· 급한 대로 흑월을 통해 확인했으니 틀림없는 사실일 겁니다·”
대답을 한 이는 곁에 있던 담주인의 심복이었다·
철검문은 감숙성 금창(金昌)에서 수십 년 동안 명맥을 유지하던 소문파였다· 금창이란 지역 자체가 워낙 척박한 곳이라 제자를 많이 받아들이지 못해 몰락의 길을 걸어 지금은 기억하는 이조차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검공은 무척이나 대단해서 문파의 맥이 끊기기 전에는 감숙성에 적수가 거의 없을 정도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가 정말 철검문의 계승자라면 남하한 행적과 어느 정도 일치하지· 그런데 왠지 찝찝하단 말이야· 무언가 더 있는 것 같은데·”
다른 곳은 몰라도 흑월의 정보력은 운중천에서도 인정하고 있었다· 담주인 역시 흑월의 정보를 상당히 신뢰하는 편이었다·
“마음에 걸리신다면 차라리 지금 제거하는 것이····”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누가 뭐래도 그는 한창 강호의 주목을 받는 무인이니까· 그에 대한 처분은 총관부에서 맡기고 우리는 이곳에 집중한다· 이곳에서 있던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절대 안 돼·”
“옛!”
대답을 하는 심복 무인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사소한 흔적 하나 남기지 말고 처리해·”
“옛!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심복 무인이 대답과 함께 적무당의 무인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홀로 남은 담주인이 검은 상자가 으스러질 정도로 손에 힘을 줬다·
“밀야··· 아주 재밌는 짓을 벌였군· 덕분에 제대로 골치 아프게 됐어·”
☆ ☆ ☆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적갈색의 대지뿐이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풍경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바람은 옷깃 사이로 파고들어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 정도로 광폭했고 하늘은 온통 우중충한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렇게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들이닥칠 것 같은 살풍경한 대지에 깊은 족적을 남기며 홀로 걷는 이가 있었다·
검은 피풍의에 유난히 빛을 발하는 은색의 창 그리고 황금색 광망이 인상적인 남자는 바로 흑익신창이었다· 그는 검은 관을 끌며 묵묵히 걷고 있었다·
흑익신창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리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르지 않는 내공을 지닌 그다· 그런 그가 겨우 관을 끌고 가는 것이 힘들 리 없었다· 연결된 끈을 통해 느껴지는 관의 무게보다 가슴을 짓누르는 업의 무게가 그를 힘들게 했다·
“휴!”
잠시 한숨을 내쉬던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반나절을 걸어 도착한 곳은 커다란 절벽 아래 자리 잡은 조그만 마을이었다· 마을 앞쪽으로는 황토 빛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고 기다란 쇠줄만이 절벽 밑의 마을과 외부를 연결하고 있었다·
잠시 마을을 바라보던 흑익신창은 이제까지 끌고 온 검은 관을 어깨에 짊어지고 쇠줄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본인의 몸무게에 검은 관의 무게까지 더해졌지만 길게 늘어진 쇠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흑익신창은 순식간에 쇠줄을 내달려 마을에 도착했다·
절벽 아래 자리 잡은 마을은 나무로 만든 볼품없는 모옥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거리가 잘 닦여 있고 곳곳에 나무도 자라는 것이 신경 써서 가꾼 티가 역력했다·
인기척이 없던 거리에 흑익신창이 나타난 순간 모옥의 문과 창문들이 하나둘씩 열리기 시작했다· 흑익신창의 모습을 확인한 마을 사람들이 반가운 표정으로 나왔다가 그가 짊어진 검은 관을 보고 흠칫했다·
너무나도 무거운 흑익신창의 표정에 마을 사람들의 표정까지 덩달아 어두워졌다· 감히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흑익신창은 마을의 중앙에 있는 모옥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후 오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늙은 악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네····”
반갑게 흑익신창을 맞이하던 늙은 악공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흑익신창의 어깨에 짊어진 검은 관을 보았기 때문이다·
“설마?”
“미안하네·”
흑익신창은 단 한 마디를 했을 뿐이지만 늙은 악공은 단숨에 전후 사정을 꿰뚫어 보았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안으로 들어오게·”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흑익신창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늙은 악공의 모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옥 안은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 더욱 단출했다· 거문고와 비파 같은 악기들만이 걸려 있을 뿐 그 흔한 가구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흑익신창은 짊어지고 있던 검은 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늙은 악공이 떨리는 손으로 관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러자 관 안에 누워 있는 금단엽의 얼굴이 보였다·
늙은 악공은 손을 뻗어 금단엽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손끝에 느껴지는 시리도록 차가운 느낌에 늙은 악공이 눈물을 흘렸다·
“단엽아·”
그가 아끼는 제자였다·
젖먹이 어린것을 데려와 손수 기저귀를 갈아가며 키운 자식 같은 아이였다· 자신을 부모처럼 따랐고 물먹은 솜처럼 가르쳐 주는 것은 무섭게 흡수했다·
총명이 과해 항상 걱정이 됐지만 그래도 워낙 자신의 앞가림을 잘하는 아이라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가 평범하게 살아가길 원했지만 조그만 울타리에 가둬 키우기에는 금단엽은 너무나 과한 아이였다·
마침내 한 사람의 어른으로 또 한 명의 무인으로 완성이 되었을 때 금단엽은 모두에게 밖으로 나갈 것을 읍소했다· 젊은이들은 그에게 동조했지만 나이 든 이들은 반대했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금단엽은 자신에게 동조하는 젊은이들을 데리고 세상으로 나갔고 결국 이렇게 차가운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그런 제자를 바라보는 늙은 악공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듯했다·
늙은 악공이 고개를 들어 흑익신창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두 눈은 어느새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누군가? 누가 있어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든 것인가?”
“그 아이의 이름은 진무원이라고 하네· 그는 북천문의 마지막 후인일세·”
“진무원 북천문· 결국 악연의 끈이 여기까지 이어졌군·”
늙은 악공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엄청난 기세가 절로 발산됐다·
천공음마(天空音魔) 윤천학·
그 위대한 칭호를 금단엽에게 물려준 전대의 무인이 분노하고 있었다· 그의 분노에 흑익신창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밀야의 장로로서 정식으로 대회합령을 요청하겠네· 사대마장 역시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두 참석해 주길 바라네·”
“자네····”
“이 아이는 이대로 쓰러졌지만 이 아이의 꿈마저 그대로 사라져서는 안 되네·”
흑익신창의 시선이 관 속에 누워 있는 금단엽의 시신을 향했다·
‘결국 네가 원한대로 되었구나· 이제 만족하느냐 단엽?’
전대의 천공음마인 윤천학이 대회합령을 요청한 이상 이제까지 은거하다시피 숨어 있던 이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난세가 시작될 것이다·
“휴!”
흑익신창의 나직한 한숨이 허공에 흩어졌다·
문득 그가 어깨를 어루만졌다· 아직 딱지가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아릿한 통증을 발산하고 있다·
‘북검·’
그에게 당한 상처가 쉬이 낫지 않고 있었다·